변덕쟁이 며느리 다루는 법
이놈의 전기가 또 나갔네
자기 큰일 났어
아기 이유식 만드는데 전기 나가면 어떻게 요리해!!
고객센터 전화해봐 언제 다시 들어오는지..
조금 있으면 들어와~ 기다려봐 이따가 하면 되지 이유식은
냉장고 아기 이유식 상한다고. 어떻게 좀 해봐
별일 아니라며 대수롭지 않은 샤로프. 이유식 만드는 게 얼마나 일중에 일인지 모르는 남편이다
아버님은 나의 눈치를 살피더니 부리나케 시동을 켜고 전기사업소로 가셨다
근처에서 전기를 끌어다 공사 중이어서 시간이 조금 걸릴 거라고 하여 재촉하고 왔으니 조금만 참으라 하셨다
여름이라 에어컨이며 일반가정에서 전기를 많이 쓰는 것도 있었지만 이번 주는 근처에서 전기공사를
한다고 해서 더 자주 나갔다
나갔다 하면 반나절은 더운 여름 에어컨도 인터넷도 모든 게 올스톱!
미리 핸드폰으로 인터넷 없이 할 수 있는 게임들을 다운 받아 놨지만 그마저 지루하여 그 시간을 잠으로 보냈다
운전도 못하고 말도 안 통하고 길도 모르기에 누가 따라가지 않으면 나갈 수도 없었고
집에서 할 거라고는 시엄마를 도와 집안일하기와 아기와 놀아주기, 바글바글 식구들이 오면 인사하고 음식 장만 돕는 것이 전부였다
우즈베키스탄 시골마을 집순이는 이렇듯 답답한 일상의 반복이었다
우울해질 찰나에 아버님은 나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갓난쟁이 딸과 차에 타라고 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시장으로 향했다
갓 구운 빵과 내가 좋아하는 과일을 이것저것 사주시려고 데리고 나오신 것 같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시곤 길 건너로 뛰어가 빵을 주문하고 기다리고 계셨고
나와 아기는 차에서 아버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구운 빵이 다 팔려서 다시 10분을 기다려야 했다
50도에 달하는 무더위에 차 에어컨은 왜 또 고장이 났는지. 차 안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렀다
내 옆에서 똑같이 땀을 흘리는 갓난쟁이 딸을 보니 엄마인 내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건너편에서 빵을 기다리면서도 나의 모습을 보고 초조해 보이는 아버님 때문에 표정은 감추지 못했겠지만 싫은 티를 낼 수도 없었고 내고 싶지도 않았다
3개월 동안 시부모님과 한집에 산다는 것. 더구나 그 먼 우즈베키스탄에서 신혼초에 내게 기댈 곳은 남편이 전부였다
그런 남편과 다투는 날이면 내가 유일하게 혼자 갈 수 있는 마트에 갔다
걸어서 20분이나 가야 되는 마트인데 과자를 사 먹고 돌아오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가다 보면 풀어져있는 큰 개도 있고 찻길 옆에 닭들도 우르르 모여있다
차는 쌩쌩 달리고 차와 동물들을 피해 다니느라 이곳저곳으로 슬금슬금 걸어갔다
편의점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처음에 문화 차이와 급작스러운 환경변화에 많이 힘들었다
잘 지내다 한 번씩 힘들어하면 남편은 나를 데리고 타슈켄트로 가 며칠씩 놀다 오곤 했다
그렇게 좋았다가 싫었다가 적응했다가 못했다가 할 때쯤
나는 참아왔던 내 감정이 터지고 말았다
아기 엉덩이에 종기 같은 게 났는데
일주일에 한두 번 아버님과 어머님이 딸을 데리고 병원에 다녀오는데 나아지지 않았고
별거 아니라고 했던 시어머님이었지만 도저히 안 되겠어 말이 안 통하더라도 일단 가서 직접 의사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병원에 따라나섰다
병원에서는 기다리면 위로 올라와 자연스럽게 없어질 수도 있지만 째야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어머님은 계속 약을 먹이고 낳을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던 것이다
일단 나는 당장 수술해야 된다고 말했고 잠시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병원이라는 곳이.
원장실에는 묶은 때가 가득한 세면대에 낡고 오래되어 보이는 기구들 금방이라도 비만과 고혈압으로 넘어갈 것 같은 배가 남산만 한 의사 선생님
이대로 여기 있어도 괜찮을까.
한국에 너무 가고 싶었다
공항에 가려면 차로 9시간을 가야 하고 아픈 아기를 어떻게 또 한국까지 아픈 채로 데려갈까 걱정이 됐다 도저히 애를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남편이 한국에 같이 가자고 했지만 다 싫었다
아이 문제로 극도로 예민해진 나는 남편과 결국 어른들 앞에서 크게 싸웠다
시댁 식구들 모두가 나를 보며 한국 며느리는 버릇없고 개념 없는 며느리에 왜 저리 극성인가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참 많이 속상했다
모든 게
방문을 잠그고 들어와 넋 놓고 앉아있다가
참아왔던 눈물이 터져버렸다
한참을 이불속에서 울다가 잠이 깨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당장 만들어야 되는 아기 이유식 생각에 주방으로 갔다
한국 이유식을 만드느라 재료 구하기도 힘들어 인터넷 레시피를 뒤져가며 있는 재료들로 그렇게 밥을 짓고 있는데
아버님이 주방에 들어와 웃는 얼굴로 나에게 핸드폰을 건냈다
구글 번역기였다
딸아, 나도 러시아에서 10년을 살면서 불편한 게 정말 많았다. 그래서 네가 지금 어떤지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하지만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니 우리 조금만 참고 견뎌보자.라고
시부모님과 말을 할 때는 보통 남편이 통역을 해주거나 했고 남편이 없을 땐 표정이나 몸짓을 써가며 말하고 그것들로 서로를 판단했는데 아버님의 번역된 글을 읽으니
아버님이 정말 내가 생각했던 분이 맞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빠랑 완전 다른분이시군.)
이 낯선 땅에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걸
어쩌면 그런 사람을 찾고 있었나 보다
나는 말도 안 통하는 외국에서 남편만큼은 나보다 더 내편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서 실망도 컸던 것 같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나는 스스로가 물가에 내놓은 아이가 되어있었고 남편은 계속 내 옆에만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소한 것으로 항상 싸움을 걸었고
항상 멋대로 하려 하고 매번 불평하고 화를 내고.
결혼을 하고 나서야 5년 만에 모국에 간 남편이었고 그렇기에 남편은 매일같이 어른들과 결혼식 때 와준 사람들에게 인사하러 다니기 바빴고
아버님이 일을 하러 가시면 같이 따라나서서
나는 자주 집에 덩그러니 혼자 있는 날이 많았다
내 잘못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으니 더 힘들었던 것이다
아버님의 구글 번역 이후 나의 마음이 녹아내렸다
남편의 위로보다 아버님의 말씀 한마디에 내 마음이 확 녹아내린 것 같다
나는 그날 이후 집에 올 때까지 한 번을 불평불만하지 않고
모두 참았다
우즈베키스탄에 남은 기간 동안 나는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을 보살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나뿐만 아니라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졌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나의 힘듬을
푸는 목적으로 남편을 괴롭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책을 읽게 되었고
책은 나에게 힘과 위로를 주는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더 이상 집이 답답하지 않았다
외국생활에 안정이 되어 갈 때쯤
우리는 다 같이 한국으로 돌아왔고
잠깐이지만 같이 지내는 동안 아버님께 받았던 은혜 한국에서 불편하지 않게 모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좁은 집에서 같이 생활하기 불편하셨겠지만 최대한 잘해드려야지 했고
아버님은 항상 내가 쉬는 날에 집에 있으면 방에만 계셨고 밥 먹을 때만 나와 한자리에 계셨다
그래서 주말이면 바쁜 척 내가 나가기도 했다
칫솔도 한쪽에 따로 두시고 쓰신 수건은 쓰고 방에 가지고 가서 말려서 쓰기고 같이 살지만 없는 사람처럼 계시려고 했다
그렇게 계시다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셨다
러시아에 계실 때 하던 사업이 망해 한국과 우즈베크에서 할 수 있는 사업을 생각하셨는데 결국 우즈베크로 돌아가기를 택하셨다
많이 불편하셨던 것 같다
아버님을 처음 만난 날이 생각이 난다
까다로운 심사로 결혼식 전에 겨우 비자를 받아서 한국에 오셨고 그날이 아버님과의 첫 만남이었다 안 보이는 기싸움을 했던 시어머님과 다르게 남편의 얼굴이 절반은 있었던 푸근하고 인상 좋아 보였던 내 시아버님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 말 며느리가 나 하나여서 더 잘해주시기도 하셨고
진짜 딸이 아니어서 딸보다 더 신경 써주려고 하는 시아버님이시다
지금은 우즈베키스탄에서 마음껏 일도 하시고 기도하러 사원도 자주 가시고 얼굴에 더 젊어 지신 것 같다
한국에 계시는 동안 기도 못 펴고 불편해하시는 모습을 보다가 요즘은 활기가 넘쳐 보여서 좋다
아버님을 뵈러 우즈베키스탄에 또 가고 싶다 위험한 발언일 수도 있겠지만
또 시댁 식구들이 나를 절레절레할 수도 있지만 두 번째 방문은 왠지 모르게 잘 놀 자신이 있다
타지 생활은 개고생! 이라는걸 확실하게 느꼈지만 묘한 중독이 있는것 같다
난 오늘도 개고생?중인 남편에게 오늘 하루도 수고하라며 따뜻한 녹차한잔을 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