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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in Nov 21. 2019

우즈베키스탄 시부모님을 위한 바다여행

우리는 지난봄,

동해바다를 보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f1비자(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인  배우자의 부모,  가족, 친척을 초청할 때 발급받는 비자로 최장 4년 10개월까지 체류 가능)로 한국에 체류할 수 있었고 


아버님은 서프라이즈를 좋아하는 분인 건지 2년이 다 되어가도록 잘 지내시던 아버님께서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간다는 갑작스러운 말씀을 하셨다

막상 간다고 하시니 많이 섭섭했다. 평소에 많이 신경 못써드린 것에 죄송한 마음도 들고

이제 언제 다시 만나려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나는 어디든 추억을 만들러 떠나자는 생각에 어머님 아버님이 가장 좋아할 만한 여행지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선택한 곳이 바다였다


우즈베키스탄은 바다가 없고 강만 있어서 인지 남편을 포함한 시댁 식구들은 해산물을 보면 벌레 보듯 하고

오징어나 낙지를 보면 까무러친다

오징어와 낙지젓갈은 내 밥도둑이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결혼 후 해산물을 구경하기가 힘들어졌다

그리운 밥도둑이여.


우리는 토요일 아침 일찍 출발해서 바다를 보고 해산물이 힘들다면 생선구이와 회를 먹을 생각으로 여러 맛집도 알아보고 갈 준비를 마쳤다

펜션까지 예약하고 싶었지만 아기가 있어서 낯선 곳에서 자는 것보다 집이 편할 것 같아 당일치기 여행이 되었다

사실 시댁의 절약정신 탓에 숙박비 아끼려 한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우리 집 육아 템인 아기침대가 없기에 잠을 설칠 아이를 생각하니 당일치기를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벚꽃이 한참 만개하던  어느 봄날

우즈베키스탄은 벚꽃마저 없다고 하니 이런 좋은 풍경을 시부모님께 선물해드릴 수 있어 너무 기뻤다

마치 이 바다가 내 것인 양 벚꽃 바다의 주인이 된 것처럼 

쏟아지는 한국 명소의 자랑을 뽐내었다


날씨가 비가 올락 말락 하는 날씨였지만 흐리면 흐린 대로 나는 우리 가족과 함께해서 더없이 즐거웠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아빠 엄마는 어린 나를 데리고 여행을 많이 다니셔서 그런지 나는 여행을 참 좋아한다


맞벌이를 하는 우리 부부는 서로 시간 맞추기가 힘들다 보니 여행에서 멀어진 삶을 살고 있었지만

아이에게도 시부모님에게도 한국의 바다를 보여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아버님 어머님은 러시아에 살 때 한두 번 바다를 본 적이 있다고 했는데

여행으로 간 건 아니고 지나가다가 보았다고 한다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일을 다니며 살림하고 아기 키우는 삶에 매진하는듯해 보였고 여행을 함으로써 행복을 찾기보다는 사람들과 잔치를 하고 식구들이 모두모여 잔치를 하고 이런 것에 더 삶을 소비하고

그 때문에 시부모님은 여행을 많이 안 해본 듯하다

바다에 도착했을 때 환하게 웃는 시부모님을 보면서 역시 여건이 안돼서 그랬던 거지 

여행 싫어하는 사람은 없구나 싶었다

이렇게 좋아하시는데 진작 데려올걸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사실 우리가 온 이곳 경포해변은 남편과 신혼여행으로 온 곳이다

신혼여행에 들어가는 돈을 아끼고자 나는 국내여행을 택했고 남편에게는 한국이 해외지 위안 삼으며

이곳으로 왔던 것이다

2년이 지나고 다시 오니까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나면서 시부모님과 오니 같은 곳이지만 색다르게 느껴졌다


우리는 점심으로 신혼여행 왔을 때 너무 맛있게 먹었던 초당 칼국수집에 갔다

시부모님은 회도 잘 못 드시고 안전하게 우리 식구가 잘 먹는 칼국수를 먹게 되었다

주차할 곳을 찾고 찾다가 주차하기 좋은 곳에 들어갔는데 신혼여행 때 왔었던 그때 그 집이었다

다시 와서 먹어도 맛있었다


밥을 먹고 또 바다를 보고 카페거리로 가서 커피도 마셨다

커피 가격을 보고 비싸다고 느끼셨는지  밥 먹기 전에 편의점에서 산 커피를 마신다는 시아버지였지만

아버님의 말을 뒤로하고 시부모님이 좋아할 만한 커피를 골라 주문하였다


그렇게 우리나라에서 너무나 예쁜 강원도 바다를 시부모님께 선물하고 좋은 추억을 가지고 집으로 출발했다


집에 도착해서 아이 짐을 풀고 있는데 딸이 돈을 들고 나에게 왔다

손주용 돈으로 10만 원을 주셨다


아버님 돈이 어딨어서.. 괜찮은데.. 다 시드려

아니야 그냥 받아 아빠가 주고 싶어 하는데


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고 아버님이 주신 10만 원은 딸 통장에 입금도 하지 않고 아직까지 통장에 잘 끼어놓았다

또 언제 받을지 모르니~~~ 소중히 간직하는 중이다


아버님이 집으로 가시는 날 공항에서 나는 부끄럽게도 눈물을 보였다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홀짝


다음에 오시면 꼭 제주도에 같이 가자고 잘 가시라고. 갔다가 그리우면 다시 오라고 말했다

연신 고맙다는 말만 하며 웃으며 아버님은 그렇게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셨다 


우리는 내년쯤에 우즈베키스탄에 갈 것 같다

그때 되면 한국에 있는 친정부모님이 또 보고 싶겠지

국제결혼은 어느 한쪽이 어쩔 수 없는 이산가족이 된다


양쪽 집안 모두 같이 살면 좋은데 그럴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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