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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in Mar 19. 2020

아빠, 나 우즈베키스탄 남자랑 결혼할래

왜 지나고 나야 깨달을까.

친정부모님은 손주를 보려고 우리 집에 올 때면 시어머니나 사위가 불편할까 싶어 엉덩이를 붙이기가 무섭게 일어나셨는데, 같은 동네에 사는 것도 아니고 나는 이럴 때마다 일찍 가버리는 부모님에게 서운했었다. 왜 저리 눈치를 보시는지.

지난 주말 오랜만에 친정부모님이 우리 집에 왔는데 먹을 것을 잔뜩 사 가지고 놀러 오셨다.

나는 편하게 있어도 된다고 늦게까지 놀다 가라고 했고 부모님이 사 오신 오리고기도 구워 먹고 과일과 차도 마시고 아이의 재롱도 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문득 샤로프와의 결혼을 그리 반대했던 우리 아빠가 지금은 어떻게 저렇게 샤로프를 좋아하게 됐나 그때를 떠올려보았다.


우즈베키스탄 남자를 사랑하게 되고 나는 그의 프러포즈를 받으면서 우리는 깨가 쏟아지는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행복도 잠시, 어둠의 그림자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근데, 부모님은 어떻게 설득시키지?


돈도 종교도 문화도 그 어떤 차이보다 우리는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우리는 우리 편으로 만들기 쉬운 사람부터 만나 설득해 보기로 전략을 짰고, 일단 아버님은 샤로프의  생각을 믿고 존중해주신다 하셨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종교도 다르고 한국사람이랑 결혼해서 한국에라도 살면 챙겨줄 수도 없는데 마누라 밥이나 제대로 얻어먹을 수 있냐며 하나뿐인 아들이었기에 어머님은 더 극심한 반대를 했었다.

어머님은 샤로프가 학창 시절 운동을 하다 크게 다친 적이 있어 더 애지중지하며 키우셨고 아랍어를 배우고 싶어 유학 가고 싶다는 샤로프의 꿈도 어머님의 걱정에 접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에서 10년 넘게 살고 계신 샤로프의 이모를 만나 이모님을 설득하기로 했다.

멀리 계신 시어머님의 마음을 돌리기보단  이모님과의 만남을 많이 갖고 나를 어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어머님의 바로 밑에 동생인 이모님은 한국에서 샤로프를  엄마처럼 돌보아 주었고 샤로프 엄마가 이모라고 해도 될 정도였으니 이모님의 찬성 덕분에 시어머니의 마음을 돌리기까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물론 사원에 가서 내가 무슬림이 되는 세례도 받고 마치 1등 며느리가 될 것처럼 이것저것 부단히 노력을 기울인 것도 한몫하긴 했지만.


시댁의 결혼 승낙을 받으며 어느 정도 분위기가 좋아졌을 때쯤, 우리 부모님에게도 이야기를 꺼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녁을 만드는 엄마와 식탁의자에 앉아있던 아빠. 우리 집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지금이 말하기 좋은 타이밍 같아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소파에 드러누워

바들바들 떨리는 마음을 움켜잡고 말을 꺼냈다.

나는 아직도 그날의 대화 내용과 분위기가 선명하게 기억난다.


엄마! 나 결혼할래

어? 누구랑????

응~ 한국에 일하러 온 우즈베키스탄 친구인데 괜찮은 사람 있어! 똑똑하고 잘생겼는데 돈도 많고.

설득하기 위해 거짓말도 막 섞어 최대한 샤로프를 어필하였다.


열심히 샤로프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고 엄마는 이것저것 물어보며 꽤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문제는 아빠.

고집이 세고 남에게 지는 걸 싫어하는 한 성격 하는 우리 아빠가 과묵한 스타일이 아닌데,  난 이빠가 곧바로 엄청난 비난을 할 줄 알았는데

아빠는 아무 대답이 없었고, 나는 아무 말 없는 아빠가 더 무서웠다.


샤로프의 비자가 얼마 남지 않아서 나는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진작 허락받고 결혼 준비를 했으면 좋았을 것을 결혼 허락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미루고 미루다 비자 만료일이 다가올수록 내 마음이 조급해졌다. 상처드리지 않고 좋은 모습 보여주면서 천천히 부모님을 설득하고 싶었는데.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에 나는 이 모든 걸 샤로프 탓을 하며 투덜거렸었다.

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며칠 후 나는 분위기를 한번 훑고 용기 내어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아빠. 나 우즈베크...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빠가 딱 한마디 하셨다.


차라리 아프리카 남자를 데려와!!!!!




하는 수없이 엄마만 먼저 샤로프를 만났고 엄마는 선해 보이는 인상에 한 번 보고 마음에 드셨는지 나를 도와 아빠를 설득했고 자식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아빠는 결혼을 허락해 주셨다.

(사실 설득하는 이 기간에 친구에게 전화해서 아빠 욕을 하며 얼마나 많이 울고불고했는지 모르겠다)


우즈베키스탄 남자와 결혼하고 너랑 똑같은 딸 낳으라며 악담을 했던 아빠의 말대로 나는 딸을 낳았고

그때 왜 반대했냐고 농담처럼 물어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날의 아빠 표정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서 굳이 그날의 일을 끄집어내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그때의 부모님이 왜 반대하셨을까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내가 생각할 때 결혼 전부터 지금까지 부모님의 반대한 이유를 3가지로 나누어 본다면


부모님이 처음에 내가 우즈베키스탄 남자와 결혼한다고 하였을 때는 경제적인 부분이 첫 번째 이유인 것 같았다.  아빠는 돈 없으면 얼마나 서러운지 얼마나 사람들이 무시를 하는지 너는 모른다고 했었던 게 기억이 난다. 아빠가 건물주가 되기까지 부동산 투자를 한다거나 은행에 대출을 받는다거나 하지 않았고 조금씩 물려받은 재산과 젊은 시절 배운 기술로 노동을 하며 부모님이 안 쓰고 모아서 얻게 된 것이었다. 삶의 여유 없이 아등바등 살며 이제 조금 편해져도 될 아빠지만 아직까지 부모님은 요즘같이 흔한 해외여행 한번 제대로 못 가고 힘든 일을 하고 계신다.

그래서 아빠가 하나 있는 딸은 조금 여유 있는 삶을 살기를 바라셨던 게 아닐까 싶다.


두 번째는

부모님의 반대가 사그라들 즈음에 또 다른 걱정을 하셨던 것 같은데 부모님은 문화 차이 종교 그리고 언어 차이 다문화가정에서 낳은 아이를 걱정하시는듯하셨다.

돈이야 번다 쳐도 같은 한국사람끼리도 살면서 죽내 사내 하는데 이런저런 차이가 나는 외국인과

어떻게 평생을 살까 하는 걱정이셨다. 또 다문화가정의 아이에 대한 차별과 인식에 대해서도 걱정을 하신 듯하셨다.


그리고 세 번째는 부모님의 걱정은 결혼하고 나서 찾아온듯하다.

우즈베키스탄에 가서 산다고 하면 어떡하지.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나는 실제로 우즈베키스탄에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부모님에게도 언젠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신기하게 외국에 생활할 때랑 모국으로 돌아왔을 때 뭔가 다름이 느껴진다.

밝고 자신감 있던 한국에서의 나는 우즈베크에서 어느새 예민하고 눈치 보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아무리 한국생활 10년이라지만 남편의 한국에서 못 보던 모습을 우즈베키스탄에서 에서 많이 본 것도 같다. 남편의 모습은 참 밝았었던 게 기억이 많이 난다. 평생 우즈베키스탄에 살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남편의 나라에 적응해가면서 언어도 배우고 남편도 자기 나라에 가서 기 펴고 사는걸 나도 보고 싶으니까. 한 번쯤을 살아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고 남편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있고 여러 이유들이 있는 것 같다.


타지에 살면 나도 제일 먼저 부모님 걱정을 할 것 같다. 하지만 부모 마음과 같을까,

부모님은 자식 걱정을 죽을 때까지 하시는 것 같다.

아빠의 결혼반대가 심했지만 중학생인 나에게 뽀뽀를 해달라며 술 먹고 들어와 나를 깨우던 딸바보였던 아빠라 아마 누구를 데려와도 성에 차지 않았을 아빠다.

지금은 그 어떤 마음보다 나는 부모님께 미안한 마음이 가장 큰 것 같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남자는 우리 아빤인데 내 마음을 알까 모르겠다.

알아도 징그럽다고 하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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