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elin Mar 28. 2020

우즈베크 시누이가 싫어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까

나는 가끔 과거에 있었던 일의 악몽을 꾸곤 한다.

그때 내가 얼마나 아팠으면 서른이 넘은 지금도 그런 꿈을 꿀까.

상처가 아물 때쯤 다시 상처가 났고 또 잊힐 때쯤 생기는,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니는 상처인 듯하다.

오늘은  글쓰기를 좋아하게 된 내가 글로써 나를 치유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마음속 짐 같은 이야기를 용기 내어 적어보려 한다.


결혼 후 처음 우즈베키스탄에 갔을 때  한국에서 공부한 시누이는 한국어로 나와 대화할 생각에 너무 설렌다 했고, 한국에서 며느리가 온다며 아버님은 아들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차도 바꾸시고 우리가 머무는 방의 가구와 인테리어도 이쁘게 해 놓으셨었다.  또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식구들은 우리를 마중하기 위해 이모 삼촌 할 거 없이 차로 9시간이나 되는 공항까지 나와계셨었는데 그렇게 나는 그들에게 기대감 있는 며느리가 되어 있었다.


평소에  주위에선 내가 사람들이랑 잘 어울리고 성격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나는 누구보다 낯가림이 심하고 누군가 처음 만나면 낯가림이라는 단어가 온통 머릿속을 지배한다. 하지만 아닌 척

애써 참는 것이고 자세히 나를 들여다보면 먼저 말을 잘 안 하고 소심한 나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나는 한번 친해지면 속마음을 털어놓고 뭐든지 내어줄 것처럼 사람들에게 잘하는 나지만 한번 싫어지면 또 보이지 않는 장벽 때문에 그를 멀리하게 된다. 그래서 난 장벽을 쌓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양보하며 노력하는 편이다.


그러던 내가 우즈베키스탄에서 나는 아무 노력도 이해도 하지 않고 누군가와 그 장벽을 쌓아버리고 말았다.

그 누군가는 우리의 결혼을 도와주신 이모님의 큰딸. 그러니까 사촌 시누이이다.

한국 같으면 시댁의 이모님의 딸이라고 하면 먼 친척의 일 같지만 우즈베키스탄에서의 이 정도 사이는 엄청 가까운 편이다. 특히 우리 시댁의 족보처럼 근친혼의 경우는 더 그러하다. 한동네 모두 모여 살다 보니 이모가 엄마 같고 그러다 보니 이모 딸은 친동생이나 다름없이 자랐다.


내가 그 시누이를 싫어하게 된 이유는 딱 한 가지.  항상 나를 노려보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나를 시기하나? 아니면 나와 친해지고 싶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기에 오해를 풀 수도 없었고 먼저 다가가는 성격이 아닌 나라서 그에게 물어보지 못했다.

아니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짓이었으니까.


시누이가 나를 빤히 쳐다보면 처음엔 나는 시누이 눈을 피했었다. 나는 내가 싫어하는 행동은 남한테 안 하려고 하는데 어느 순간 나도 내가 왜 피해야 되지 생각이 들어 그 시누이를 뚫어져라 째려보았다. 내가 어떤 느낌인지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다 나는 분노가 폭발하여 남편에게 시누이 욕을 퍼 부우며 말했다.


자기! 걔 왜 자꾸 날째려봐? 진짜 싫어.

자기가 말 좀 해 왜 그런 눈으로 보냐고!!

원래 걔가 눈이 크잖아 그냥 본거겠지~

아니라고~!!


남편은 대충 대답하고 넘겼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긴 했나 보다.

그 이후로 시누이가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자기 시누이한테 뭐라고 말했어? 뭐라고 말한 거지? 요즘 나를 안 째려봐.

응 말했어 째려보지 말라고. 또 그러면 진짜 가만 안 둔다고 했어.

근데 째려본 거 아니래. 그냥 본 거래.

아니야 째려봤어. 그리고 상대방이 기분이 나쁜데 그게 째려본 게 아니라고?


나는 그 시누이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여자들끼리만 있는 공간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무시했다.

그 시누이가 다른 시누이들이랑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나는 우즈베크어를 못하지만 그들의 대화에 더 끼고 싶지가 않았고 스스로 나를 따돌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시누이가 다른 시누이들에게 내 욕을 하는 것만 같았다.

혼자 바람 쐬러 어디라도 가고 싶은데 우즈베키스탄이라는 낯선 곳에서 그것도 시댁에서의 나는  답답함을 달랠곳이 마땅히 없었다 그 흔한 카페도 없었고 언어도 안 통하고 운전하기도 무서웠다.

우리 집이 큰집이어서 항상 우리 집에 모였고 보기 싫은 시누이가 매일같이 오니 점점 더 시누이가 싫어지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갈 때가 되어 다시는 안 봐도 되겠지 생각했는데 웬걸. 그 시누이도 한국에 간다고 비자를 만들고 있었다.

 한국에 계신 이모님 집에 머무르며 어린 동생을 봐줄 목적으로 한국으로 오는 것이었다

같이 오는 게 무척이나 싫었지만 우즈베키스탄에서 받은 상처만큼 타향살이의 설움을 갚겠노라 이를 갈며 한편으론 어디 한번 한국에 와봐라 하였다.

한국에서 왕래 한번 없이 얼굴 한번 안 보고 남처럼 지내던 중

언제 한 번은 퇴근하고 오는데 지하철에서 누군가 나를 쳐다보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리니

시누이가 나를 또 째려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고 나는 소름이 돋아서 또 집에 와서 남편에게 시누이 욕을 했다.

그 시간에 왜 지하철을 타고 있냐며 혹시 불법으로 일하는 거 아니냐며 남편에게 쏘아붙였다.

만약 불법으로 일이라도 한다면 출입국에 신고라도 할 작정이었다.


이 시누이 때문에 남편과도 자주 다퉜고 이것도 그 시누이 때문인 것 같아 더 싫었다.

나는 걷잡을 수 없이 이미 내 마음속에 커다란 장벽이 생겨 버렸다.

우리 엄마 아빤 이모가 얼마나 너를 이뻐하고 신경 써줬는데, 도대체 왜 그럴 게까지 싫어하내며 나를 타박했지만 그럴 때마다 나도 모르게 부모님께 큰소리로 화를 냈다.

이얘기 저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싫었다.

나를 째려보는 그 시누이가.


그렇게 나와 시누이의 갈등이  깊어질수록 가족들에겐 새우등 터지는 일이 되어버렸다.

내 눈치를 보느라 어머님은 내가 집에 있을 때 이모님과 전화통화도 편히 하지 못하는 듯했고 남편도 이모집에 갈 때면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우즈베키스탄을 다녀온 후로 가까이 지냈던 이모집을 더 이상 가지 않았고

어머님이 우리 딸을 데리고 이모네 갈 때도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아 일부러 그런 날은 내가 아이를 데리고 다른 데를 나가곤 했다.


내가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까.

그 속내는 나만이 알고 있다.


과거로 돌아가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는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다행히도 친한 친구가 한 명 있었지만 반 친구들은 항상 나와 친구를 무시했고 선생님은 알면서도 우리 편이 되어주지 않았던 게 내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이후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초등학교 친구들이 많이 가지 않는 곳으로 가게 되었고

나는 언제 그런 아픔이 있었냐는 듯 행복한 학창 시절을 보냈었다.

누구보다 밝았고 누군가 누구를 왕따 시키려 하면 너 참 못됐다고 친구에게 질책하고 그 친구를 감싸주었다.

나도 모르게 옛날의 기억이 나의 성격을 만들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반 친구들과 모두 친하게 지낼 수 있었고 선생님도 나를 많이 좋아해 주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남자가 많은 이과반에 들어가면서 우리 반에 여자는 나를 포함해 6명이 전부였다.

나는 여자답지 못한 성격 탓에 남자 친구들이 더 많았는데 어느 날 우리 반에 한  여자 친구가 다른 반의 여자 친구를 데려와 나를 째려보며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러려니 하고 넘겼는데 나에게 일부러 보라는 듯이 점심을 먹고 들어가면 매번 그런 행동을 했다.

그때 나는 과거의 아픈 기억 때문이었는지 교탁 앞으로가 그에게 뭐하는거냐며 욕을 퍼부었다.

그 친구는 우리끼리 이야기하는 건데라며 비겁하게 변명을 했지만 내가 화장실에 들어갈 때도 내가 있는 걸 알고 화장실에서 친구들과 내 뒷담을 했다. 따돌림을 당했던 예전과는 다르게 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 친구의 행동이 나의 상처를 꺼내어 긁은것처럼 아팠다

나는 집이 멀어 우리 집에서 같이 사는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고 종일 울었던 기억이 있다.

이런 상처들이 제대로 치유가 되지 않아서인지 나는 20대 때도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거나 할 때면 이때의 일이 꿈에 자주 나왔다.

악몽을 꾸는 일은 결혼하고 나서 거의 사그라드려 했지만 시누이와의 일로 나는 다시 그때의 꿈을 꾸고 있다

심지어 이제는 그 꿈에 시누이까지 추가되어 출연 중이다.


남편도 시어머니도 가족들 모두 왜 저렇게 앙숙으로 지낼까 싶겠지만 과거 사실을 이야기해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게 뻔하다고 생각을 했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나를 이해해 주진 못할 거라는.

무엇보다 난 남편에게 내가 왕따를 당했다는 말을 할 용기도 없다.


그 시누이에게 물어보지 못해서 아직도 나는 왜 나를 째려보았는지 내가 싫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오해인 건지 알 수 없지만 나도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고 산다는 게 불편한 건 사실이다.

그냥 다른 거 필요 없이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났을 때 안 좋은 기억은 지워지고 더 이상 악몽을 꾸는 일이 없었음 하는 바람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빠, 나 우즈베키스탄 남자랑 결혼할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