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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마 Apr 16. 2021

비극이 지겹지 않냐는 물음에게

백문이 불여일견

 남자친구와 헤어져서 힘들다는 친구 이야기를 들으며 '별 것 아닌 걸로 요란이구나' 생각했다. 사람이 만났다가 헤어지고 그러는 거지 뭐. 남자가 걔 하나냐? 더 좋은 사람 만날 기회라고 생각해봐. 우리는 중학교 3학년이었고,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친구의 기분을 함부로 다독이려 했다. 한 달 뒤 친구는 '우리 사랑 영원히, 오빠 사랑해'라는 유서를 남기고 수면제 스무 알을 삼켰다. 천만다행으로, 쓰러진 친구를 부모님이 금방 발견하였고 빠르게 신고했다. 신속히 치료한 덕분으로 친구는 소중한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열 여섯에게도 죽음보다 아픈 이별이 있다는 것을 연애경험이 없던 나는 알지 못했다. 친구가 말한 실연의 아픔은 몇 년 뒤 누군가에게 무지막지하게 걷어차임으로써 절절히 이해하게 되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2021년 세월호 7주기. 음악 강사로 일했던 수 년 동안 4월 셋째주는 언제나 <천 개의 바람이 되어>를 배우고 노래하고 연주하는 특강을 했다. 2014년 4월 16일을 잊지 못한다. TV속에는 바다 한가운데 멈춰 기울어진 커다란 배를 정지화면처럼 몇 시간 동안이나 보여주었다. 그 날 나는 대학교 학생식당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사고 뉴스를 생중계로 보고 있었다. 저거 뭐야? 왜 안 구해? 아, 다 구했대? 야 딴 데 틀자. 대수롭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채널은 바뀌었고, 나는 인터넷 뉴스를 새로고침하며 해양 사고가 어떻게 수습되고 있는지 살폈다.


 악몽같은 하루였다. 사람들은 배가 침몰하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면서도 발만 동동 구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배가 완전히 가라앉은 다음날까지도 스스로 탈출한 사람들 외에 300여명 중 누구도 생존하지 못했다. 내 아이가 제주도에서 행복한 추억을 쌓고 있으리라 기대했던 부모들은 아연실색하여 팽목항으로 달려갔다. 출근길 지하철에서는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며 입을 막고 울고 있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나도 훌쩍이는 2호선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 뒤로는 모두가 아는 이야기다.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나중에는 시신이라도 수습할 수 있게 해달라는 아득한 바람으로 바뀌었다. 물에 젖은 소지품과 알아보기 힘든 얼굴을 더듬으며 내 아이가 아니란걸 몇 번이고 확인해야 했던 부모들은 매일밤 실신하고 새벽에 깨는 것이 일상이었다. 우리는 타인의 거대한 불행을, 내가 겪어보지 못해서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아픔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얼마 전* 쌍용차 해고 노동자가 9년만에 복직했다는 뉴스기사를 읽었다(*2018년 9월. 그러나 이들 중 46명은 2019년 12월 무기한 휴직연장을 통보받았고 2020년 5월 복직했으나 이후로도 순탄하지 않았다. 2021년 4월 현재 적자상황이 이어지며 구조조정 및 기업 청산이 언급될 정도로 여러 문제가 얽힌 상태이다). 그들이 고공농성을 벌이며 투쟁할 때와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서른 번째 희생자 소식을 들었을 때를 또렷이 기억한다. 비단 후원금을 보내거나 분향소에 국화꽃을 놓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닥친 무거운 불행이 남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선택지가 많지 않은 공장 노동자의 추레한 뒷모습이 내 아빠같고 엄마같으니 덩달아 가슴이 미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인터넷 뉴스기사 아래 달린 댓글들을 보면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람은 각자 다르게 느끼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관에 따라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기에, 나와 다른 의견이라고 하여 그를 꼬집어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럴 순 없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비극은 나와 동떨어진 것 같아도 언제라도 현실이 될 수 있다. 불행이 비껴간 것을 감사하지 말고 멀리서 그들을 동정하지 않는 것으로도 우리의 역할은 충분하다. 함부로 충언하지 말고, 그저 조심스럽게 기억하면 안될까. 그들에겐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테니까. KTX해고 승무원도 교육권과 이동권을 보장받을 수 없는 장애인도 위안부 할머니도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도, 억울한 죽음과 사고를 겪고도 입막음 당할 수 밖에 없는 수많은 약자들도 서로를 기억하고 연대함으로써 살아갈 힘과 싸울 용기를 얻을 것이다.


 타인의 비극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말하고 싶다. 피해자의 감정과 처지를 헤아리기보다 독한 말로 상처를 덧나게 하는 당신에게, 가능하다면 그와 똑같은 일이 일어나길 바란다고. 그들이 겪는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지 비슷하게나마 경험해보길, 그래서 타인을 이해하는 내면세계와 공감능력이 확장되길 바란다고 말이다. '이 일이 네 가족에게 일어났다고 생각해봐'라는 흔한 가정법으로 훈계하는 대신에 그저 조용히 빌어준다. 백문불여일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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