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서 있기

카롤 시마노프스키, 'Stabat Mater' op. 53

by 토마

Karol Szymanowski - Stabat Mater, Op. 53

감상 https://youtu.be/soC2WFYgWH0?si=uhR-0YlVdwIWlW2I


1.

숨막히는 여름이다. 찌는듯한 더위를 넘어 타는듯한 햇살. 장마는 사라지고, 이제는 우기라고 불러야 할 기이한 현상이 생겨났다는 2025년 한국의 여름이 적잖이 당혹스럽다. 비가 오지 않는 여름이 계속되고 있다. 공기는 무겁고, 창문 틈으로 부는 바람조차 습기를 안고 있어 숨이 막힌다. 이 계절의 눅진한 침묵 속에서, 카롤 시마노프스키의 ‘Stabat Mater’를 듣는다.

축 처진 기분을 다독이고 청량감을 선사할 활기찬 음악을 듣지 않고, 왜 이 곡이 생각났을까. 무더위처럼 짓눌리는 감정 속에서, 숨 막히게 덮쳐오는 열기를 걷어내지 않고, 누군가의 슬픔을 내 몸에 덮는 것 같은 음악을 왜 지금 듣고 싶을까. 비통한 정서를 머금은 이 음악이 흐르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어떤 장면을 떠올렸다.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 아래 서 있는 장면이다. 소리 내 울지도, 무너지지도 못하고, 그저 서 있는 어머니. 그 형상이 갑자기 왜 떠올랐을까.


2.

‘Stabat Mater’는 라틴어로 ‘성모가 서 계시다’라는 뜻이다. 십자가 아래, 아들을 잃고 무너질 수도 울부짖을 수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었던 어미의 뒷모습이 그려진다. 뒤에 ‘dolorosa’를 덧붙여 ‘Stabat Mater dolorosa’라고도 말하는데, 이는 ‘슬픔에 찬 성모’가 십자가에 못 박힌 아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는 고대 라틴어 성가의 첫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시마노프스키는 이 전통적인 전례문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원문 라틴어 가사를 자국 언어인 폴란드어로 번안하고, 일부는 자신이 새롭게 지은 시로 대체했다. 악보에는 라틴어 가사와 병기하고 있지만, 폴란드에서 연주될 때는 반드시 자국어 가사로 부를 것을 작곡가는 명시했다. 쇼팽 이후 가장 중요한 폴란드 작곡가로 평가받는 시마노프스키는 이 작품을 통해 민속 선율과 현대 화성을 절묘하게 엮어내어 민족적 비탄과 개인적 애도를 동시에 담아낸다. 화려하고 웅장한 종교 음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내면 깊숙이 침잠하며 울음을 삼키는 듯한 사적인 기도문처럼 느껴진다.


3.

작품은 총 6악장으로 구성되며, 연주 시간은 대략 22~23분 정도다. 소프라노, 알토, 바리톤 세 명의 솔리스트와 혼성 합창단 및 오케스트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4악장은 유일하게 무반주 합창(a cappella)으로 되어 있어 극도의 집중을 요구한다. 시마노프스키는 고전적 형식에서 탈피해 오스티나토(반복되는 선율), 모달(교회선법 기반) 화성, 병진행, 폴란드 민속 선율과 리듬을 사용하여 전통성과 현대성이 공존하는 독특한 음악 언어를 창조했다.

이 작품에서 그는 고전적인 조성을 일부러 피하고, 대신 모달 음악 언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예를 들어 리디안 선법은 이 작품의 중심 정서에 기여하면서도 투명한 신비감을 더해준다. 특히 1악장의 서두에서 들리는 리디안 선율은 성모의 고통을 표현하면서도 지나친 비감에 함몰되지 않는 초월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뿐만 아니라 그는 폴란드 남부 지방의 전통 민속 음악(특히 고랄의 민요)의 단조롭고 반복적인 리듬과 오스티나토적 선율 구조를 곡 전체에 심어 놓는다. 이런 민속적 요소는 3악장에서 특히 두드러지는데, 거친 리듬과 비동일적인 병행 화성의 사용은 전통과 현대적 감수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4악장은 유일하게 무반주 합창(a cappella)으로 작곡되었다. 이 곡은 르네상스적 폴리포니(다성음악) 전통을 연상시키는 절제된 형태로 구성된다. 정제된 긴장과 밀도 속에서 침묵의 미학을 증명하며, 초기 성가가 가진 단순한 선율을 통해 깊은 묵상의 절정을 표현한다.

전체 곡은 전통적인 ‘Stabat Mater’의 20연의 텍스트를 각 악장별로 나누어 배치하면서도, 각기 다른 화성 언어와 편성 및 선율 구조를 사용하여 점진적인 정서를 고조시킨다. 마지막 6악장에서 소프라노와 알토, 바리톤이 함께 등장하며 합창과 오케스트라가 전개하는 풍부한 질감 속에서, 마치 종말론적 위로와 희망을 암시하는 듯한 폐쇄감을 선사한다.

시마노프스키의 ‘Stabat Mater’는 페르골레지나 베르디, 드보르자크, 아르보 패르트 등 같은 제목을 가진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과도 비교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페르골레지의 곡이 바로크 양식의 아름답고 감상적인 이중창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면, 드보르자크는 낭만주의적 어법과 대규모 합창의 장엄함으로 깊은 슬픔을 표현한다. 반면 시마노프스키는 외적인 화려함이나 감정의 폭발을 최대한 억제하고, 내면의 침묵과 고요함을 통해 민족적 정체성과 공동체적 애도의 정서를 절제된 방식으로 풀어낸다.


4.

이 곡이 완성된 1926년의 폴란드는 국가의 독립을 되찾은 직후였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은 여전했고, 내전으로 인한 분열은 현재진행형이었다. 시마노프스키는 이러한 시대의 공기를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애도를 공공의 감정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했다. 그에게 ‘Stabat Mater’는 성모의 고통을 묘사한 종교음악을 넘어서 공동체가 나아갈 영적 태도라 할 수 있다. 울부짖는 슬픔보다 침묵을 선택한 선율. 감정을 폭발시키기보다 절제 속에서 진실을 증언하는 음악. 시마노프스키는 그것이 슬픔 앞에 선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인간다움의 본질이라 믿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찜통 더위에 녹아내린 것처럼 무력감에 젖은 한국 사회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정확히는 이 사회가 슬픔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서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로 수많은 아이들이 바다에 잠겼을 때, 우리는 애도할 틈도 없이 정치적 공방에 휘말려야 했다. 이태원에서 150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서로를 부여잡은 채 숨이 멎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회 구조적 문제를 책임지는 대신, 개인의 문제로 고통을 격하시키며 누구 하나 사고를 책임지지 않았다.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가 희생된 김군은 CCTV속에서 혼자였다. 맨 몸으로 혼자 거센 물길을 헤매야했던 채상병은 무책임한 병영의 지시 앞에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억울하게 희생된 존재들을 기억하려 애썼지만 너무도 빠르게 잊고 말았다. 아니, 바쁘게 돌아가는 이 사회가 그들을 잊히게 만들었다. 애도를 허락하지 않는 사회, 슬픔을 정치적이라고 몰아붙이는 사회는 고통의 이름을 질식시키고, 기억을 금지당한 죽음들로 넘쳐난다. 이 모두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다. 누군가의 방임, 안전 불감증, 책임회피와 비용 절감, 그리고 끝내 애도조차 허락하지 않는 사회적 침묵이 만든 죽음이다.


5.

우리는 자주 울 기회를 잃는다. 애도할 틈조차 주지 않는 상황 속에서, 분열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우리의 슬픔이 정치적이라는 낙인 속에서 침묵을 강요당한다. 그러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정치적이라면, 우리는 오히려 정치적으로라도 끝까지 기억해야 한다. 애도는 감정이 아니라 윤리이며, 죽은 자를 기억할 수 없는 공동체는 살아있는 자의 존엄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시마노프스키의 음악은 침묵과 정적으로 일관된다. 오열을 대신한 침묵으로 죽음 앞에 단호히 서 있다. 나직한 음조를 통해 고통을 관조하며, 조심스럽고 나약한 울림들이 모여 존재 자체로 애도하는 빛깔과 음향을 자아낸다. 고통 앞에서 꼼짝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것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택했던 애도의 언어다. 휘몰아치는 마음 속 소용돌이 속에서 성모는 침묵으로 증언한다. 요한복음 19장 25절은 이렇게 기록한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의 어머니와 그의 어머니의 자매,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더라.”


십자가에 달려 희생된 이의 ‘곁에 서 있음’의 의미는 동행을 넘는 존재 자체로서의 공감과 연대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진 것이 아닌, 우리 속에 살아 숨쉬는 존재를 향한 연대. ‘곁에 서 있음’이 이 음악의 전부이자, 애도가 필요한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신앙인의 태도다. 성모는 울지도 무너지지도 않는다. 우리도 과격하게 애도하거나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고 ‘함께 서는 것’ 만으로도 증언할 수 있다. 이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고. 이 사람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6.

예수는 죄 없으나 죄인들을 대신해서 기꺼이 고난의 자리에 섰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강요에 의한 희생이 아니다. 예수는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하셨으며, 죄인과 약자의 곁을 지키는 사랑의 결과로서 십자가에 달렸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가 만들어 낸 청춘들의 죽음은 이와 다르다. 그들은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주화된 위험과 책임 회피의 구조 속에서 원치 않게 위험의 최전선으로 내몰린다. 이름조차 지워진 채, 누군가의 이윤과 효율을 위해 소모되어 간 존재들이다. 예수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십자가가 그들에게 억지로 지워졌다.

‘곁에 서 있기.’ 그것이 바로 이 음악이 내게 가르친 애도의 방식이자 인간성의 실마리다. 예수의 길을 따르는 신앙인은 지워진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다시 불러주는 사람이다. 슬픔을 멈추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함께 울어주는 사람. 정치적 낙인에 굴하지 않고 죽음을 기억하며 그 곁에 끝까지 서는 사람. 성모처럼 어깨에 고통을 올려놓고도 무너지지 않는 사람. 시마노프스키의 ‘Stabat Mater’는 한없는 비탄 속에서 끝내 침묵하는 자, 그러나 결코 잊지 않는 자를 지탱하고 위로하는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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