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 안녕을 고할 것인가
나는 꽤 오랫동안, 없는 사람을 붙들고 살았다.
몇 년, 몇 십년이 흘러도 여전히 생생히 떠올려지는 풍경들. 그 사람 얼굴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감정들만큼은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마치 그 순간을 사진이라도 찍은 듯 혹은 그대로 박제가 된 듯. 그것들은 내 마음 한 구석에 여전히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걸 아픔의 기억이라고 불러야할까? 누군가를 격렬히 미워했던 경험이라고 할까.
억울함, 분노, 격정, 후회, 미움, 온갖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감정에 휩싸였던 어느 한 시절.
어쩌면 인생의 지랄총량의 법칙이 내게는 초년에 몰려있다고 믿게될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몇 십년이 훌쩍 지난 일임에도 여전히 고통은 마치 시곗바늘이 멈춘 것처럼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 수많은 디테일은 흐릿해졌지만 그때의 감정은 마치 언제든 불만 당겨지면 터질 준비가 된 시한폭탄 같다. 그렇게 내 안에 늘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곪아터진 이 상처들을 치유하려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했다.
심리 상담도 받아보고, 친한 친구에게 털어놔보고 혹은 나를 잘 모르는 낯선 이를 붙잡고 말해보기도 했다. 글을 썼고 때로는 묵묵히 침묵해보았으며 또는 수시로 자다가 이불킥을 내지르기도 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내가 느낀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위로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공감받지 못하면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고, 공감받더라도 영혼 없는 형식적인 위로를 듣는 것 같았다.
도대체 나는 무슨 반응이 돌아오길 기대한 걸까? 솔직히 나도 내 마음을 몰랐다.
그저 처치 곤란한 마음이 애꿎은 마음속만 윙윙 공회전했다.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고, 손을 놓으려 해도 놓아지지 않는 이 마음을 어디에 내려놓아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같은 자리를 맴돌며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내 마음은 서서히 납작해졌다.
그렇게 얼마나 더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날 문득, 내 안에서 조용히 질문 하나가 솟아올랐다.
그 시절에 정말 너를 힘들게 한 사람밖에 없었느냐고.
너를 도와주거나 이유없이 네게 잘해준 사람은 정녕 없었던 거냐고.
그러자 마음이 기다렸다는 듯 0.1초 만에대답했다. "아니, 절대"라고.
어린 아이의 되바라진 질문에도 되려 웃음을 터뜨리며 총명하다고 칭찬하시던 교회 선생님들. 내 자존심이 상할까 염려해서 모르게 돌려돌려 내게 도움을 주던 고등학교 선생님. 다른 사람들이 나의 노고를 당연시 하고 무시할 때 홀로 나를 인정해주고 추천해주신 회사 상무님. 그리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해주는 엄마. 이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따뜻해졌다.
나는 누군가를 미워하느라 오랫동안 이 사람들을 잊고 지냈다.
나를 괴롭게하던 소수의 사람들을 곱씹고 아픔에 몸부림치느라 정작 기억해야 할 소중한 사람들을 기억에 묻어두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따뜻함이 조금씩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얼마나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이었는가.
고마운 사람들을 등지고 내게 상처만 주었던 사람들의 그림자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떠나고 없는데, 빈자리에 홀로 남아 바뀌지 않는 그림자 속을 들여다보며 괴로워한 것이다.
어찌보면 모든 건 선택이고 마음가짐에 달려 있었다.
어렸고 어리석었기에 내게 선택권이 있는 줄조차 몰랐다. 그저 아파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발만 동동 구르다 분노와 고통에게 주도권을 내어주고 내내 휘둘리기만 했다. 그리고 그 분노와 고통은 내게 있는 자그마한 선함과 커다란 고마움조차 쉽사리 잊게 만들었다.
이제야 안다.
시간이 흐를 만큼 흘렀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이를 먹어서일까?
미워할 만큼 미워해서 훌훌 털어보낼 때가 된 것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나는 오랫동안 고통에 중독되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너무나 익숙해서 안전하다고 느껴지기까지 한 과거의 고통을 이제는 과감하고 냉정하게 끊어낼 것이다.
이것이 지금, 나의 선택이다.
그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이여, 안녕.
앞으로는 당신들을 떠올릴 시간에 나는 고마운 사람들을 생각하기로 결심했어.
어렴풋한 그들을 반드시 기억해낼 거고, 그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쓸 거야.
그리고 언제나 그들의 앞날이 밝고 행복하길 기도할 거야.
너희는 이제 내 기억 속에서 조용히 사라져도 좋아.
이제 정말,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