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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환 Jul 06. 2020

기호로서의 예술작품과
관객의 역할:

김용철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관객은 결코 피동적으로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제시하려는 것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관객이 작품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데 있어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관객의 역할을 올바르게 평가하려면 우리는 하나의 기호로서의 미술작품이 어떻게 지각되고, 기호화되고, 해석되는가 하는 과정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기호생산이론에 따르면, 하나의 작품을 감상하기까지 관객은 세 단계의 행위를 성취해야만 한다. 

첫째는 물질적 대상을 지각하여 지각편린을 생산하는 단계이며, 

둘째는 그 지각편린을 기호화하여 작품으로 받아들이는 단계이고, 

셋째는 작품을 감상하여 그 의미를 파악하고 미적 감흥을 얻는 단계이다. 

다시 말해서 관객은 지각하기, 기호화하기, 감상하기라는 세 가지 “작업”을 해야 하며 작가는 이러한 관객의 “작업”이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만 한다. 


이 글의 목적은 미술 작품의 의미가 관객과 작품 그리고 작가 사이의 밀고 당기는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어떻게 생산되는가 하는 것을 기호생산이론과 김용철의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는데 있다.


I. 기호생산의 삼중삼각형 모델

일반적인 기호 생산의 세 단계 과정은 삼중 삼각형 모델을 통해 보다 분명히 이해될 수 있다. [삼중삼각형 모델은 기호현상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무한성”과 그 삼자 관계를 강조하는 기호학자 퍼어스의 논의와 움베르토 에코의 기호학이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미술작품 역시 하나의 기호임에 분명함으로 우리는 미술작품이 생산되고 감상되는 과정 역시 동일한 형태의 삼중 삼각형 모델을 통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위 그림에 나타난 모델의 기본적 가정은 기호가 물질적 대상, 그 대상에 대한 인간 행위, 그리고 그 행위에 의한 생산물’이라는 세 가지 구성 요소의 ‘삼각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기호생산이론에 따르면, 모든 기호는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Eco, Umberto. A Theory of Semiotics.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76.]

사회적 의미와 물질성, 곧 물질과 의미의 결합이 기호이다. 그런데 여기서 물질이라 함은 지각의 대상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지각되지 않는 것--들리지 않는 소리나 가시광선을 벗어나는 빛 등--은 그 자체로서는 결코 기호가 될 수 없다. 왜 컴퓨터에는 반드시 모니터나 스피커가 달려 있는가? 디지털 정보 그 자체는 결코 지각될 수 없으며 따라서 기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디지털 정보는 반드시 모니터나 스피커를 통해서 인간의 몸에 의해 지각되어질 수 있는 가시광선이나 소리로 전환되어야만 한다.

이처럼 미술 작품을 포함한 모든 기호는 물질적 기초를 갖고 있다. 예컨대 유화는 캔버스와 물감으로 구성되어 있고 책에 쓰여진 글은 종이와 잉크로 이루어져 있으며 도로 표지판은 철판과 페인트로 되어 있다. 기호 생산의 출발점인 물질적 대상을 우리는 ‘기호 원료’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기호 생산은 물질적이며 외부적인 대상인 ‘기호 원료’에 인간의 행위가 가해지면서 시작한다. 이러한 행위가 ‘지각하기’이다.

여기서 굳이 ‘지각perception’보다도 ‘지각하기perceiving’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후자가 더 적절하게 역동적인 과정 중에 있는 인간의 행위를 표현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지각하기’라는 용어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그러나 서로 구별되는 두 가지 행위를 모두 지칭하고자 한다. 하나는 다른 이들을 위한 지각의 대상을 생산하는 것이고 (작가의 경우), 또 다른 하나는 이미 생산된 대상을 지각하는 것이다 (관객의 경우). 다른 이의 지각 대상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우선 그 대상을 반드시 지각해야하기 때문에 후자는 전자를 포괄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기호생산자는 기호를 생산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기호의 의미를 그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해석하기 마련이며, 작가는 자신이 생산하는 작품의 가장 첫 번째의 관객일 수밖에 없다.] 지각하기는 일종의 물질적 노동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지각하기와 물질적 노동 모두 다 (1) 인간이 자신의 몸으로 (2) 자연과 대면하여 (3) 무엇인가 생산해내는 행위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우리는 대상을 지각함으로써 지각편린, 즉 지각된 것percept을 생산해낸다. 따라서 기호생산의 첫 번째 삼자관계는 ‘물질(기호원료)--지각하기--지각편린’으로 이루어진다.

하나의 작품이 진정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려면 어떠한 형태로든 작가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 의해 지각되고 평가되어야만 한다. 즉 하나의 기호는 반드시 ‘사회적 지각편린’을 생산해낼 수 있어야만 한다. 주관적이고도 개별적인 지각편린은 ‘기호화하기signifying’ 라는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비로소 ‘기호’가 된다. 그리하여 기호현상의 두 번째 삼자관계는 ‘지각편린--기호화하기--기호’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기호는 ‘해석하기’에 의해 그 의미, 즉 ‘해석체interpretant’를 실현해 낸다. [“해석체”는 기호학자 퍼어스의 독창적인 개념인데, “기호가 인간의 정신에 대해 생산해내는 어떤 것”이라 할 수 있다. 해석체의 의미에 대해서는 『논리와 추리의 기호학』, 움베르토 에코 외 지음, (인간사랑, 1994), 45-47쪽 참조.] 따라서 기호현상의 세 번째 삼자관계는 ‘기호--해석하기--해석체’이다. 기호현상의 세 가지 삼자관계도 모두 상품생산의 경우처럼 ‘물질적 대상--인간의 행위--생산된 것’이라는 동일한 구조를 갖는다.

여기서 첫 번째, 두 번째 하는 것은 설명의 편의를 위한 구분일 따름이지 기호현상이 꼭 그러한 순서에 따라 차례차례 일어난다는 뜻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미술을 포함한 일반적인 기호 생산 과정은 오히려 세 번째 관계인 ‘기호--해석하기--해석체’부터 수행된다. 다른 사람들(관객)에 의해 어떻게 해석될 것인가 하는 것을 해석하는 과정을 거친 다음에, 기호화하기에 의해 기호로 생산될 수 있는 지각의 대상을 만드는 것이다. 강의실에서 칠판에 글을 쓰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친다. 선생이 어떤 단어를 써야 학생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나서, 그 단어를 어떤 크기와 형태로 써야 강의실에 있는 학생 모두가 읽을 수 있을까를 결정한 후, 실제로 손과 팔을 움직여서 글을 쓰는 경우, 기호생산은 세 번째, 두 번째, 첫 번째의 삼자관계를 각각 거쳐서 이루어진다.

교통 신호등을 예로 들자면, 빨간 불을 지각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에 해당하고, 그것을 신호등으로 파악하는 것이 두 번째 단계이며, 그것으로부터 ‘멈춤’이라는 의미를 알게되는 것이 세 번째 단계이다. 여기서 우리는 빨간 불을 보고 그것을 파란 불과 관련시켜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 그 사이의 일정한 인과 관계를 수립할 수도 있고, 또 빨간 불을 자신의 특정한 경험과 결부시켜 새로운 메타포를 창조할 수도 있다. 즉 자기 자신만의 개인적인 지각편린(경험)을 사회적인 지각편린으로, 즉 남을 위한 지각편린으로, 말하자면 교환 가능한 지각편린으로 재생산해내는 것이 곧 기호화하기이며, 문학이나 예술은 모두 본질적으로 이러한 기호화하기의 속성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기호화하기, 즉 “sign-ifying”은 무엇인가를 기호sign로 만들어내는 행위를 가리킨다. 언어라는 재료를 가지고 그것을 일상적 언어맥락과는 전혀 다른 기호체계에 편입시켜 새로운 기호로서 재생산하는 것이 문학이며, 마찬가지로 우리 주위에 있는 일정한 재료(매체)를 일정한 기호체계에 편입시켜 새로운 의미를 갖게 하는 행위가 곧 미술이다. 이러한 “기호화하기”야말로 렘브란트에서 뒤샹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미술창작행위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속성이다.


II. 미술 작품 생산의 삼중삼각형 모델과 현대 미술의 의의

이제 미술 작품 생산 과정을 위한 삼중삼각형 모델을 살펴보도록 하자. 일반적인 기호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미술 작품의 생산 역시 세 번째 단계부터 이루어진다. 작가는 어떤 형태와 색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석’되어 어떠한 의미 (미적 감흥)를 불러일으킬 것인지를 생각한 후, 그러한 의미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작품이어야 하는지를 결정하여, 그러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미술 원료를 구해다가 생산하는 것은 전형적인 작품활동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관객은 물론 첫 번째 단계부터 시작한다. 전시장을 찾아가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 관객은 일단 작품이라는 대상을 “지각”하여야만 한다. 그리하여 관객은 자신이 지각한 것(지각편린)을 하나의 작품으로 받아들여 기호화한다. (이때, 작품 이외의 것, 예컨대 마루바닥, 전시장의 천장이나 벽, 가구, 집기, 조명기구 등은 기호화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만 한다. 즉 작품이외의 것들은 비록 지각되기는 하지만 작품으로 기호화되지는 않는다.) 그 다음에 감상하기appreciating라는 행위가 뒤따르며, 그 결과 일정한 미적 감흥Aesthetic Satisfaction을 얻게 된다.

두번째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관객은 작품을 감상하기 전에 지각하기와 기호화하기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앞사람의 머리에 가려 작품이 안 보인다든지 (지각하기의 실패), 개념 미술적 작품의 하나로 전시된 의자를 작품으로 파악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거꾸로 작품이 아닌 전시장의 가구들이나 벽에 얼룩진 것들을 작품으로 받아들인다든지 하게되면 (기호화하기의 실패) 제대로 된 감상은 이루어질 수 없다.

현대 미술 이전의 시기에 관객과 작가 사이에는 지각하기와 기호화하기라는 행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자는 일종의 암묵적인 계약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뒤집어서 말하자면, 관객이 아무 불편 없이 작품을 지각하고 기호화할 수 있도록 작품을 만들어 주는 것이 작가의 의무로 간주되었다. 예컨대 회화의 경우는 일정한 프레임 안에 작품을 가두어 놓아 작품을 둘러싼 주의의 환경 (벽이나 가구 등)으로부터 작품을 뚜렷이 구별함으로써 관객들이 아무 불편 없이 쉽게 작품을 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호화할 수 있도록) 하였고, 조각 작품은 흔히 단상 위에 올려놓아 다른 물적 대상들과 뚜렷이 구별시킴으로써 작품임을 금방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시기의 관객의 능동적 역할은 감상하기 (기호생산의 세 번째 단계)에 한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현대 미술은 관객에 보다 많은 것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관객에게 감상하기(세 번째 단계)에 머물 것이 아니라 기호화하기의 과정 (두 번째 단계)에도 적극 참여해줄 것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니말리즘이나 슈퍼마티즘, 구성주의, 레디메이드, 개념미술, 옵틱 그리고 최근 실내외의 환경조각에 이르기까지 현대 미술의 여러 흐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이러 저러한 것이 예술작품이다”라는 기존의 고정관념에 끊임없이 도전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관객은 항상 새로운 것, 지금까지는 미술작품이라 여겨지지 않았던 것들을 기호화하여 작품으로 받아들일 것을 끊임없이 요구받고 있다. 예컨대 레디메이드 작품으로 전시된 변기는 그것을 일상생활 속에서의 변기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 즉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기호화할 것을 요구한다. 작가는 그것을 기호화할 수 있도록 하는데 최소한의 도움 (변기를 전시장에 옮겨 놓는 것)만을 관객에게 줄뿐이다. 이처럼 모더니즘 계열의 많은 작품들은 관객에게 감상하기뿐만 아니라 기호화하기라는 이중의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요구는 물론 관객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작품을 작품으로 뚜렷이 기호화해주지 않아도 관객들 스스로가 이를 작품으로 기호화할 능력이 있다는 신뢰가 있어야만 작가들은 관객에게 이러한 요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III. 지각하기: 관객에 대한 최대한의 요구와 신뢰

지금까지 대부분의 현대 미술은 관객에게 기호생산의 두 번째 단계인 기호화하기의 노력까지는 요구하였지만, 가장 기본적인 지각하기(첫 번째 단계)를 적극적으로 요구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서 쉽게 지각될 수 있는 것을 관객에게 제공하는 것은 작가의 기본적인 의무로 여겨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미국의 몇몇 작가들의 작품은 (의도하였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관객의 보다 적극적인 지각하기의 노력을 요구하고 있는 듯 하다.

예컨대 풍선껌을 약 6미터 가량 길게 늘여서 한쪽 끝은 천장에 붙이고 다른 한쪽은 바닥에 붙여둔 톰 프리드만의 작품(무제, 1995)을 보자. 천장과 바닥에 붙어있는 껌 덩어리는 겨우 보이지만 그 중간에 가느다란 실처럼 보이는 부분은 하도 얇아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단 감상하기와 기호화하기는커녕 첫 단계인 지각하기조차 쉽지 않은 그러한 작품이다. 관객은 이 작품의 감상과 기호화하기에 앞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일단 지각하기에 성공할 것을 요구받는다. 흔히 미니말리즘의 패러디로 일컬어지는 프리드만의 작고도 미세한 다른 작품들 (어린이용 장난감 찰흙인 “플레이-도”로 빚은 파리나 캡슐에 든 감기약 모형 등) 역시 너무 작고 섬세해서 관객의 적극적인 지각하기의 노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톰 프리드만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잡동사니를 이용해서 작품을 만드는 작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즉 그의 작품이 일정한 기호화하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로 논의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사실 그가 장난감 진흙으로 만든 검은 파리 한 마리는 하얀 석고의 모퉁이에 앉아 있어서 쉽게 “발견”된다. 다만 그것은 크기나 생김새가 너무도 진짜 파리 같아서 관객이 그것을 작품으로 기호화하기 어렵다는 정도이다. 이런 점에서 톰 프리드만은 관객의 지각하기에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있다고는 보기 힘들다. 지금은 환경조각작가로 더 잘 알려진 로버트 어윈Robert Irwin의 1970년대 작품들 (“표현할 수 없는 것the unrepresentable"의 표현을 시도했다고 일컬어지는) 또한 관객들 스스로 지각하기의 과정을 깨닫게 해주는 측면이 있으며, 로버트 라이만Robert Ryman의 백색 모노크롬 계열의 작품들도 관객의 보다 적극적인 지각하기를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들 역시 관객의 지각하기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생산된 것들이라 보기는 어렵다.

과문한 탓이겠으나, 필자가 아는한 지금까지 관객의 적극적인 지각하기의 노력을 의도적으로 요구하는 일련의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단 한 사람뿐이다. 그는 우리 나라의 젊은 작가인 김용철이다. 필자가 보기에 김용철은 기호생산의 첫 번째 단계인 지각하기의 과정을 화두로 삼아 관객에게 지각하기-기호화하기-감상하기의 세 단계의 “작업”을 동시에 요구하고 있는 유일한 작가이다. [김용철은 이미 국내외의 몇몇 평론가들로부터 그 가능성을 높게 평가받은 바 있는 30대의 젊은 작가이다. 김용철은 홍익대학교 조각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 가 펜실베니아대학 미술대학원에서 조각으로 MFA를 취득했으며, 그 후 영국문화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개념미술경향이 강한 런던 골드스미스 스쿨에서 인간의 욕망과 비물질화(Dematerialization)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닉 드빌과 크레이그 마틴에게서 사사하였다. 1992년이래 인데코와 갤러리 2000 등에서 6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특히 1993년에는 프랑스문화원 초청 특별 개인전을 가진바 있다.] <아트인 아메리카>의 칼럼니스트 일리노어 하트니Eleanor Hertney는 김용철을 톰 프리드만, 리차드 터틀, 아그네스 마틴 등과 유사하다고 평했지만, 김용철의 작품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관객의 지각하기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변신은 놀라운 데가 있다. 1994년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으로 유학 가기 이전의 김용철의 작품은 대부분 대리석과 청동, 석고, 철 용접 등을 이용한 대규모의 웅장한(?) 것들이었다. 특히 뛰어난 묘사력을 보여주는 커다란 소묘와 함께 제시되는 거친 석고와 철골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작품들이 이 시기 김용철 조각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 느낌은 한마디로 우렁차다. 크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자신의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웅변이다. 최근에 “속삭이는 듯 조용한” 작품들과 비교해 본다면, 이 시절의 김용철의 작품들은, 남대문 시장의 장사꾼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골라 골라”하면서 큰 소리로 자신을 팔려한다는 점에서, 독특하고 커다란 음성으로 주의를 끌려한다는 점에서, 그냥 지나치려는 손님(관객)을 현란한 몸짓(리듬 있는 박수와 발구름)으로 반강제로 끌어당기려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다시 말해서 이 시기의 김용철은 지각하기와 기호화하기는 전적으로 작가의 몫이라는 신념 아래 관객에게는 단지 “감상만 할 것”만을 요구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국과 영국에서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처음 갖는 올해의 일련의 개인전에서 김용철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그는 더 이상 큰 소리로 외치지 않는다. 오히려 들릴락 말락 하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아주 가냘픈 목소리로 속삭이기 때문에 관객은 스스로의 숨소리마저 죽이고 작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자발적으로 노력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김용철의 이번 작품들은 감상하기와 기호화하기뿐만 아니라 기호생산의 첫 단계인 지각하기의 과정에도 관객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피동적이며 내심 외면하고 싶어하는 관객을 막무가내로 붙들려 하거나 커다란 목소리로 작가의 주관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거창한” 현대 미술에 길들여진 요즈음의 관객들에게 김용철의 작품은 신선한 충격이다. 그의 작품들은 겨우 지각된다. “보일락 말락”하는 것들이다.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보이지 않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관객이 얼마만큼 자발적으로 지각하고자 노력하는데 달려 있다.



IV. 김용철의 작품: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실 김용철의 작품들에는 어떠한 제목도 없다. 단지 논의의 편의상 일정한 경향을 보여주는 그의 최근 작품들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 부르기로 하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지각의 현상학>의 저자 메를로 퐁티의 또 다른 책제목에서 따온 것임을 아울러 밝혀둔다.] 김용철 작품이 설치된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관객들은 우선 당황하게 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무언인가 새로운 것, 일상 생활에서 볼 수 없는 예술적인 어떤 것을 만나리라는 기대와 설렘은 허망하게 무너져 버리고 만다. 하지만, “이게 뭐야? 아무것도 없네... 뭐가 잘못 됐지?”라는 회의, 절망, 좌절, 실망이 바로 작가가 일차적으로 의도하는 바다. 이러한 의문과 당혹감을 관객 스스로가 극복하기를 김용철은 기대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작품은 관객에 대한 대단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관객 스스로가 자신의 좌절을 극복하고, 피동적인 자세에서 탈피하여 능동적으로 무엇인가 찾아 나서는 적극성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바로 그의 작업의 출발점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분명 무엇인가 있으리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좀 더 주의력을 집중시키는 관객에게 김용철의 작품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적극적인 지각하기의 노력을 기울이는 관객은 하얀 벽에 수직으로 꽂혀 있는 젓가락 크기 정도의 가냘픈 대나무 조각을 발견하게 된다. 좀 더 주위를 둘러본다면 그는 전시장 벽에 한 두 개씩 꽂혀 있는 얇은 대나무 젓가락(?)들을 몇 개 더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선은 대나무만이 보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춰서는 안된다. 보다 더 주의 깊은 관객이라면 그 가냘픈 대나무 끝에 하늘하늘 매달려 있는 자그마한 정육면체를 또한 발견할 수 있다. 투명한 낚싯줄을 꼬아서 만든 자그마한 이 입체는 공기의 흐름에 따라 항상 섬세하게 흔들리고 있다. 마치 풀잎 끝에 매달린 아침이슬처럼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애처로움마저 지니고 있다. 필자는 이 작품들을 감상, 아니 발견해내는 관객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다. 이 투명한 입체를 발견하는 순간 모든 관객들의 얼굴에는 항상 잔잔한 미소가 어리게 마련이다. 아마도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성취한 자의 만족스런 표정이며 또 무엇인가를 깨달은 자의 미소이기도 하리라.





김용철의 이 작품은 “지각이란 능동적 행위다”라는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Merleau-Ponty, M. Phenomenology of Perception. Trans. by Colin Smith.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62.]의 기본 명제를 직접 보여준다. 불란서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메를로 퐁티에 따르면, 커뮤니케이션이란 서로의 지각편린을 기호로서 생산해내고 이것을 교환함으로써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는 모든 예술작품이 생산-교환-소비되는 과정 역시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이라 보았다. 그런데 예술을 포함한 모든 커뮤니케이션의 출발점은 “지각하기”이다. 타인에 의해 지각될 어떤 것을 생산하는 것이 곧 기호의 생산이며, 그렇게 생산된 기호의 교환이 곧 커뮤니케이션 과정이며, 그렇게 교환된 기호를 지각하여 그 의미를 파악하는 하는 것인 곧 해석의 과정이다.

예술의 모든 재료 (매체)는 따라서 인간의 몸에 의해 지각될 수 있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예술의 가장 기본적 전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 바로 김용철의 작품들이다. 그는 처음부터 눈에 잘 안 띄는 재료로 무엇인가 기호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 이는 분명 예술과 커뮤니케이션 과정의 기본적 전제에 대한 도전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관객들은 김용철의 작품의 일부만을 보고 많은 부분을 그냥 지나치고 만다.

김용철의 다른 작품은 보다 쉽게 눈에 띈다. 그것은 커다란 검은 종이 한 장이다. 아니 한 장의 검은 종이처럼 보인다. 능동적으로 무엇인가 발견해보려는 관객은 그러나 검은 종이 위에 무언가 한 두개의 자국이 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자세히 보면 그것은 자그마한 정육면체의 기하학적 모양들이다. 검은 종이에 철필로 자국을 내어 논 것이다. 한 두 개의 정육면체를 발견한 관객이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탐구”를 계속한다면 그는 곧 검은 종이가 수만 개의 자그마한 정육면체들을 뒤덮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아무리 주의 깊은 관객이라도 그 수만 개의 정육면체를 모두 다 “지각”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해 보인다. 그보다 더 주의 깊은 관객라면 그 검은 종이가 원래부터 검은 것이 아니라 하얀 종이를 연필로 색칠한 것이라는 사실 또한 발견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연필로 커다란 하얀 종이를 가득 매웠다는 점에서 김용철의 “검은 종이”는 수 없이 반복되는 선 그리기를 보여주는 솔 르윗Sol LeWitt의 작품들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계속 반복되는 선 그리기를 통해 스스로 그린 선들을 모두 부정하고 결국에는 검은 종이 하나를 생산해고 있다는 점에서 김용철은 솔 르윗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메를로 퐁티는 인간이 사물을 지각한다는 것은 세계에 대해 능동적으로 “일”을 하여 무엇인가를 생산해내는 과정이라 보았다. 내가 지금 붉은 꽃을 보고 그것을 장미라 지각했다고 하자. 이때 나는 눈을 통해 받아들인 감각자료 (붉은 꽃)를 그저 단순히 피동적이고도 받아들여 자동적으로 “장미”라고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었던 모든 경험과 이 사회가 내게 주는 문화의 총체성에 기반하여 내 눈이 받아들인 감각자료에 능동적으로 일을 함으로써 “장미”라는 지각편린(percept)을 생산해내는 것이다.

김용철의 “검은 종이”는 관객의 지각하기가 작품에 대해 능동적으로 하는 “일”을 하여 일정한 지각편린을 생산해내는 과정이라는 메를로 퐁티의 명제를 그대로 체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관객들은 각기 얼마만큼 성공적으로 지각하기를 수행했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을 보게 된다. 어느 관객은 커다란 검은 종이만을 볼뿐이며, 다른 관객은 검은 종이 위의 이상한 자국 몇 개만을 볼뿐이고, 또 다른 관객은 검은 종이와 무수히 많은 정육면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가장 주의 깊은 관객 몇 몇은 검은 종이의 검은 색이 사실은 하얀 종이 위에 연필로 칠해진 것이라는 사실마저 발견해낼런지도 모른다.

관객이 얼마만큼 적극적으로 작품에 주의력을 기울이냐에 따라 각각의 관객들은 각기 서로 다른 것을 보게 된다. 즉 동일한 대상 (오브제)로부터 각기 다른 지각편린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관객들은 자신이 생산해 낸 지각편린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대상을 기호화하고 감상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즉 김용철의 작품은 관객의 참여의 정도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것이 되고 만다. 이런 점에서 김용철의 작품은 관객과 작품 사이의 상호작용에 기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감상을 위한 세 단계 기호생산의 모든 과정이 작품과 관객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작품의 상호작용성이 단지 컴퓨터나 비디오 등의 인위적인 전자 장치의 도움에 받은 작품(예컨대 게리 힐의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수상작 위더쉰Withershins 등)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의를 지닌다.

하얀 종이를 연필로 색칠하여 검은 종이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김용철의 작품은 노동 집약적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노동을 들여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상당히 노동비효율적이며, 비(非)자본주의 적이다. 생산되어 나오는 것들은 “미니멀”해보이지만, 그것을 위해 드는 시간과 노동은 “맥시멀”하다는 것이 그의 작업의 특징이다. 수천 장이 넘는 종이를 한 장 한 장 풀칠하여 붙여서 하나의 기둥처럼 쌓아 올라가는 작품에서도 이러한 “노동비효율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노동비효율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은 굵은 통나무의 한 쪽을 계속해서 얇게 깎아내어 실처럼 얇게 만들어낸 작품들이다. 직경 20 cm가 넘고 길이는 2미터 가량 되는 통나무나 두께 10cm 이상에 역시 길이 2미터 정도의 나무판의 한 쪽을 점차 얇게 깎아서 젓가락 굵기, 이쑤시개 굵기에서 마침내 머리카락처럼 얇아지는 작품들이다. 수 없이 많은 끌질과 칼질이 필요하지만, 단 한번의 실수로 얇은 부분을 부러뜨리기라도 한다면 다시 새 통나무와 마주 앉아 처음부터 작업을 다시 시작하여야 한다. 하얀 종이 위에 검은 연필로 색칠하기나 통나무 한쪽을 얇게 깎아나가기 등의 작업은 대단히 자기 부정적이며 역설적인 작업이다. 작업할수록 자신이 해 놓은 작업은 눈에 안 보이고, 작아지고, 나약해지고, 섬세해지고, 미세해진다. 장엄하고 웅장한 노력이 가냘프고 섬세한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작품을 마주하고 있자면, 우리의 시선은 자연히 가장 얇은 끝에 머물게 된다. 그 극단의 미세한 “머리카락 끝”같은 부분이야말로 김용철의 또 다른 형태의 속삭임이다. 하늘하늘 대는, 금방이라도 부러져버릴 것 같은, 점차 미세함의 극치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나무의 그 끝은 있음과 없음이, 물질과 비물질이, 노동과 정신이, (들뢰즈와 가따리가 말하는) “연속과 절단” [『앙띠 오이디푸스』, 쥘즈 들뢰즈와 펠릭스 가따리 지음, 최명관 옮김, 민음사, 1994.]이, (메를로 퐁티가 말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만나서 화해하는 접점인 것이다.



김용철의 작품의 또 하나의 특징은 처음부터 전시장 그 자체를 작품의 일부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는 관객에게 지각하기뿐만 아니라 많은 기호화하기의 노력도 요구하고 있다.) 지각이 곧 참여라는 것, 지각을 통해 인간은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나아가 세계의 일부가 된다는 메를로 퐁티의 철학을 우리는 김용철의 작품을 통해 어느 정도나마 직접 경험할 수 있다. 관객과 단순히 대면하기보다는 관객과 작품을 하나의 공간으로 묶어 내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김용철의 일련의 작품은 환경주의 조각과도 공통점을 지닌다. 하얗게 칠해진 4면의 벽과 천장, 그리고 바닥은 바로 작가와 관객이 교감을 이루는 육면체의 공간인데 이 육면체는 대나무 끝에 매달린 작고 투명한 정육면체에, 검은 종이 위에 흔적으로 남아있는 육면체에, 그리고 점차 녹아가면서 그 모습을 상실하는 거울 위의 바셀린 덩어리에 투영되어 있다.

필자는 대나무 끝에 매달린 이 투명한 입체를 바라보며 우리 어깨 위에 조용히 내려앉는 눈송이를 떠올렸다. 가볍고 섬세한 눈송이. 언뜻 보면 그저 하얀 덩어리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섬세하고 기하학적인 무늬를 간직하고 있는 눈송이. 후 불면 가볍게 날아가 버리든지 아니면 그 자리에서 투명하게 녹아 없어지는 눈송이. 그런데 김용철의 어떤 작품들은 실제로 녹아 없어진다. 형체를 만들어내기 대단히 어려운 바셀린 덩어리로 만들어진 기하학적인 형체들은 (역시 대부분 정육면체이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천천히 스스로 녹아 없어진다. 스스로를 파괴함으로써 비물질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김용철의 바셀린은 장 틴겔리Jean Tinguely의 작품 “뉴욕시에 경의를” 이나 “세상의 마지막에 관한 연구”와 같은 맥락에 서 있다. 그러나 김용철과 틴겔리의 근본적인 차이는 틴겔리의 작품들은 거대하게, 큰 소리를 내며, 와장창 무너져 내리거나 일순간에 폭발해버리는데 반해서, 김용철의 작품은 소리 없이,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녹아 내리듯 소멸된다는 점에서 다르다.

미니말리즘은 단순함을 통해서 많은 것을 말하려 했지만, 김용철의 작품들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하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하며, 비물질적인 것을 물질을 통해 나타내려 한다. 침묵을 이야기하려 한다. 아니, 침묵을 그저 중얼거리듯 속삭인다. 이러한 속삭임을 통해 김용철은 관객에게 감상하기와 기호화하기 뿐만아니라 지각하기라는 세 가지 “작업”을 모두 충실히 수행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김용철의 작품은 관객에게 새로운 (어쩌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고 나아가 관객-작품-작가의 관계를 새로 정립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최대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최소의 것을 얻으려는 역설적이고도 고통스런 작업을 이 젊은 작가가 얼마나 계속 감당해낼 수 있을지를 우리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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