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재적 질서와 내향적 펼쳐짐 (2/6)

Bohm's Implicate Order and Enfolding

by 김주환

내재적 질서와 외재적 질서

봄은 기계론적 관점에서 개별적인 사물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기본틀을 외재적 질서(explicate order)라 부른다. 외재적 질서에서 부분으로서의 사물들은 외적으로 전개되고 펼쳐저 나가는(unfolding) 것으로 간주된다. 한편 우주를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로 보는 전체성(wholeness) 관점에서는 개별적인 사물들이 외적인 상관관계를 갖는 것이라기보다는 내재적 질서(implicate order)를 갖고 있으며 사물들은 내향으로 전개되고 펼쳐져 들어가는(enfolding) 것으로 이해된다.

사물들이 마치 당구공처럼 독립적인 고유한 개별성을 유지하면서 전체를 구성하고, 서로 외적인 상호작용을 하는 것을 외재적 질서라 한다면, 사물들이 마치 끊임 생겨났다 사라지는 바다의 파도들 처럼 본질적으로는 거대한 바다의 일부로서 서로 내재적인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 곧 내재적 질서다. 당구공들은 당구대 위해서 외향적 펼쳐짐 (unfolding)을 하지만 파도들은 다시 바다로 펼쳐저 들어가는 내향적 펼쳐짐(enfolding)을 한다.

봄은 외재적 질서로도 어느 정도 이 우주의 작동 방식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당구공이나 로켓의 움직임을 고전물리학으로 예측하는 것 등) 이러한 경우는 어디까지나 본질적으로 내재적 질서인 우주의 특수한 상황에 불과하다고 본다. 외재적 질서는 내재적 질서에 대립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내재적 질서의 한 특수한 형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개별적인 사물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나 서로 구분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마치 물결이나 파도처럼 표면적인 것일 뿐 사실 우주는 하나의 전체다. 표면 아래에서 드러나지 않는 전체로서의 질서가 바로 내재적 질서고, 내재적 질서의 일부가 표면에 드러나는 것이 외재적 질서(explicate order)다. 기계론적 세계관이 세상의 본질적 모습이라 착각하는 것이 바로 이 외재적 질서인데 이는 사실 내재적 질서의 극히 일부이며 특수한 한 형태에 불과하다(Bohm, 2002). 마치 수면 위의 물결이라는 외재적 질서가 바다 전체라는 내재적 질서의 극히 일부인 것과 마찬가지다. 외재적 질서에서 사물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외향적 펼쳐짐인데, 이 역시 내재적 질서의 작동 방식인 내향적 펼쳐짐의 한 특수한 형태다.

끊임없이 내향 전개를 해 나가는 내재적 질서가 우주의 보편적인 모습이며 본래적 실체다. 외재적 질서 혹은 외향 전개는 특수한 추상화된 관점에서의 기술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쉬레딩거의 파동함수가 내재적 질서의 기술이며, 입자 간의 인과적 상호작용 등을 논의하는 것은 외재적 질서 차원에서의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통일장 이론은 어느 정도 내재적 질서와 전체성의 관점에 선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입자와 그것의 배경이 되는 공간과 에너지까지를 모두 우주에 연속적으로 분포된 하나의 덩어리(장)으로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력까지 포함된다면 그것이 곧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이 된다. 공간이라는 배경과 에너지나 입자라는 실체를 하나의 동일한 덩어리로 본다는 것은 파도 하나 하나를 독립된 입자로 보기 보다는 거대한 바다라는 배경(장)의 일부로 보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처럼 배경과 피규어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것이 전체성(wholeness)의 관점이다.

배경자아와 경험자아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두 개의 실체라기보다는 하나의 전체성을 지니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바다와도 같은 본래적 실체가 배경자아이며, 마치 물결처럼 특정한 맥락에서 일시적으로 드러나곤 하는 것이 경험자아다. 마음근력 향상을 위한 내면소통 훈련은 일상생활에서 늘 느껴지는 경험자아를 넘어 그 뒤에 배경처럼 존재하는 본래 모습으로서의 배경자아를 알아차리고 그것과 하나되기 위한 수행과정이라 할 수 있다.


뇌과학과 기계론적 세계관

기계론적인 관점에서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직교좌표계(cartesian coordinates)의 체계 속에서 이해한다. 17세기에 데카르트가 고안해낸 2차원의 직교좌표계는 우리의 기계론적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어린 시절 수학시간에 배웠던 x축과 y축 그래프가 바로 직교좌표계다. 이 "그래프"는 우리의 삶과 의식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주식시세 그래프나 주식 시세, 바이러스 신규확진자 추세, 특정 정당의 지지율 변화 등 여러가지 통계 자료나 온갖 트렌드 정보는 직교좌표계를 통해서 표현된다. 지구상 어디에 있든 나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정확하게 표시해내는 GPS(global positioning system) 네비게이션 시스템 역시 마찬가지다.

3차원의 직교좌표계는 우주의 객관적인 공간이라고 가정된다. 3차원 직교좌표계는 프리스턴의 뇌영상 통계분석 프로그램인 SPM의 기본적 세계관이기도 하다. 3차원의 직교좌표계로 표시되는 뇌 공간 속에서 복셀이라는 단위로 표시되는 작은 당구알과도 같은 알갱이들이 어떻게 활성화되거나 비활성화되는가 (산소농도가 일시적으로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분석하는 것이 곧 fMRI 분석이다. 활성화되는 복셀들의 위치가 뇌의 특정한 해부학적 부위에 해당하면 그 부위가 특정한 조건에서 활성화되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기계론적 세계관의 반영.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한가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보통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2mm 로 설정되는 fMRI 이미지에서의 복셀(voxel=볼륨+픽셀)이라는 것은 전체로서의 뇌를 인간이 자의적으로 나눈 것이라는 사실이다. MRI 기계가 2초에 한번씩 계속 뇌 전체를 스캔할 때 구분할 수 있는 최소 단위가 2mm 내외이기 때문에 그러한 크기의 복셀이 설정된 것 뿐이지 무슨 이론적이나 실체적인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뇌는 복셀이라는 단위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전체로서 하나인 뇌를 우리가 자의적으로 2mmx2mmx2mm 라는 자그마한 정육면체로 나누고 추상화하여 복셀이라는 개념으로 구분하는 것 뿐이다.

전체로서의 뇌가 구체적인 실체이며 부분으로서의 복셀은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그런데 복셀간의 상관관계나 기능적 연결성 등에 집중하다보면 어느새 복셀 (혹은 뇌의 특정한 부위. 혹은 연결망의 노드들)이 마치 고정된 실체인 것처럼, 마차 선험적으로 이미 주어진 것인양 착각하게 된다. 대부분의 현대 뇌연구들은 다양한 부위들 간의 연결성(상호작용성)을 중요한 분석대상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분명 외재적 질서의 관점에서 뇌를 바라보는 것이다. 기능적 실체로서의 뇌를 전체성(wholeness)을 지닌 커다란 바다와 같은 존재로 보고 복셀들을 물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자연과학은 물론 사회과학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전체로서 하나인 인간과 사회를 자의적으로 나누고 쪼갠 후에 그러한 부분들을 마치 본래적인 실체인양 다루고 있다. 원래 전체로서 하나인 부분들을 자의적으로 나누고 개념화한 후에 그들간의 상호관계와 인과관계를 밝히려 애쓰고 있는 것이 대부분의 사회과학들이 하고 있는 일이다. 그러다보면 부분들이 마치 선험적으로 주어진 본래적 실체인양 착각하게 된다.

직교좌표계와 미적분(해석학)을 창안해낸 데카르트는 기계론적 세계관의 창립자라 할만하다. 그는 "나는 인식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는 명제를 통해서 인간의 본성이 인식하는 주체에 있다고 보았다. ("cogito"는 "인식한다"는 뜻의 동사 "cogitare"의 1인칭이다. 이것은 "I think" 보다는 "I recognize"로 번역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하고, 우리말로는 "나는 생각한다" 보다는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나는 인식한다"로 번역하는 것이 좀 더 타당할 듯 하다.) 17세기에 등장한 데카르트의 이 명제를 통해서 이 우주는 인식대상으로서의 사물과 인식주체로서의 인간의 정신으로 뚜렷하게 나뉘어지게 되었다. 주관과 객관의 구분이 명확하게 갈리기 시작했고, 인간만이 인식 주체이고 다른 모든 우주와 자연은 인간의 인식대상이 된다. 이로부터 과학주의가 탄생한다. 인간은 모든 대상에 대해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기술할 수 있게 된다. 인간 이외에는 세상 만물에는 어떠한 정신이나 의식이나 마인드도 없게 된다. 수천년동안 인류가 지니고 있던 영혼을 지닌 세계 (animated world)가 갑자기 사라지고 영혼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있는 것으로 되어 버렸다. 인류는 영혼이 자연물에도 있고 태양이나 달에도 있다고 믿어 왔다. 데카르트에 의해 이것들은 한낱 사물들이 되어 버렸다. 동물들도 움직이는 기계이지 영혼을 지닌 존재는 아니다. 여기서 자연물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인간중심주의가 탄생한다. 또한 인간의 몸 역시 사물의 일부다. 인간의 본성은 몸이 아니라 정신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데카르트 철학의 필연적 결과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존재가 있는데 하나는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사물로서의 연장체(res extensa)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정신인 인식주체로서의 인식체(res cogitans)다. 인간의 몸은 연장체의 일부인 것이다.

데카르트에 의해 확립된 기계론적 세계관은 보편적이고도 당연한 세계관이라기보다는 17세기에 등장했다가 20세기 들어서 과학의 급속한 발전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는 세계관이다. 기계론적 세계관은 우선 현대 물리학에 의해서 폐기되었다. 직교좌표계는 아인쉬타인의 새로운 공간 개념으로 대체되었고 양자역학에서 직교좌표계는 별 유용성이 없다. 몸과 마음의 이원론은 바렐라 등의 생물학자, 메를로뽕티 등의 철학자, 다마지오나 프리스턴 등 많은 뇌과학자에 의해서 완전히 폐기처분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21세기에 들어서도 일반 대중들은 여전히 데카르트적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만이 상식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가장 큰 이유는 의무 교육의 교과 과정이 대부분 기계론적 세계관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는 바뀔 때가 되었다.


전체적 움직임 (holomovement)과 유기론적 세계관

봄은 안으로 향하는 내향적 펼쳐짐(enfoldment)와 바깥으로 향하는 외향적 펼쳐짐(unfoldment)의 총합을 "전체적 움직임(holomovement)"이라 개념화한다(Bohm, 2005, p.12) 인폴딩 되었다가 언폴딩 되는 움직임의 총합이 곧 근본적인 실체(primary reality)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인간이 인식하는 사물, 대상, 형태, 입자 등등은 이러한 전체적 움직임의 결과에 따라 떠오르는 부차적(secondary)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Bohm, 2005, p.12). 어떤 물질적 실체나 독립적인 입자로 드러나는 모든 것의 본질은 사실 끊임없이 흘러가는 전체적 움직임이다. 이러한 "흐름"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일 때에는 미립자나 사물 등 고정된 실체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하지만 이것은 마치 소용돌이(vortex)가 하나의 고정된 "실체"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의 본질은 유체의 흐름인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로돌포 지나스의 "소용돌이로서의 나(I of the vortex)"의 개념은 의미심장하다(Llinás, 2002). 자의식은 일종의 소용돌이와도 같은 것이다. 마치 하나의 독립적인 실체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소용돌이의 본질은 내향적으로 끊임없이 펼쳐지는 내재적 질서인 것이다. 인간의 자의식도 하나의 고정된 실체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끊임없이 내향적 펼쳐지는 내재적 질서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별도 그렇고 미립자도 그렇다 이 세상 모든 존재가 그렇다.

우주의 기본질서는 내적인 펼쳐짐이며 이를 봄은 내재적 질서(implicate order)라 부른다. "implicate"는 라틴어에 뿌리를 둔 말로, 안으로 접혀 들어간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 속으로 접혀 들어간다. 전 우주가 하나의 부분 속으로 접혀져 들어가며, 다시 하나의 부분이 전 우주로 접혀져 들어가면서 펼쳐진다. 서로에게 외적인 사물로 구성된 것처럼 보이는 세계는 이러한 깊은 내재적 질서로 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서로 외적인 관계를 지난 독자적인 사물로 된 세계는 외향적 펼쳐짐을 하는 세계이며 이를 외재적 질서(explicate order)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외재적 질서는 본질적으로 내재적 질서인 전체적 움직임의 특수한 혹은 일시적인 맥락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전자는 특정한 위치에서 백그라운드로부터 외향적 펼쳐짐을 통해 나타났다가 다시 내향적 펼쳐짐을 통해 배경으로 들어갔다가 또 다시 근처 다른 곳으로 펼쳐져 나왔다가 다시 배경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한다. 이 때 미립자라는 드러나는 존재에만 촛점을 맞추고, 그 미립자를 하나의 독립적인 실체로 바라보게 되면 마치 하나의 전자가 궤도를 따라 돌다가 중간 이동 없이 그냥 다른 궤도로 마술처럼 건너 뛰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전자의 불연속성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체가 아닌 미립자에 불과한 전자도 내향적-외향적 펼쳐짐의 반복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재생산 또는 자가복제를 한다고도 보아야 한다 (Bohm, 2005, p.15). 이것이 기계론적 세계관에 대비되는 유기론적 세계관이다.

유기론적 세계관은 우주를 커다란 한 덩어리로서의 전체로 파악한다. 인간의 감각기관으로는 도저히 인식할 수 없는 암흑물질이나 암흑에너지를 포함한 전체다. 밤하늘에 보이는 수많은 별들이나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사물들은 우주라는 커다란 에너지 덩어리에 군데 군데 생겨난 예외적인 구멍에 불과할 수도 있다. 우리 인식할 수 있는 모든 대상들은 피규어에 불과하고 그것을 존재하게끔 하는 전체적인 백그라운드가 존재한다. 마치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수면 위의 물결들뿐이지만 그 이면에는 거대한 바다가 존재하는 것과도 같다. 우주 만물은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들의 총합이 아니다. 인간이 인식하는 부분으로서의 실체들은 인간이 자의적으로 분류하고 개념화하여 추상화시켜 놓은 것들에 불과하다. 나아가 이러한 부분으로서의 실체들은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서로 외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체를 이루는 부분이기 때문에 상관관계나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태양이라는 하나의 실체가 지구라는 실체를 중력으로 끌어당기며 상호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태양이나 지구 모두 다 거대한 전체로서의 우주라는 바다 표면 위에 드러난 작은 파도들에 불과한 것이다. 파도가 하나 일면 그 옆에 또 다른 물결도 생겨나고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물결과 물결간에 상호작용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 물결들이 모두 전체로서의 바다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봄이 제시하는 전체성과 내재적 질서는 기계론적 세계관에 푹 젖어있는 사람들에게는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들이다. 봄은 유체역학의 테일러-쿠에트 실험을 통해서 내재적 질서의 개념을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아래 그림1처럼 투명한 큰 실린더 안에 작은 실린더를 넣은 후에 작은 실린더가 큰 실린더 안에서 회전할 수 있도록 한다. 작은 실린더와 큰 실린더 사이에 점성이 높고 투명한 액체를 가득채운다. 글린셀린도 좋고 콘시럽도 좋다. 이것이 테일러-쿠에트 장치다. 그림1에서 파란색으로 보이는 두 실린더 사이의 빈 공간을 점성이 높은 투명한 액체를 가득 채우는 것이다.

이제 스포이드로 잉크 한 방울을 투명한 액체 속에 넣는다. 잉크는 투명한 액체 속에서 섞이지 않은채 마치 하나의 알갱이처럼 떠 있게 된다. 이제 서서히 큰 실린더를 한쪽 방향으로 회전시킨다. 그러면 큰실린더 표면에 가까운 액체는 실린더를 따라 많이 움직이고 작은 실린더에 가까울수록 액체는 덜 움직이게 된다. 계속 돌리면 잉크는 점점 옆으로 퍼지게 된다. 대여섯바퀴 돌리면 완전히 퍼진다. 눈에 안보이게 된다. 잉크가 사라진 것이다. 하나의 알갱이처럼 보이던 잉크방울이 사라졌다! 이제 실린더를 반대 방향으로 서서히 돌리면 잉크 방울은 원래 자리로 돌아온다. 마치 투명한 액체에서 마술처럼 입자가 다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Fonda & Sreenivasan, 2017). 유체역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쿠에트 흐름이라고 한다. 이는 중심을 공유하는 두 실린더 사이 공간에 점성이 높은 액체를 채우고 안쪽 실린더를 회전시킬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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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출처: https://mathematica.stackexchange.com/questions/199375/plot-taylor-couette-flow-ilustratation-plot


이제 그림2에서처럼 빨간색, 녹색, 파란색 잉크 각각 한방울씩 넣고 돌려보자. 독립된 알갱이처럼 보이던 잉크 방울들은 완전히 섞이게 된다. 입자가 마치 에너지처럼 공간에 퍼져버린다. 그러다가 반대방향으로 돌리면 다시 독립적인 잉크방울로 되돌아오게 된다.

만약 엄청나게 거대한 실린더에 점성이 높은 투명한 액체를 가득 채우고 수많은 잉크 방울을 넣고 돌리면 어떻게 될까? 처음에 몇 방울 넣고 한바퀴 돌리고 다시 또 몇 방울 넣고 한바퀴 더 돌리고 하게된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이렇게 n번을 회전시켰다면 어떤 잉크 방울은 n번, 어떤 것은 n+1번, n+2번….하는 식으로 각기 다른 퍼짐 상태가 된다. 그리고 나서 다시 반대방향으로 돌렸다 또 방향을 바꿔 돌렸다 한다면? 수많은 잉크 방울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기계론적 관점은 이러한 잉크 방울들을 하나의 실체 혹은 "입자"라고 보는 것이다. 잉크방울 입자들을 각기 독립적인 실체로 보고 그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분석해보면 분명히 일정한 상관관계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1번 입자가 나온 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2번 입자가 나타난다든지, 혹은 3번 입자가 나타날 때마다 항상 4번, 5번 입자는 사라진다든지, 혹은 6번 입자와 7번 입자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동시에 나타난다든지 하는 다양한 관계가 관측될 것이다. 마치 입자들은 서로 상호작용하며 영향을 주고 받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중첩이든 얽힘이든 불연속성이든 무엇이라고 부르던 간에 아무튼 입자들 사이에는 다양한 관계가 관측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러한 입자들 모두 서로 투명한 액체에 의해 연결되어 있는 것뿐이다. 전체로서의 실린더 안에 존재하는 잉크방울들인 것이다. 전체로서의 투명한 액체는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관찰되는 것은 잉크방울 뿐이다. 마치 관찰되는 것이 미립자나 전자일 뿐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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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출처:

https://physics.stackexchange.com/questions/206579/what-happened-here-in-this-taylor-couette-flow-experiment/206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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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장면 캡처. 출처: Taylor-Couette Flow https://youtu.be/57IMufyoCnQ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우주 전체를 한 덩어리로 연결시키고 있는 보이는 않는 차원의 투명한 액체를 봄은 "감추어진 변인(hidden variables)"이라고 이론화했다. 1952년 젊은 시절의 봄이 브라질로 정치적 망명을 가 있던 시기였다. 봄은 기존의 양자물리학 이론을 완전히 뒤집어 엎는 자신의 논문이 물리학계에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키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논문에 대해서는 출간 이후 아무도 논박도 하지 않았고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 기존의 권위있는 물리학자들은 이 논문이 출간되자 내심 당황했다. 특히 봄의 지도교수였던 오펜하이머는 동료 물리학자들에게 "우리는 이 논문을 논박하든지 아니면 (논박이 어렵다면) 그냥 무시해야한다"고 했다고 전해진다. 어쨌든 아무도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고 결국 이 논문은 묻혀버렸다 (Peat, 1997).

잉크 방울이 투명한 액체로 속으로 펼쳐지는 것이 곧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내향적 펼쳐짐을 하는 내재적 질서라 할 수 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입자나 사물들은 전체로서의 우주라는 커다란 실린더 속의 잉크 방울들과도 같은 것이고, 거대한 바다 위에 떠오르는 물결들과도 같은 것이다. 잉크 방울이나 물결을 하나의 독립적인 실체로 간주하고 그들 사이의 외재적 질서(잉크 방울이나 물결의 탄생과 소멸, 인과관계, 상호작용 패턴) 등도 얼마든지 계산할 수 있고 모델링할 수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틀린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일상생활의 일정한 한도 내에서는 그렇게 기계론적으로 보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합리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주의 본질적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문제다. 봄은 이러한 외재적 질서는 전체로서의 내재적 질서의 일부 현상을 특수한 방식으로 추상화하고 인간적인 관점에서 개념화한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외재적 질서는 내재적 질서의 특수한 한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이 실험이 의미하는 바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우주는 커다한 전체로서의 하나의 투명한 젤리 덩어리이고 인간이 경험하는 입자나 사물들은 그 젤리 속에 묻어있는 티끌이나 혹은 작은 흠집과도 같다는 것이다. 티끌들의 움직임 혹은 상호작용은 전체로서의 젤리 움직임을 반영하는 것 뿐이다. 이러한 사물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외적으로 상호작용하고 펼쳐진다기 보다는 전체로서의 우주는 항상 그 자신 안으로 펼쳐져들어간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게 안으로 펼쳐지는 과정 속에서 드러난 극히 일부 현상에 대해 기계론적 관점에서 관찰하고 설명해내는 것이 지금까지의 고전 물리학이 해 온 일들이다.

외재적 질서는 내재적 질서의 반대 개념이 아니다. 외재적 질서는 내재적 질서의 한 특수한 형태에 불과하다. 내재적 질서로서의 우주를 인간이 자의적으로 추상화시키고, 개별적 단위들로 나눠서 그것들을 외적인 원인과 결과 간의 관계로 파악하려는 인간의 개념화가 만들어낸 것이 외재적 질서다. 따라서 내재적 질서는 외재적 질서처럼 보이는 것들의 본질적인 모습이고, 외재적 질서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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