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hm's Implicate Order and Enfolding
마음과 물질의 문제
봄은 마음과 물질이 둘 다 본질적으로 내재적 질서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본다. 상대적으로 독립적이고 구별되는 사물들이나 실체 형태 등의 외재적 질서는 내재적 질서로부터 외향적으로 펼쳐져 나오는 것이다. 마음과 물질은 서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공통된 바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은 서로 섞여서 짜여진 (interweave) 것이다. 둘 다 내재적 질서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마음과 물질의 이원론에 빠지지 않으면서 둘의 차이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Bohm, 2005, p.19).
기계론적 세계관을 정립한 대표적인 철학자인 데카르는 물질과 정신을 철저하게 구별했다. 그는 물질을 연장체(res extensa)라 개념화했다. 모든 사물은 공간을 일정한 형태로 점유한다는 뜻이다. 한편 물질을 인식하는 정신은 전혀 다른 존재인데 데카르는 이를 인식체(res cogitans)라 불렀다. 연장체가 물질이고 인식체가 마음이다. 데카르트가 곧 직면하게 된 문제는 인식체가 과연 어떻게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인 연장체를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어쩔 수 없이 신(God)을 끌어들인다. 신은 연장체와 인식체를 모두 창조한 창조주이므로 오직 신만이 둘 사이의 연관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신으로서의 인간이 물질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신이라는 존재 덕분이고, 나아가 인간이 이 세상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강력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은 관찰자와 관찰 대상의 이원론을 가져올 수 밖에 없는 데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우리가 우주의 전체성을 논한다 하더라도, 우주를 하나의 전체라고 본다하더라도, 관찰자와 관찰대상을 구분하는 한, 관찰자는 그 전체성으로부터 벗어나 있을 수 밖에 없다. 우주를 하나의 전체라고 바라보는 관찰자는 그 우주의 일부가 아닌 것이다. 또 관찰자가 많이 있을 수 밖에 없는데, 각각의 관찰자는 모두 다 다른 관찰자에게 관찰대상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문제도 발생한다. 더군다나 데카르트의 논리를 따르자면 우리는 신의 존재를 깨닫고, 신의 뜻을 이해하고, 신의 존재를 믿어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신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이 인식 대상이 되는 순간, 데카르트의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통합의 근거로서의 신의 존재는 설자리를 잃게 된다.
봄에 따르면 물질-정신의 이원론의 문제는 내재적 질서의 관점으로 간단히 해결될 수 있다. 내재적 질서의 관점에 따르자면 물질과 정신은 원래 전체로서 하나인 실체(one reality)의 두 가지 측면에 불과한 것이다. 내재적 질서가 직접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영역이 바로 의식(consciousness)이다. (Bohm, 2005, p. 21). 각 인간의 의식은 전체로서의 존재가 내향적으로 펼쳐진다. 각 개인은 내재적 질서의 일부로서 우주 전체와 다른 인간들 전체와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소마-시그니피컨스 (Soma-Significance)
물질(matter)과 정신(mind)가 결국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 봄은 소마-시그니피컨스 (soma-significance)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한다. 소마는 그리스어로 몸이라는 뜻이다. 소마-시그니피컨스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통합성을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나타내는 말이다 (Bohm, 2005, p. 72). 굳이 이렇게 새로운 용어를 도입하는 이유는 "정신과 물질"이라고 표현하면 정신, 마음, 물질, 사물 등의 용어에는 이 둘의 차이를 대비하는 이분법적인 개념이 너무나도 깊게 뿌리박혀 있어서 통합성의 관점을 위한 논의를 진전시키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 이래 지난 수백년간 물질과 정신은 완전히 구분되는 별개의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자리잡고 있기에 "물질"과 "정신"이라는 용어 대신에 새로운 개념을 도입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소마-시그니피컨스"라는 개념은 결국 물질과 정신을 하나로 보는 통합적인 관점을 전개하기 위한 개념적인 틀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봄의 개념인 "soma-significance"를 번역하지 않고 그냥 "소마-시그니피컨스"로 표기하는 이유는 자칫 "몸 - 의미" 등으로 번역하다가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소마"는 물질적이고도 육체적인 몸(physical body)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주관성과 객관성이 통합된 존재로서의 몸을 의미한다. 물질과 정신의 통합성을 강조하려는 봄의 입장에서는 "body"보다는 "soma"를 선택하는 것이 올바든 전략이라 생각된다. 다만 우리말로는 "body"나 "soma"는 모두 "몸"으로 번역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 그냥 "소마"라고 표기하는 것이다. "significance"도 마찬가지다. "significance"를 여기서 굳이 번역하자면 "의미"라 해야한다. 그러나 곧 이어서 봄은 "soam-significance"의 관계를 "matter-meaning"의 관계와 비교해가면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significance"도 "의미"라 번역하고 "meaning"도 의미라 번역한다면 독자들은 봄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meaning"을 "의미"라 번역한다면 "significance"에 대해서는 다른 적절한 용어를 찾아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사실 "significance"는 기호 "sign"에서 온 말이다. 기호의 기호작용의 결과로서 생겨나는 의미가 곧 "signficance"다. 기호는 물질과 의미의 결합체다. "soma"라는 말 속에 이미 주관성과 객관성의 통합의 뉘앙스가 담겨있는 것처럼 "significance"라는 말 속에도 이미 물질과 의미의 통합의 뉘앙스가 담겨있는 것이다. 봄은 소마-시그니피컨스가 물질적인 것에서부터 정신적인 것으로 내향적 펼쳐짐을 의미한다면 그와 반대로 정신적인 것으로부터 물질적인 것으로의 외적인 펼쳐짐은 "기호-소마(signa-somatic)"라 하고 있다. "signa"는 기호(sign)라는 말의 라틴어다. 이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soma-significance"에서의 "significance"는 기호에 관한 어떤 것 혹은 "기호작용으로서의 의미"를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soma-significance"를 그냥 "소마-기호" 혹은 "소마-기호의미"라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만족스러운 번역이라할 수는 없다. 오히려 독자들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냥 "소마-시그니피컨스"라고 표기하는 것이 봄의 논지를 가장 정확하게 잘 전달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소마-시그니피컨스의 개념이 함축하는 것은 소마(물질적인 것)와 그것의 의미(정신적인 것)는 어떠한 면에서도 분리된 별개의 존재가 아니며 이 둘은 하나의 사실(realtiy)의 두 측면이라는 점이다(Bohm, 2005, p. 73). 말하자면 이것은 전체로서의 실체가 드러나는 (외적으로 펼쳐지는) 두 형태인데, 인간 몸의 감각 작용에 의해 지각(preception)된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물질이고, 인간의 의식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의미다. 이 둘은 서로를 내포하고 있다. 모든 물질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모든 의미는 결국 특정한 사물이나 대상에 관한 것이다. 본질적으로 같은 물질과 의미가 구분되는 것은 인간의 몸과 의식에 의해서다.
봄은 소마-시그니피컨스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그 반대인 기호-소마(signa-somatic) 관계도 중요하다고 본다. (Bohm, 2005, p. 76). 봄의 아래 도식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소마-시그니피컨스의 관계는 여러 층위(level)에서 작동한다. 이는 마치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프리스턴의 심층 능동적 추론 시스템에서 상향하는 감각정보와 하향하는 예측 오류 시스템이 위계적인 구조를 보이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Ramstead, Badcock & Friston, 2018). 몸이 받아들이는 감각정보가 상향으로 올라가는 바텀-업의 과정은 소마-시그니피컨스라 할 수 있고, 생성 모델에서 비롯하는 예측오류가 하향으로 내려오는 탑-다운의 과정은 기호-소마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개념적 유사성은 프리스턴의 자유에너지 원칙과 능동적 추론의 모델이 봄의 내향적 펼쳐짐과 내재적 질서의 개념을 통해 새롭게 재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현재 프리스턴의 능동적 추론 모델이나 마코프 블랭킷 등의 개념은 봄의 관점에서 보자면 여전히 기계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예측오류의 업데이트 과정이나 생성모델의 작동 등을 내면적 펼쳐짐으로 재해석 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림 출처. (Bohm, 2005, p. 78)
기호로 가득 찬 우주
봄의 소마-시그니피컨스는 기호학(semiotics)에서의 기호(sign)의 개념과 매우 비슷하다. 기호는 물질과 의미의 결합으로 정의된다. 기호는 의미를 실어나르는 물질이며 동시에 물질화된 의미다. 봄은 소마-시그니피컨스 관계의 사례로 드는 것은 종이 위의 인쇄된 잉크 자국이 독자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경우나, 텔레비전 화면에 나타나는 화소들이 시청자들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경우 등이다. 이것은 모두 기호현상이다. 봄은 비록 "기호"라는 용어는 직접적으로 사용하지는 않고 있지만, 그의 소마-시그니피컨스의 관련성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면 결국 우주의 모든 것을 기호현상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봄의 이러한 관점은 퍼스와 매우 비슷하다. 퍼스 역시 우주가 물질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물질과 의미로 이루어져있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이 우주는 기호로 가득 차있다 (perfused with signs)라고 본것이다.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결국 이 우주 전체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주 전체는, 단지 물질적 존재들의 집합으로서의 우주뿐만아니라 물질적 존재의 우주를 포함해서 우리가 흔히 "진리"라고 부르는 모든 비물질적 존재까지를 다 아우르는 전체로서의 이 우주는, 전적으로 기호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기호로 가득 차 있다" (CP. 5.448).
봄의 소마(물질)와 시그니피컨스(의미) 간의 관계는 소쉬르의 기의와 기표 간의 관계와 매우 비슷하다. 기표는 의미를 실어나르는 기호의 물질적 측면이며, 기의는 기표라는 물질을 통해서 드러나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얼핏보면 소마-시그니피컨스의 관계는 소쉬르의 기의-기표 개념과 마찬가지로 2자적 관계처럼 보인다. 그러나 봄은 소마와 시그니피컨스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소마, 기호, 에너지라는 세 요소가 삼자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소마와 기호간의 관계는 물질과 의미와의 관계에 적용될 수 있다. 물질과 의미는 서로 내향적으로 펼쳐져 들어가고 또 외향적으로 펼쳐져 나오는데 이 때 에너지가 늘 관여한다. 물질과 에너지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고 그것을 연결시켜주는 것이 의미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공간의 물리학적 의미에 대해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질을 하나의 고정된 실체로 보는 기계론적 세계관에서는 시공간은 절대적인 것이고, 변하지 않는 것이며, 물질과는 상관 없이 이미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본다. 이것이 17세기 이래 데카르트, 칸트, 뉴튼을 거쳐서 우리의 상식이 되어버린 "시공간의 절대성"이다. 시공간의 절대성은 이미 수백년이 되어버린 낡은 개념이고, 아인쉬타인이 이미 100 여년전에 상대성 이론을 통해 폐기처분한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이 확고불변한 세계관으로 깊게 뿌리 박혀 있다.
시공간은 절대적인 것도 아니고 에너지와 물질에 의해서 생성되고 변화되는 것이다. 시공간이 물질의 전제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에너지와 물질이 시공간의 전제조건이다. 이것이 물리학적 사실이다. 상대성 이론의 핵심은 시공간의 절대성을 폐기하는 것이다. 기계론적 세계관의 뉴튼 물리학과 아인쉬타인 물리학의 결정적 차이가 바로 시공간의 절대성이다.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시공간은 중력 등의 에너지에 의해서 얼마든지 생성 변형되는 일종의 에너지 장어서 절대적인 기준은 될 수 없다. 우주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시간도 공간도 아니고 오직 빛의 속도뿐이다.
상대성이론에서 빛은 절대적 속도를 갖는다. 움직이는 두 물체 사이의 속도는 상대적이다. 시속 100km로 달려가는 차를 내가 시속 99km로 따라간다면 내 앞차는 겨우 시속 1km의 속도로 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시속 100km로 달리는데 반대편 차선을 달려오는 차가 마찬가지 속도로 달려온다면, 그차는 내 차 옆을 시속 200km로 지나가게 된다. 이처럼 속도는 상대적이다. 그러나 빛의 속도는 그렇지 않다. 내가 뒤들 따라가던 아니면 정면으로 마주 향해 가던 빛의 속도는 변하지 않는다. 내 우주선이 아무리 빨리 빛을 쫓아가도 빛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이것이 상대성 이론이다.
시간과 거리는 속도에 대해 상대적이다. 만약 내 우주선의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면 나의 시간은 더 점점 느려진다. 내 우주선 안에서의 1시간이 내 우주선의 바깥 세상에서는 백만년이 될 수도 있다. 속도가 빛에 무한히 가까워진다면 시간은 무한히 느려진다. 빛의 가까운 속도로 날아간다면 나는 순식간에 우주 어느 곳이든 갈 수 있게 된다. 지구로부터 250만 광년이 떨어진 안드로메다 은하로 빛에 가까운 속도로 날아간다고 가정하자. 내 우주선 밖에서 보면 나의 우주선은 250만년 동안 날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일 테지만, 우주선 안에서의 내 시계로는 단 1초가 지났을 수도 있다. 좀 더 속도를 올린다면 나는 단 1초만에 130억광년 떨어진 우주의 끝까지도 날아갈 수 있다. 따라서 공간도 상대적인 것이 된다. 순식간에 어디든 갈 수 있는 나에게는 공간이란 무의미한 것이 된다. 빛의 속도에 가깝게 이동할 수만 있다면 나는 우주의 모든 곳에 어디든 거의 동시에 다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나의 위치를 특정짓는 것도 무의미하고 따라서 나에게 공간이란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내 우주선이 빛과 비슷한 속도로 날아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우주에는 빛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이는 것들이 있다. 전자와 같은 미립자들이다. 전자는 빛처럼 한 방향으로 쭉 가는 것이 아니라 반사되어 앞뒤로 움직인다. 이러한 좌충우돌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내며 에너지를 물질 상태로 바꾼다. 물질은 에너지가 응축된 것이다. 이러한 에너지의 응축이 곧 장(field)이론에서 말하는 들뜸(excited)상태다. 좌충우돌의 상태가 멈추면 다시 에너지로 돌아간다. 우주의 모든 물질의 기본 상태는 에너지다. 전자의 좌충우돌 상태가 일정한 패턴을 갖게 되면 물질이 탄생한다(Bohm, 2005, p123). 이처럼 물질과 에너지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에너지의 응축이 곧 물질이 되고 시간과 공간을 탄생시킨다. 따라서 순수한 에너지에게는 시간도 공간도 없다(Bohm, 2005, p124).
사람의 몸 역시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도 에너지로 이루어진 존재다.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인 부분도 에너지고 생명 현상 자체도 에너지의 작용이다. 의식도 마찬가지다. 의식은 물질이 아닌 순수한 에너지다. 따라서 의식에게는 시간도 공간도 없다. 시간과 공간을 의식이 만들어내는 것이지 의식이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 구속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의 의식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그것이 의식의 기본적인 특성이다. 의식은 우주 전체에 편재할 수 있다. 순수한 의식은 곧 순수한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의식은 에너지의 흐름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이 곧 의미다. 의미의 생성이 곧 내면소통이므로 내면소통 역시 에너지의 흐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