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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환 Apr 14. 2021

자유에너지 원칙과
마코프 블랭킷 모델 (2/4)

능동적 추론 과정으로서의 내면소통

마코프 블랭킷의 네가지 상태와 내면소통 

마코프 블랭킷의 외부상태, 내부상태, 행위상태, 감각상태의 상호 작용 방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내면소통의 개념화에 큰 도움을 준다. 우선 외부상태는 마코프 블랭킷 바깥에 있는 것( X1, X4, X10, X11)으로 생명체가 몸 담고 살아가는 환경이나 세상이다. 내부상태는 안에 있는 것(X6)으로 능동적 추론을 담당하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마코프 블랭킷 중에서 행위(active)상태는 내부 상태로부터 영향을 받아 외부상태에 영향을 주는 것( X8, X9)으로 근육을 움직이고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 예다. 

나머지가 감각상태인데 감각상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내부상태에 영향을 주는 것(X2, X3)과 내부상태를 거치지 않고 바로 행위상태에 영향을 주는 것(X5, X7)이 있다. 내부상태에 영향을 주는 감각상태가 바로 의식으로 전달되는 감각이나 지각이고, 내부상태에 영향을 주지 않고 곧 바로 행위상태에 영향을 주는 감각상태가 무의식적으로 처리되는 감각 정보들이다. 다시 한번 강조해두지만 이러한 모델에서의 "화살표"는 마코프 체인을 의미한다. 결정적 영향이라기보다는 확률적 영향이라는 뜻이다.  


그림 출처: (Visweswaran & Cooper, 2010)


뇌의 내부(의식, 판단, 예측 하는 부분: X6)와 외부 환경 사이에는 마코브블랭킷을 역할을 하는 우리의 몸이 있게 되는데 감각상태(X2, X3, X5, X7)와 행위상태(X8, X9)를 담당한다. 감각상태로부터 유용한 정보를 선택적으로 샘플링하여 내부 모델을 바탕으로 능동적 추론을 하며 그 추론을 바탕으로 예측을 해서 항상성과 알로스태시스를 달성하기 위해 여러가지 움직임을 발생시킨다. 

의식은 움직임 자체가 주는 감각 정보와 움직임이 외부 환경을 변화시킴으로써 얻어지는 감각정보를 통합해서 세상에 관한 단일한 이미지를 생산해낸다. 여기서 "움직임 자체가 주는 정보"란 관절, 근막, 근육에 분포하여 사지의 움직임이나 위치를 감지하는 고유수용감각과 같은 것이다. 위의 그림에 표현하자면 X9에서 X3으로 영향을 미치는 화살표라 할 수 있다. "움직임이 외부 환경을 변화시킴으로써 얻어지는 감각정보"란 내가 움직이는 사물의 모습을 눈으로 보거나, 소리를 귀로 듣거나, 움직임을 손으로 느끼는 것으로 시각, 청각, 촉각 등을 의미한다. 이는 X11에서 X3으로 향하는 화살표로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정보들에 대해 의식(X6)은 지속적인 샘플링과 리샘플링을 하게 되고, 능동적 추론을 바탕으로 예측적 조절(predictive regulations based on the active inferences)을 하며 그 결과로서 앞에서 살펴본 단일성, 동시성, 연속성, 체화성, 수동성 등을 생산해내게 된다. 

위의 그림에서 X3와 X4의 관계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X4는 외부 사물 혹은 환경이다. X3는 몸의 일부로서의 감각기관이다. 그런데 X3는 X4을 수동적으로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X3에도 신경시스템이 있고 지각의 과정에서 능동적 추론을 한다. X3는 내부모델을 바탕으로 가장 적절한 추론을 통해 X4를 지각편린으로 생산해낸다. 사물자체의 X4가 X3와의 인터랙션을 통해 지각편린으로서의 X4'으로 생산되고 그것이 X6에 전달된다. X6에게 주어지는 외부 사물이나 환경은 항상 마코프 블랭킷인 우리 몸에 의해서 생산되고 변형된 지각편린들이다. 이것이 메를로뽕티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말한 "지각의 장의로서의 몸(the body as the field of perception)"의 의미이며(Merleau-Ponty, 2013) 바렐라의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의 의미다(Varela, Thompson & Rosch, 2016). 이것이 또한 내면소통의 한 측면인 "몸과의 내면소통"의 의미이기도 하다. 

한편, X6가 X3를 통해서 지각편린 X4'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도 능동적 추론을 한다. 지각편린을 바탕으로 의미있는 기호나 스토리텔링을 함으로써 X4'를 다시 X4''으로 생산해낸다. 이것이 의식의 본질이 스토리텔링에 있다는 뜻이다. 의식 X6는 X4'를 바탕으로 X4''를 생산해낼 때 X9를 고려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X9의 화살표는 X4로 향해있다. 즉 사과(X4)를 보고 사과를 집기 위해서 손을 뻗는(X9) 상황이다. 이때 행위(X9)의 다양한 가능성 여부는 의식(X6)이 X4'(지각편린으로서의 사과)을 X4''(의미를 지닌 사과, 즉 스토리)으로 생산해내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나의 특정 대상에 대한 행위의 가능성이 그 대상에 대한 인지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렐라가 강조하는 "행위적 인지(enactive cognition)" 혹은 "체화된 행위(embodied action)로서의 인지"의 의미다(Varela, Thompson & Rosch, 2016)

X6가 X3을 통해서 X4 를 인지하는 과정에는 X6가 X9를 통해 행위를 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에 예측이 강한 영향을 미친다는 X6→ X9→ X4→ X3→ X6 이렇게 의식에서 출발해서 의식으로 되돌아오는 "이상한 루프"가 생기게 되며, 이것이 자의식의 본질적 특성이다. 호프스태터가 자의식의 본질로 자기참조과정을 강조하면서 "나는 이상한 루프다"라고 한 이유이기도 하다(Hofstadter, 2007). 또한 이것이 바로 내면소통의 본질적 형태로서의 자기참조의 작동 방식이기도 하다.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곧 나를 인식하는 것이되고, 나에 대한 인식을 대상으로 통해서 가능해지며, 지각하는 것의 기반이 행위고, 행위는 지각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소용돌이 속에서 자의식이 떠오르게 된다. 이러한 자의식은 주로 스토리와 의도만을 생산한다. 감각상태나 행위상태의 마코프 블랭킷이 처리하는 모든 정보에 일일이 다 관여하는 것도 아니다. 상당 부분의 정보는 마코프 블랭킷 레벨에서 자체적인 능동적 추론 시스템으로 처리된다. 내 의식은 내 몸이 느끼는 모든 감각이나 내 행위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다 아는 것도 아니고 처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소용돌이의 결과로서 그 한 가운데에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게 존재하는 것이 바로 "나"다. 이것이 지나스의 "소용돌이로서의 나"의 의미라 할 수 있다(Llinás, 2002).  

X6의 입장에서는 X3이 생산해낸 지각편린 X4'이나 자신이 생산해낸 X4''이 얼마나 정확한지 (즉 자신의 능동적 추론이 얼마나 정확한지) 판단하여 예측 오류가 있을 경우 이를 계속 수정해나가야 한다. 이러한 오류 판단을 하는 방법에는 크게 보아 네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 X4에 X3가 감각자료에 대해 지속적인 리샘플링을 하는 것. 즉 사과가 맞는지 보고 또 보고 다시 보는 것. 둘째, 다른 종류의 감각정보를 처리하는 X1으로부터 X4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 즉 X3가 X4에 대해 얻었던 시각정보를 X1이 얻는 촉각정보 또는 후각정보와 비교하는 것. 사과가 맞는지 눈으로 볼 뿐만아니라 만져보고 냄새 맡아보는 것. 셋째, X4에 대한 일정한 행위에 대해 X9가 받는 피드백에 의하는 것. 사과가 맞는지 먹어보는 것. 넷째, X6가 생산해낸 스토리 "이것은 사과다"가 과연 맞는지 타인(다른 의식의 주체)를 통해 확인하는 것. 즉 옆사람에게 "이것이 사과가 맞냐?"고 물어보는 것. 이것이 바로 경험의 공유로서의 커뮤니케이션의 의미다. 

여기서 앞의 세가지 방법에 있어서 능동적 추론 과정에 심각한 오류가 발생하게 되면 환각이 생기고, 네번째 방법에서 그러한 문제가 발생하면 망상이 생긴다. 그런데 X6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받아들인 지각이나 생산해낸 스토리가 환각이나 망상인지를 자체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지구상에 단 한사람만이 존재한다면 환각이나 망상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반드시 다른 존재, 타인이 필요하다. 즉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은 내면소통을 위한 대인소통이기도 하며 대인소통과정에 내재된 내면소통이기도 하다. 

다른 타인들 속에 존재하는 내부상태 X6-1, X6-2, X6-n….. 들과 현저하게 다른 지각이나 스토리텔링을 하는 경우 X6은 환각이나 망상을 지닌 것이 된다. 이 때 추론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이슈들이 부정적 감정이나 환각 혹은 망상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능동적 추론의 과정이 정상이냐 비정상이냐를 구분짓는 기준은 수학이나 논리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의해서 주어질 뿐이다. 즉 다른 사람들의 평균적인 추론의 결과로부터 얼마나 벗어냐있느냐에 의해서 결정될 뿐이다. 모두가 환각에 빠져있거나 모두가 망상에 빠져있다면 아무도 환각이나 망상에 빠져있는 것이 아닌 것이 되고 만다.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져있는 환상과 망상으로부터 우리가 빠져나올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해탈이고 자유다.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반야심경의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다. 이것이 바로 원리전도몽상을 하기 위해서 내면소통 훈련이 필요한 이유다.

다른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는 것은 X6-1과 X6-2가 각자의 마코프 브랭킷을 통해서 서로 정보를 주고 받는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의 의식이나 의도에 대해서 우리는 항상 그 사람의 마코프 블랭킷인 몸을 통해서 능동적 추론을 해낼 수 밖에 없다. 그 사람의 몸이 만들어내는 목소리, 표정, 몸짓 등을 통해 상대방의 의도나 감정 상태에 대해 가추법적으로 해석한다. 이것이 몸 철학자 정화열이 "우리는 항상 몸으로 다른 사람에게 드러나며 따라서 몸은 인간관계 속에서의 존재 양식(social placement)"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다(Kim, 2016). 

내부상태인 의식(X6) 입장에서는 감각상태로부터 유입되는 정보에 대해 중요한 추론을 해야 한다. 즉 "지금"내가 느끼는 이 감각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에 대해 추론해야 하는 것이다. 이 감각을 일으킨 것은 나인가 아니면 너인가? 지금 내가 내 팔을 만지는가 아니면 네가 내 팔을 만지는가? 지금 내가 잡고 있는 물건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내가 움직인 결과인가 아니면 이 물건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인가? 지금 내 발이 움직이는 것은 나의 움직임의 결과인가 아니면 내가 딛고 있는 바닥이 움직이는 것인가?

지금 내가 느끼는 감각의 근원이 나의 내부인가 아니면 외부인가하는 것은 나의 움직임을 계획하고 또 그결과를 예상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다. 팔과 다리를 움직여서 걸을 때, 나의 의도에 따른 움직임이 가져오는 감각과 외부적 작용에 의한 감각이 마구 섞여서 들어온다. 이때 수많은 감각 정보 중에서 어느 것이 나의 내부에서 비롯된 것이고 혹은 외부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순간 순간 지속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내가 환경 속에서 움직임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항이다. 이 때, 움직임이나 감각 생성의 근원이 나의 내부인 경우, 그러한 원인 제공자를 하나의 에이전트로 상정하게 되는데 이것이 자의식이다. 이것이 "나"라는 자의식이 움직임을 위한 능동적 추론의 필연적인 결과물인 이유다.  


자의식과 자유에너지

나를 다른 사람과 구분해서 인식하는 것은 자의식의 기본적 요소다. 하지만 자기 인식에 대한 정보가 뇌에서 어떻게 처리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자유에너지 원칙은 자기인지과정에 대한 이론적 틀을 만드는데 큰 도움을 준다. 뇌는 몸이 받아들이는 정보를 베이지안 방식으로 처리함으로써 "나"라는 인식을 만들어낸다. 감각정보에 대한 확률론적 표현이 위계적으로 상향 전달되고 상층부에서는 여러 종류의 정보를 통합시킨다. 감각 시스템으로부터 상향으로 전달되는 감각정보들은 "서프라이즈" 신호로서의 특성을 지닌다. 다양한 루트를 통해 올라오는 여러가지 "서프라이즈" 정보들을 탑-다운 방식으로 조절해서 뇌 전체에서 발생하는 예측오류들을 최소화한다는 것이 자유에너지 원칙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러한 과정 속에서 환경에 대한 움직임이나 행위를 위해 내부 감각과 외부 감각에 대한 구분(외적인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 감각과 나의 행동에 의해 발생하는 감각에 대한 구분 포함)이 필수적으로 발생하게 되고 여러 층위로 이루어진 "경계"로서의 마코브 블랭킷이 형성된다. 이 "경계"에 둘러싸인 하나의 중심축 혹은 "내부"가 상정되는데 이것이 바로 자의식 발생의 핵심적인 과정이다(Apps & Tsakiris, 2014). 이 모든 과정은 능동적 추론이라는 역동적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그것의 목표는 항상성의 유지를 위한 끊임없는 "회귀"보다는 성장과 발전을 위한 알로스태시스의 성취다.  

자의식이라는 것은 실제 경험하는 것과는 다른 현실을 내 의도에 따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기확신의 결과물이다. 시간적 두께라는 것은 나의 행위의 결과가 지금 현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과는 다는 것을 만들어내리는 추론과정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보자면 결국 의식이란 나의 미래에 대한 추론 혹은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나의 의도따라 실현될 나의 행위의 결과에 대한 스토리텔링이라 할 수 있다. 

시간적 두께의 가장 근본적인 형태는 움직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가 손을 뻗으면 저 나무에 달려있는 사과를 잡을 수 있다"는 추론이 자의식을 생성해내는 기본 단위들이다. 이러한 추론이 움직임에 대한 의도이며, 나의 의도에 따른 행동의 결과를 추론함으로써 인과관계가 생겨나고 그러한 인관관계들이 시간의 흐름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인간의 기본적인 지각과정, 인과적 사유, 스토리텔링, 언어적 표현 등이 모두 움직임에 대한 추론에서 비롯하며 이러한 과정들을 통합하고 조정하기 위해 의식이 생성된다. 그러한 경험과 의식의 주체로서의 자의식이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인식의 주체로서의 자의식은 생물학적으로 존재하는 마코프 블랭킷인 우리 몸의 감각작용과 행위작용의 결과로서 생성된 것이다. 즉 내 몸이 먼저 존재하기에 "나"라는 자의식에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프리스턴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틀렸고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가 맞다고 주장한다(Friston, 2017b). 몸이 먼저 존재하는 것이고, 마코프 블랭킷이 우선 존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이라는 명제에서 "cogito"는 "I think"보다는 "I recognize"에 더 가까운 뜻이다. 즉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그 보다는 더 폭 넓게 "인식한다"는 뜻이다. 사물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을 포함해서 지각하는 것까지 모든 인식 작용이 "cogito"의 의미다. 이러한 모든 인식작용은 마코프 블랭킷 모델에 따르자면 내부상태인 것이고 이는 당연히 감각상태와 행위상태에 관한 능동적 추론을 담당하는 에이전트로 생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 고로 지각하고 인식한다"(sum, egro cogito)가 맞다.  

우리의 자의식은 항상 외부에 대한 인식, 지각과 행위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감각과 행위가 일어나는 바로 그 지점이 경험자아다. 따라서 경험자아의 본질은 마르코프 블랭킷의 감각상태와 행위상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마르코프 블랭킷이 감싸고 있는 "내부"가 바로 의식으로서의 배경자아이며 외부에 의해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다. 

마코프 블랭킷에 의해서 나와 타인 간의 구분, 나와 환경 간의 구분이 일어난다. 그 경계가 곧 "나"라는 자의식 구축의 토대가 된다. 그 경계에서 세상에 대한 지각이 일어나고 세상을 향한 행위가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의식이 타인과 자신을 향해 동시에 열려있다(Dehaene, 2014; Ramachandran, 2011)는 뜻이다. 모든 고통과 번민은 바로 그 경계에 있다. 그 경계에 서서 외부만을 바라 보는 것이 일상생활이다. 그래서 인생은 고달프기 마련이다. 명상은, 수행은, 바로 그 경계에 서서, 경계의 존재를 깨닫고, 그 경계가 둘러싸고 있는 내면을 동시에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내면을 향하는 순간 경계는 확장된다. 경계에서 경계를 바라보고 경계에 머무는 순간 내부에도 외부에도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의식이 있는 곳에는 항상 자의식이 있는가? 당연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을 증명하거나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다(Milliere & Metzinger, 2020). 우리는 인간의 모든 경험에는 그 경험의 주체인 경험자아와 그것을 알아차리는 배경자아가 동시에 존재하게 마련이라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다. 의식적 경험 뒤에는 기본적인 자의식이 배경으로서 존재한다는 아이디어는 이미 여러 철학자나 뇌과학자들이 제기한 바 있다(Zahavi, 2014; Damasio, 1999). 

자하비는 후썰의 자아개념에 대해 논의하면서 일상적인 경험자아(experiencing self)와 구분되는 보다 더 근본적인 "전회고적 자의식(pre-reflective self consciousness)의 개념을 주장하는데 이것이 배경자아와 매우 유사한 개념이다. 후썰은 자아를 세 가지로 구분한다. 원초적인 순수자아(pure I), 타인에게 드러나는 인격자아(personal I),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기본이 되는 근원자아(primal I = Ur-Ich). 근원자아는 판단중지를 하는 자아다. 후썰의 순수자아와 인격자아가 자하비가 말하는 일상적인 경험자아에 해당하고 근원자아가 "스스로를 돌이켜 보기 이전에 존재하는 자아"인데 이것이 내가 나임을 (I am that I am) 인식하는 주체다. 이것이 배경자아고 자의식의 근원이다.  


위상각성, 토닉각성, 불이론(non-duality)

의식이 있다는 것은 깨어 있는 상태 즉 각성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메칭거에 따르면 의식의 각성(alertness) 상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위상 각성(phasic alertness)인데 보통 현저한 외부 자극에 의해 바텀-업의 방향으로 유발되어 짧은 시간동안 유지되는 각성이다. 불규칙적으로 가끔 발생하여 예측하기 어려운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이라 할 수 있다. 보통 새로운 대상으로 주의를 전환하거나 스스로 의도의 방향을 급격히 바꾸는 경우에 떠오르는 의식이다. 

다른 하나가 토닉 각성(tonic alertness)인데 외부적 자극에 의해서가 아니라 탑-다운의 방향으로 내부에서 유발되는 각성 상태를 수분에서 수시간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의식 상태다. 이는 지속적으로 내재적인 의식상태를 동일하게 유지하는 동일한 깨어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Metzinger, 2020).

근육생리학에서는 특정한 자극이나 상황에서 근육이 짧게 특징적으로 수축되는 것을 위상성 수축이라하고, 지속적으로 어떤 긴장의 톤이 은근하게 계속 유지되는 것을 토닉(긴장성) 수축이라 한다. 메칭거는 이를 원용해서 의식에도 위상 상태와 토닉 상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위상 각성이나 수축은 특정한 목적을 위해 일시적으로 근육을 긴장시키는 것으로 경험자아의 행위들과 관련이 깊으며 토닉각성이나 수축은 경험자아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고 지켜보는 배경자아의 깨어있음과 관련이 깊다. 

배경자아는 불이론 (non-dualism)에서 말하는 "순수의식 (pure-consciousness)"과 관련이 깊은데 이는 결국 지속적인 토닉 각성 상태의 베이지안 표현 혹은 예측 모형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Metzinger, 2020). 불이론이라는 것은 주관과 객관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불이론은 일원론이 아니다. 둘이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둘은 둘이되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관찰 주체와 관찰 대상이 다르지 않으며, 나와 우주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Josipovic, 2010). 불이론은 아드바이타 베단타 철학의 핵심 사상이다. 진짜 "나"인 아트만이 바로 궁극의 실체인 브라만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공사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불이"공, 공"불이"색이 바로 불이론이다. 인간의 모든 종류의 경험이라 할 수 있는 색수상행식의 오온이 모두 다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오온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불이론다. 메를로 뽕티의 몸철학은 인간의 몸을 단순한 살과 피의 덩어리(객관적 실체)로만 보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주관과 객관의 결합으로서의 경험자의 장으로 본다는 점에서 불이론과 일맥상통한다. 관찰주체와 관찰대상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봄의 전체적인 우주관(wholeness)역시 불이론의 물리학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Bohm, 2002). 

불이론에 입각한 수행전통이 "불이론적 알아차림(non-dual awareness: NDA)”인데 주로 일상적인 경험의 기반이 되는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을 넘어서고 한다. 특히 의식의 내용을 텅 비게 만들어서 순수의식(“pure consciousness”)의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는 수행법이다(Millière et al., 2018). 결국 불이론적 알아차림도 다른 명상 수행들과 마찬가지로 배경자아의 알아차림을 지향하는 수행이라 할 수 있다. 불이론적 알아차림 수행자들에 대한 뇌과학 연구 결과 역시 다른 자기참조과정 중심의 명상 수행자들과 비슷한 뉴럴 네트워크(주로 precuneus와 dlPFC 사이)의 기능적 연결성의 증가를 보였다(Josipovic, 2014)


마코프 블랭킷과 소마틱 운동

메칭거에 의하면 "셀프"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어느 누구도 "셀프"를 "갖었거나" 혹은 "셀프였던 적"이 없다. 그것은 뇌가 구성해낸 내적인 이미지일뿐이다. 하지만 자의식은 자신이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경험할 수 없다(Metzinger, 2009).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 경험에 떠오르는 허상으로서의 자의식일 뿐이다. 그것은 고정된 실체라기보다는 지속적인 과정이고, 투명한 셀프 모델의 내용일 뿐이다(Metzinger, 2003). 우리가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자의식이란 결국 지속적인 스토링텔링의 과정 그 자체인 것이다. 

메칭거의 주장처럼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가상현실에서의 가상자아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인간의 뇌는 자의식을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진화하게 되었는가? 메칭거는 자의식이 두뇌의 기능에 의해 생산되는 가상현실임은 매우 설득력있게 논증하고 있지만 왜 그러한 방향으로 진화했는지에 대해서는, 즉 왜 인간의 뇌에는 "의식"이라는 기능이 필요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에 대한 대답은 움직임에서 찾아야 한다고 믿는다. 모든 감각상태와 행위상태를 알아차리는 인식주체인 자아의 본질이 바로 내부상태인 X6다.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마음근력 훈련에 핵심이 되는 자기참조과정이나 여러 전통의 명상 수행들이 모두 다 X6에 집중하는 훈련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화두선의 대표적인 화두인 "이뭣고" 역시 X6에 대한 단도직입적인 질문이다. 이 몸뚱아리(마코프 블랭킷)를 이끌고 다니는 내부상태인 (X6)가 과연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내부감각(interoception)은 마코프블랭킷의 일부인 내 몸으로부터 전해지는 감각정보다. 이것은 시각, 청각, 혹은 촉각과는 다르다. 시각이나 청각 정보가 외부 환경에 대한 감각정보라면 내부감각은 내 몸의 상태에 관한 정보다. 내 몸의 상태에 관한 정보수집은 감정인지나 감정조절과 직결된다.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것이 내부감각에 집중하는 소마틱 운동이 감정 조절 훈련에 매우 효과적인 이유다. 소마틱 운동은 외부 환경이 제공하는 감각보다는 내 몸이 주는 감각에 집중하는 운동이다. 어떻게 공을 던지거나 쳐야 원하는 방향으로 보낼 수 있겠는가 혹은 어떻게 해야 제대로 무거운 바벨을 들어올릴 수 있겠는가 등에 집중하는 것은 내 몸이 환경에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피지컬 운동이다. 반면에 소마틱 운동은 공을 쥔 손의 느낌에 집중하거나 땅을 딛고 선 내 발과 다리에 전해지는감각적 변화에 집중하는 것이다. 

소마틱 운동에 대표적인 것에는 태극권, 기공, 펠덴크라이스, 알렉산더테크닉 등이 있다. 특히 태극권은 운기를 중요시 한다. "기"의 존재를 믿던 안 믿던 상관없이 기를 느끼는 훈련은 전적으로 내부감각을 발달시키는 훈련이다. 기는 시각이나 촉각 등의 감각으로 보거나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몸안에서 느껴지는 어떤 에너지의 흐름같은 느낌이다. 태극권의 투로 동작은 이 기를 잘 조절하고 운전하는 운기(運氣)의 방법을 모아놓은 것이다. 천천히 움직이며 내 몸이 나에게 주는 감각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운동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피지컬 운동과는 매우 다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가(하타 요가)도 원래는 소마틱 운동이다. 그러나 많은 요가 센터에서는 강사의 동작을 따라하는 것만을 강조하며 특정한 자세를 취하려는 의도만을 앞세운다. 내몸이 나에게주는 내부감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라는 시각정보에 의해 피드백을 받으면서 운동을 하게 된다. 결국 근육을 늘리고 유연성을 키우는 스트레칭 운동이 되어버리고 만다. 요가를 진정 요가답게 하려면 특정한 자세를 취하는 것 자체를 목표로 삼아서는 안된다. 특정한 자세를 취할 때 내몸이 나에게주는 내부감각에 집중해야 한다. 내 몸의 나에게 이야기하는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야말로 내면소통을 해야한다. 그리고 호흡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요가를 할 때 세션 내내 들이니고 내쉼을 놓치지 않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아야 한다. 자세는 그 다음 문제다. 호흡을 놓치지 않으면서 특정한 자세를 취할 때 내몸이 나에게 주는 감각에 최대한 집중하기. 그래야 진짜 요가가 되고 소마틱 운동이 되며 마음근력 훈련이 된다. 

나의 상태와 나의 움직임에 대해 감각하고 반응하는 것은 경계와 내면간의 소통이다. 그것이 곧 수행이다. 가만히 가부좌틀고 앉아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경계와 내면간의 소통이 있어야 한다. 호흡에 집중하거나 걷기 명상을 할 때도 제한된 환경 속에서 그러한 행위를 반복하는 한, 이는 외부와의 상호작용보다는 내면적 상호작용의 비중이 훨씬더 크기 때문에 이 또한 내면소통이라 할 수 있다. 

제한된 공간 내에서, 동일한 환경 속에서, 외부 자극의 변화 없이, 혼자 움직이는 행동을 반복하면서 내부감각(interoception)에 집중하는 것(타이치, 요가, 기공 등)은 훌륭한 내면소통훈련이다. 특정한 무게의 기구로 고유감각에 기반한 운동(고대진자운동)을 하는 것 역시 강력한 내면소통 훈련이 된다. 반면에 상대방과 공놀이를 하거나, 탁구를 치거나, 축구를 하게되면 이는 내면소통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외부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더 촛점이 맞추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활동에는 내면소통 훈련의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적다고 할 수 있다. 움직임을 통한 내면소통 훈련은 잘못된 예측에 따른 "서프라이즈"의 최소화를 지향한다. 프리에너지의 최소화 혹은 예측 오류의 최소화를 지향하는 것이므로 움직임에 기반한 명상이라 할 수 있다. 


(부탁의 말씀: 이 글은 곧 출간될 예정인 책 원고의 일부이며, 아직 교정 전 원고이니 인용은 하지 말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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