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의 내면소통
알로스태시스와 감정
그리스어로 "알로스(allos)"는 "다른" 또는 "변화"를 뜻하며 "스태시스(stasis)"는 "현상유지"를 뜻한다. 알로스태시스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을 결합한 것으로, "변화를 통해 안정(stability through change)"이라는 역설적인 개념이다(Sterling & Eyer, 1988). 수십년전부터 알로스태시스의 개념을 주장해온 스털링에 따르면 항상성 유지(homeostasis)라는 개념은 생명현상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신체 조절작용의 근본적 목적은 신체 내부 환경의 지속성을 유지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 내부 환경을 끊임 없이 변화시켜서 생존과 번식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Sterling, 2012).
"항상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피드백을 통해 원래 상태에서 벗어난 "에러"를 수정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조절 작용만으로는 생명체가 살아가기에 부족하다. 조절작용은 외부 자극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피드백보다는 능동적인 "예측"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알로스태시스는 모든 것을 관장하고 능동적으로 추론하고 예측하는 중앙콘트롤타워로서의 뇌의 존재를 가정한다. 항상성 유지 시스템에는 이러한 통합조절센터로서의 뇌의 존재가 필요 없다. 예컨대 실내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자동온도조절장치는 현재의 온도만 감지해서 미리 세팅된 온도를 벗어나는 경우에만 냉방 혹은 난방이 자동적으로 가동시킬 뿐이다. 이러한 장치만으로도 일정한 실내 온도를 유지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여기에는 온도와 관련된 각종 정보를 통합하고, 예측하고, 판단해서 여러 하부 기관에 명령을 내리는 "뇌"가 필요없다.
신체의 항상성 유지라는 개념에는 어떤 이상적인 값이 전제가 된다. 체온의 가장 정상적인 상태는 몇도이고, 혈압은 얼마이고, 심박수는 얼마여야 한다는 것이 미리 정해져 있어야 한다. 그 값에 벗어나는 경우 무언가 피드백을 주어 수정을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고정된 기계가 아니다. 늘 변화하고 성장하고 움직인다. 최적의 체온, 혈압, 심박수, 스트레스 호르몬을 비롯하여 각종 호르몬의 혈중 농도, 면역시스템의 가동 상태 등등은 연령, 성별, 운동 여부, 대사 상태, 만성 질환 여부, 감염 여부, 스트레스 민감도, 물리적 상황, 사회적 상황, 계절, 외부 온도, 습도, 일조량, 위도, 고도, 문화 등 수많은 내적 외적 환경의 조건에 따라 다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말하자면 내 몸의 적정한 체온은 잠을 자고 있을 때와, 식사를 할 때와, 일을 할 때와 운동을 할 때 각각 다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에 지금 성장중인 청소년이냐 아니면 노년기에 접어든 사람이냐, 실내 온도와 습도는 얼마인가 등등에 따라 또 다 달라진다.
알로스태시스는 이 모든 것에 관한 정보를 감각 기관을 통해 받아들여서 처리하는 중앙통제기관인 뇌의 작용을 강조한다. 특히 각 기관으로 부터 내적 외적 감각 정보에 대해 자동적으로 반응하기보다는 베이지안 추론에 입각한 예측 모델을 갖고 적극적으로 특정한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 예측적 조절(predictive regulation)을 한다(Sterling, 2012). 알로스태시스의 관점이 필요한 것은 탈바꿈을 하는 곤충이나 양서류의 경우를 살펴보면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지구상의 전체 동물 중 약 40%가 탈바꿈을 한다(Clark, 2017). 항상성만으로는 애벌래가 번데기가 되었다가 나비가 되는 과정을 설명하기 힘들다. 항상성 유지만을 지향한다면 탈바꿈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탈바꿈은 단지 형태만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행동 양식도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애벌레는 기어다니면서 나뭇잎을 먹으며 교미는 하지 않는 반면, 나비는 날아다니면서 꽃꿀을 먹으며 교미를 한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 따라 최적의 균형 상태는 끊임 없이 달라진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조절작용은 항상성의 개념을 넘어서는 것이다.
항상성과 알로스태시스의 차이점에 대해 새폴스키는 비유적으로 간단히 설명한다. 몸에 수분이 부족한 경우, 항상성의 관점에서의 해결 방법은 콩팥이 이를 감지하고 수분 배출을 줄여서 소변의 양을 줄이는 것이다. 반면에 알로스태시스의 관점에서의 해결방법은 뇌가 이를 감지하고, 콩팥에게 소변량을 줄이라고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수분을 많이 배출하는 신체부위 (피부나 입 등)에게는 수분 배출을 줄이라는 신호를 보내고, 의식에게는 갈증을 느끼도록 하는 신호를 보낸다(Sapolsky, 2004). 물을 마시게 되면 얼마 뒤에는 수분 부족이 어느정도 회복될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또 동시에 현재의 운동량에 따른 땀 배출의 양도 예측해서 배출해야 하는 소변의 양도 예측하게 된다.
알로스태시스는 이처럼 항상성보다 더 포괄적이고, 역동적이며, 시간의 흐름까지 고려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항상성이 외부로 부터 주어지는 자극에 대해 부적인 혹은 정적인 (negative or positive) 피드백에 의해 균형을 회복하는 것을 지칭하는 좁은 개념이라면, 알로스태시스는 몸 전체의 신진대사와 면역시스템, 에너지의 흐름 등이 모두 관여하여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화하고, 새로운 균형을 만들어가는 포괄적이고도 역동적인 조절 과정을 의미한다. 또한 항상성 유지가 신체의 특정 부위나 기능의 안정성을 위해 국지적으로 어떠한 일이 필요한가에 촛점을 맞추는 개념이라면, 알로스태시스는 신체 전반의 작용과 의식과 행동의 변화까지를 고려한 역동적인 과정 속에서의 균형과 이를 위한 뇌의 통합적인 기능에 더 방점을 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상태로 계속 되돌아간다는 항상성의 개념만으로는 우리의 몸이 환경과 상호작용하여 역동적으로 변화함으로써 균형과 안정성을 유지해나가는 과정을 담아내기에는 부족하다. 프린스턴 식으로 말하자면 외부 자극뿐만아니라 내부 감각까지 고려하여 능동적 추론을 함으로써 서프라이즈를 지속적으로 최소화해 나가는 모든 과정을 알로스태시스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의 핵심적인 개념은 물론 자유에너지 원칙에 기반한 내부감각 추론이다(Corcoran & Hohwy, 2018).
항상성 유지의 관점에서 벗어나서 알로스태시스의 관점에서 우리 몸과 뇌의 작용을 파악하게 되면 질병에 대한 치료의 관점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항상성 유지의 관점에서는 특정한 신체 기관이나 기능 이상에 촛점을 맞춰서 그것을 원래 상태로 돌리려는 개입을 하게 된다. 하지만 알로스태시스의 관점에서는 전체적인 변화를 통한 안정성 획득을 추구하게 된다. 스털링은 정신질환자에 대한 약물치료의 기본 전제가 "원래 상태로의 회복"이라는 잘못된 전제를 갖고 있다고 비판한다(Sterling, 2014). 대부분의 정신질환자의 뉴론의 작동 기제를 보면 그 자체로서는 별 이상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환경에 대한 감각정보의 해석에 따른 잘못된 예측 조절 (predictive regulation)에서 문제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알로스태시스 관점은 보다 통합적인 관점에서의 폭넓은 폭 넓은 접근을 해야함을 강조한다.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보다 더 다양한 자극으로부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든가, 우울증 치료를 위해서는 세로토닌이 고갈된 다양한 원인을 파악하고 세로토닌재흡수억제제 복용 이외에 새로운 신체의 움직임이나 식단을 시도하도록 해서 뇌에 새로운 자극을 준다든가 하는 식이다.
신체의 모든 기능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것은 뇌다. 물론 뇌에서 조절한다고 해서 다 우리가 의식하거나 의도하는 것은 아니다. 중추신경계로서의 뇌와 몸의 각 부위는 서로 부지런히 정보를 주고 받지만 내 의식이 거기까지 관여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세세한 신체의 작용에 까지 의식이 일일이 관여하는 것은 뇌의 입장에서 볼 때 과도한 부하가 걸리는 비효율적인 일이다. 뇌는 신체 작용의 다양한 불균형 상태를 기분, 느낌, 감정 등으로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사실 이러한 몸 전체의 작동 과정에서의 일부 예측의 오류가 내 의식에 기분 나쁨이나 고통으로 떠오르게 된다. 따라서 감정은 무언가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감정은 그 자체로서 이미 하나의 행위다.
능동적 추론과정의 오류와 정서조절 장애
배럿 교수의 통합적이고도 구성주의적인 감정 개념에 따르면 감정은 몸의 신진대사와 에너지를 조절하는 전체적인 알로스태시스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내부 감각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즉 인간이 몸을 지닌 존재로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과정에서 생기는 자연스런 결과가 감정이다.(Barrett, Quigley, & Hamilton, 2016).
우리 몸의 내부 여러 기관에서는 끊임없이 수 많은 내부 감각 데이터를 뇌로 올려 보내고 뇌는 이러한 자료에 대한 능동적 추론을 통해 현재의 신체 상태가 알로스태시스에 부합하는 것인지의 여부를 계속 판단하고 실시간으로 피드백을 내려보낸다. 인간의 신체는 내부적 혹은 외부적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불균형 상태에 빠지며 뇌는 이를 역동적 과정 속에서 바로 잡는 알로스태시스를 추구하게 된다. 이 때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일시적인 불균형 상태가 불쾌감이나 두려움의 느낌을 유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균형 상태에서 속히 벗어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그러한 상태에서 빨리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불쾌한 감정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불쾌한 감정은 우리 몸이 알로스태시스를 시도하고 있다는 좋은 징조다.
이러한 과정에서 세가지 글로벌 네트워크 시스템이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내 자신의 내부감각을 살펴보는 시스템은 주로 DMN이고, 외부 환경에 대한 나의 행동과 관련된 시스템은 주로 CEN이다. 그리고 이 두 시스템이 원활하게 호환될 수 있도록 중간에서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 SN이다. 특히 SN은 신체적으로 고통을 느끼거나 사회적으로 고립되거나 인간관계에서 갈등을 느낄 때에도 활성화된다.
우리 신체의 여러 기관들은 끊임 없이 온갖 내부 감각 정보를 뇌로 올려 보낸다. 대부분은 별의미 없는 노이즈에 가까운 감각정보다. 뇌의 능동적 예측 시스템이 하는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무의미한 감각정보들을 잘 가려내고 무시하는 것이다 (Friston, 2017a). 우리 몸의 감각 기관과 신경 시스템은 수많은 감각 정보들 중에서 중요한 것을 부각시키고 중요하지 않거나 노이즈에 불과한 것은 무시하는 일종의 볼륨조정 (gain control) 시스템이 있다. 그런데 시스템에 이상이 생기면 중요하지도 않은 노이즈에 불과한 잡다하고도 평범한 내부감각신호의 볼륨을 마구 키워서 마치 무슨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의식으로 올려보낸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냥 지나쳤을 수많은 내부 감각 정보들이 "이상 신호"로 둔갑하게 되고 이런 것들이 의식에 "비상 상황"이라는 경고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 결과 환자는 강한 공포심이나 불안감 혹은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
배럿 교수에 따르면, 불안장애나 우울증 등 감정조절 장애를 겪는 환자들은 신체의 특정 부위로부터 올라오는 일상적인 노이즈에 가까운 별의미도 없는 감각정보를 불안이나 불쾌한 감정이라고 끊임없이 해석해낸다. 정상인의 경우에는 이러한 경우 신체의 감각정보로부터 올라오는 다른 정보들을 바탕으로 예측 오류를 즉시 수정하고 바로 잡는다. 그런데 불안장애나 우울증 환자의 경우에는 이러한 예측 오류의 수정작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신체로부터 올라오는 다양한 내부감각 정보들을 모두 다 (별 문제 없는 것이나 노이즈에 해당하는 것까지 모두 다) 부정적인 감정으로 해석해내고, 그것을 증폭시켜 확신이 더해지는 소용돌이 속에 갇히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예측오류의 수정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되면 엄청난 불안감이나 분노나 우울감에 휩싸일 수 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 빠지게 되는 원인으로는 우선 물질대사나 면역 시스템의 문제, 혹은 호르몬이나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 등 다양한 다양한 생리학적 이슈들이 있을 수 있다. 과거로부터의 나쁜 기억이나 트라우마 역시 이러한 능동적 예측 시스템에 장애를 가져오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인지행동치료가 감정조절에 도움을 주는 이유는 이러한 예측 오류를 수정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울증의 경우 인지행동치료는 환자로 하여금 스스로 느끼는 감정에 관한 새로운 개념을 구성할 수 있도록 해주는데, 감정을 해석하는 새로운 개념적 틀이 기존의 예측 오류의 습관을 수정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치료는 환자의 SN을 통해서 예측 오류를 수정하는데 도움을 준다(Barrett, Quigley, & Hamilton, 2016). 명상이나 알아차림을 통한 스트레스 감소 훈련(MBSR) 등의 치료가 효과가 있는 것 역시 예측 오류 습관의 교정을 도와주기 때문이다.
정서조절 장애와 만성통증의 공통점: 추론과정의 오류
전통적으로 심리학에서는 감정을 특정한 목표지향적 행위를 하기 위한 준비단계로 보아 왔다(Moors & Fischer, 2019). 그러나 지나스 이래 프리스턴에 이르기까지 현대 뇌과학자와 심리학자들은 감정을 행동 그 자체로 본다. 지나스는 고정된 행위유형으로 (Llinás, 2002), 프리스턴은 내부감각을 바탕으로 한 능동적 추론에서 비롯된 행위상태로 (Friston, 2010), 배럿은 알로스태시스를 위한 신체의 통합적 적응 행위로 보는 것이다(Barrett, 2017).
이러한 관점에서 배럿은 전통적인 감정 본질 주의를 비판한다. 두려움이나 분노 등 통상적인 "개별" 감정이 각기 고유한 실체를 갖는다는 개념을 비판하는 것이다. 배럿 교수에 의하면 감정은 신체의 전반적인 능동적 예측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회 문화적으로 의미부여가 되고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부정적 정서 자체를 다스리려는 노력은 별 의미가 없다. 불안장애나 우울증, 분노조절장애, 트라우마 등 다양한 형태의 감정 조절 장애를 지닌 환자들에게 개별적인 "감정"을 통제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헛수고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보다는 오히려 알로스태시스에 도움을 주면 부정적 정서 조절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배럿 교수 말처럼,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는 것, 즉 몸을 편안하게 하여 알로스태시스 과정에 도움을 주는 것이 감정 조절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예측 모델에 입각해서 말하자면 마코프 블랭킷이 릴랙스하고 편안히 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체의 자원을 잘 관리하고 적절한 움직임을 통해 내부감각이나 고유감각의 추론 오류를 줄여주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신체의 자원이 고갈이나 불균형 상태 때문에 지속적으로 올라오는 부정적 정서를 인위적으로 "조절"하기 위해 기분 좋은 생각을 하거나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거나 하는 것은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가 없다. 정서는 생각으로 조절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정서는 몸의 문제이며, 신체 현상이며, 몸이 주는 다양한 감각정보를 바탕으로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서의 조절은 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정서조절장애와 본질적으로 유사한 현상이 만성통증이다. 둘 다 내부감각 정보들에 대한 능동적 추론 시스템의 오류라는 공통점을 지니기 때문이다(Limanowski & Friston, 2020). 따라서 그 치료의 기본 방향 역시 동일하다. 내부감각정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습관과 추론의 방식을 심어줘야 하는 것이다.
통증에는 급성통증과 만성통증이 있는데 이 둘의 작동 방식은 매우 다르다. 급성통증은 부상이나 염증 등으로 인해 신체 일부가 손상되었을 때 주로 나타난다. 예컨대 목디스크 등의 질환이 통증을 가져오는 가장 큰 원인은 디스크 수핵을 둘러싼 막의 손상이나 신경 뿌리에 생긴 염증이다. 이러한 급성(acute) 통증은 염증이 가라앉거나 상처가 아물면 사라진다. 이에 반해서 만성 통증은 구체적인 신체의 손상이나 염증 없이도 신경시스템의 오작동에 의해 주로 나타난다. 흔히 만성(chronic) 통증이라고 불리우는 이러한 증상은 허리, 두통, 목, 어깨, 복부, 가슴, 관절 부위 등 신체 여러 곳에 발생할 수 있다. 몸 여기저기가 특별한 이유없이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아픈 경우다.
그렇다면 과연 통증이란 무엇인가? 아프다는 것은 과연 어떠한 경험인가. 한가지 확실한 것은 통증이란 마코프 블랭킷 모델에서 말하는 외부상태에 존재하는 어떤 실체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지나가다가 책상 모서리에 세게 부딪혔다고 하자. 멍이 들 정도로 아프다. 책상 모서리는 내게 엄청난 통증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통증은 책상 모서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책상 모서리를 만져보고 아무리 자세히 살펴보아도 거기에서 지금 내가 느끼는 통증을 경험할 수는 없다. 통증은 실제하는 외부적 사물에 대한 경험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빛이 환해서 눈이 부시다거나 소리가 너무 커서 시끄러운 것과 같은 불쾌한 경험과 통증은 매우 다른 현상이다. 통증은 한마디로 나의 내부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즉 나의 내부 감각상태로부터 올라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통증은 타인과의 공유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는 영화를 같이 보거나 음식을 같이 먹거나 하는 식의 경험의 공유를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의 공유야말로 모든 소통의 기본 전제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통증을 상대방에게 나눠주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아픔은 전적으로 각자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증을 묘사하는 말은 매우 주관적이고 문화마다 다르고 따라서 번역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욱신거린다, 쑤신다, 뻐근하다, 저릿하다, 결린다 등의 표현은 번역할 수 없는 말들이다.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늘 어딘가에 크고 작은 통증을 느끼며 산다. 몸이 아프기도 하고 마음이 아플 때도 있다. 아이젠버거 등의 연구를 통해서 살펴보았듯이 몸이 통증을 느낄 때와 인간관계 단절로 인해 마음이 아플 때에 활성화되는 뇌 부위(dACC, AI 등)도 같다(Eisenberger, 2012a; 2012b). 따라서 통증은 생물학적, 심리학적, 인간관계적 측면이라는 세가지 구성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여겨져 왔다. 이를 생물-심리-인간관계 (Bio-psycho-social: BPS) 모델이라고 하는데, 스틸웰과 하먼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통증을 행위주의(enactivism)적 관점에서 5E(Embodied, Embedded, Enacted, Emotive, and Extended) 모델로 개념화하자고 제안한다(Stilwell & Harman, 2019). 우리가 살펴보았던 뇌의 기본 작동 방식으로서의 능동적 추론의 관점을 추가적으로 고려해서 통증을 이해하자는 것이다.
통증은 생리학적으로 몸이 잘못되었다는 신호를 뇌가 받아 들여 해석한 결과다. 따라서 약물이나 기타 처방을 통해서 몸의 고장난 부분을 고치면 통증이나 증상도 사라진다. 물론 이러한 기계론적 관점으로 충분히 설명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통증에 대한 전통적인 기계론적 관점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첫째, 아무런 신체의 기능 이상 없이도 통증을 느낄 수 있다는 것과 둘째, 플라시보나 가짜 치료를 받아도 통증이 사라진다는 것이다(Ongaro & Kaptchuk, 2019).
이러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통증이 뇌의 능동적 추론의 결과로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의 뇌가 몸이 현재 고통 속에 있다고 추론하고 판단하기 때문인데, 그러한 추론의 기반이 되는 것은 유입되는 감각 정보, 과거의 사전 정보, 맥락 단서(contextual cue)등을 합한 것이다 (Ongaro & Kaptchuk, 2019). 즉 기존의 내부생성모델과 새로이 유입되는 자극 정보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통증은 생성된다. 따라서 신체적 증상을 경험하는 것과 객관적인 신체의 이상 사이의 관계는 항상 개인별로 다르고, 콘텍스트에 따라 다르고, 또 개인과 상황간의 상호작용에 따라 다 다를 수 밖에 없다 (Van den Bergh, et al., 2017).
능동적 추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통증은 비물질적인 마음이나 정신에 깃들어 있는 신비로운 정신적인 현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근육 조직이나 혈관 두뇌 등 생체 조직에 깃들어 있는 생리학적인 증상인 것도 아니다. 통증은 우리의 살아있는 몸이 "의미찾기 (sense-making)"의 과정을 진행하는 중에 떠오르는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우리가 몸으로 살아가는 이 세상이나 환경과의 뗄 수 없는 관련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프리스턴의 능동적 추론 모델과 정밀정신의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만성통증은 신경시스템이 감각 정보에 대한 볼륨 조절(gain control)에 실패하는 상황이다. 대부분의 만성 통증(chronic pain)을 포함한 지속적인 신체 증상(PPS: persistent physical symptoms)이 발생하는 이유는 환자가 내부감각에 관한 예측 오류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별의미 없는 자극에 대해서도 과민반응하는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Friston, 2017a).
특히 만성통증은 뇌가 통각수용(nociception)에 기능적으로 중독된 상태라 할 수 있다 (Vachon-Presseau, et al., 2016). 통각수용은 감각 신경계의 하나인데 주로 우리 신체에 위해가 될만한 해로운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것이다. 압력, 열, 화학물질, 독성 등 몸에 해로운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우리 뇌에 통증이라는 형태의 강력한 경고를 보내는 신경시스템이다. 주로 피부에서 발견되지만 골막(periosteum)이나 관절 표면, 내장 기관 등에도 분포한다. 통각수용에 기반한 통증은 신경압박, 디스크, 대상포진 등의 신경병증성 통증(neuropathic pain)이나 심인성 통증(psychogenic pain)과 구분된다.
우리 몸의 여러 감각 기관들은 수많은 감각정보들을 올려보내는데,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다양한 감각정보 중 중 의미있는 것에만 주의를 집중하여 볼륨을 키우고, 별의미 없거나 소음에 불과한 감각정보에 대해서는 볼륨을 낮출수 있는 조절의 능력 (capacity to gain control)이 작동된다. 그러나 이러한 볼륨조절의 능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되면, 통증과 별 관련이 없는 무의미한 감각 정보에 대해서까지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고, 통증과 별 관련이 없는 무의미한 감각정보까지도 모두 다 통증으로 해석해내는 "습관"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만성 통증은 고통에 대한 예측과 내부 감각 사이의 차이가 벌어질 때 일어난다. 즉 통증 자극에 대한 지속적이고도 반복적인 예측 오류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몸의 내부에서 올라오는 다양한 감각을 증폭시켜서 과장되게 통증으로 해석하는 것이 만성통증의 핵심원인이 된다. 결국 고통은 내부 감각 신호에 대한 뇌의 예측 시스템에 의해서 생산되어지는 것이다. 이는 불안이나 공포, 분노, 우울 등의 부정적 정서가 생산되는 방식과 매우 흡사하다.
이를 베이지안 추론으로 기술하자면, 특정한 내부 감각이 주어졌을 경우, 그것이 통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예측(= p(pain | sensation))과 특정한 통증이 주어졌을 경우, 그에 따라 특정한 감각을 느끼게 되리라는 가능성(=p(sensation | pain)) 사이에 상당한 정도의 불일치가 생길때 만성 통증 등의 지속적인 신체증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환자의 신경시스템은 해롭지 않거나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자극들을 통증의 결과라고 해석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무의미한 소음에 불과한 내부 감각 신호를 무시하고 주의를 외면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Hechler, Endres & Thorwart, 2016). 소음에 불과한 감각 신호의 볼륨 크기를 줄이는 (attenuate) 능력의 상실 혹은 주의력 분산 능력의 상실이 곧 만성통증의 원인이다. 따라서 만성통증 등의 신체증상은 행위와 주의에 대한 선택(selection)의 메카니즘의 오류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아야만 하는 것이다(Pezzulo et al., 2019).
통증은 그야말로 "전체로서의 한 인간의 전반적인 기능"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만성통증은 환자의 몸과 마음의 작동방식을 종합적으로 살펴보아야만 정확한 원인을 파악할 수 있다(Stilwell & Harman, 2019).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던 봄의 관점에서 보자면 만성 통증이야말로 인간의 몸과 의식에 대해 내향적으로 펼쳐지는 내재질서다(Bohm, 2002)이며, 소마-시그니피컨스와 기호-소마(signa-somata)의 대표적인 현상이다(Bohm,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