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의 내면소통
움직임: 의식의 존재 이유
내부감각 훈련의 핵심은 몸으로부터 올라오는 감각 정보에 집중하여 주의를 기울임으로서 내부감각에 대한 알아차림의 능력을 높이는 데 있다. 내부감각 정보에 기반하여 의식은 감정이나 통증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과정에 오류가 생기면 정서조절 능력이 저하되거나 이유없는 만성적인 통증에 시달리게 된다. 감정과 통증을 다스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내부감각에 대한 자각능력을 높이는 것이다. 이처럼 내부감각훈련은 마음근력 향상을 위한 내면소통 훈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의식의 두 가지 기본 작용에는 의도(intention)와 주의(attention)가 있다. 내부감각훈련은 바로 "주의"능력 향상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정 조절이나 의식 작용의 향상을 위해서 필요한 또 하나의 요소는 "의도"에 집중하는 것이다. 의식이 지닌 의도는 대부분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모든 의식적인 행동에는 항상 의도가 선행한다. 자신의 의도를 늘 스스로 알아차리고 있어야만 자기조절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나의 의도에 집중하여 스스로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특정한 의도를 바탕으로 특정한 움직임을 만들어 낼 때 mPFC를 중심으로 한 전전두피질과 두정엽의 다양한 네트워크가 활성화된다. 의도에 집중하는 훈련은 스스로의 움직임에 집중함으로써 가능하다. 특히 고유감각을 기반으로하는 움직임 훈련은 의도의 능력과 주의의 능력을 동시에 향상시킬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제 곧 살펴보겠지만 의식의 본질적 내용은 움직임에 대한 의도이기 때문이다.
내부감각 훈련은 주의를 중심으로 의도가 가미된 훈련이며, 반면에 고유감각 훈련은 의도를 중심으로 주의가 가미된 훈련이라 할 수 있다. 내부감각 훈련은 "호흡에 집중해야지, 심장 박동을 느껴봐야지" 등의 의도로 시작하지만 주로 감각에 대한 주의와 알아차림에 집중하는 것이다. 반면에 고유감각 훈련은 움직임에 대한 의도가 보다 더 전면에 드러나며 몸에 전해지는 고유감각을 느끼면서 움직임을 조절해나간다. 예컨대 등 뒤에서 진자운동으로 움직이는 메이스벨이나 페르시안 밀 등의 고유감각 훈련은 도구의 움직임을 시각이나 촉각이 아니라 손과 팔에 전해지는 느낌을 통해 조절하면서 특정한 움직임의 의도를 실현해내는 것이다.
자유에너지 원칙(내적모델에 기반한 추론의 오류의 최소화)의 기능을 효율적으로 담당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바로 의식이다. 마코프 블랭킷 모델을 통해서 살펴보았듯이 이러한 추론이 필요한 근본적인 이유는 움직임 때문이다.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하나의 통일된 환경이 주어져야하고 (그래서 다양한 감각정보의 통합이 필요하고), 나의 움직임이 환경이나 대상에 미칠 영향을 예측해야 한다 (그래서 능동적 추론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의식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는 움직임이다.
프란시스코 바렐라는 행위적 지각(enactive perception)이란 개념을 제안했다(Varela, Thompson, & Rosch, 2016). 지각의 기반이 행위라는 뜻이며, 움직임의 가능성이 지각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시각, 청각, 촉각은 물론이고 후각이나 미각 역시 몸의 다양한 움직임을 위해 존재한다. 움직임이 지각의 근본 목적이기에 지각은 움직임의 가능성에 따라 강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몸의 감각-운동 시스템(sensory-motor system)과 그에 기반한 인지와 의식이라는 정신적인 현상이 생기는 이유도 결국 환경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판단하고 그 환경 안에서 움직이기 위해서다(Gallagher, 2009).
감정조절능력을 회복하거나 만성통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 몸의 신경계의 추론 시스템에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그것은 움직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움직임이 우리 신경계에 가져다 주는 여러가지 감각정보들을 뇌가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해야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움직임 자각 훈련이다. 움직임이 내 몸에 시시각각 전해주는 여러가지 감각 정보들에 대해 명료한 주의(attention)를 보내 인지하는 훈련이다. 이러한 움직임 자각 훈련 중에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효과적인 것이 호흡이다. 늘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인 호흡은 규칙적이고도 미묘한 움직임을 우리 몸에 끊임없이 가져다 준다. 호흡에 의해서 발생하는 움직임들에 대한 자각 훈련은 여러 명상 전통에서도 오랫동안 중요한 수행방법으로 여겨져 왔다. 조용히 가만히 앉아서 호흡에 집중하는 것 역시 호흡이 가져오는 여러 움직임에 주의를 집중하는 측면도 있다. 호흡이야말로 의식적이면서도 무의식적인, 그야말로 지속적인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움직임의 중요성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몸의 움직임이 뇌의 작용이나 의식과 관련해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뇌과학자들은 뇌와 의식의 존재 이유는 움직임에 있다고 본다. 하나의 움직임(운동)을 위해서는 우선 움직임일 발생시키려는 "의도"가 있어야 하고, 그러한 "의도"를 실행하기 위해 우리 몸의 여러 부위들은 조화를 이루어서 작동하게 된다. 우리의 의식은 근육 하나 하나에 별도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의미를 지닌 의도를 수행하도록 하고 이에 따라 몸의 각 부위가 "무의식적으로" 일을 하도록 신체 시스템이 발전해온 것이다. 하나의 커다란 의미, 혹은 "의도"를 갖는 고차원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 "의식"이다. 효율적인 움직임을 위해서는 환경에 대한 모니터링 역시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감각 정보를 한데 모아서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의미를 추출해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기능 역시 "의식"이 담당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러한 기능을 담당하기 위해서 "의식"이 필요했고, 움직임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의도를 생성해내는 의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의식은 내적 모델(internal model)을 외부 대상에 투사하여 능동적 추론을 통해 지각하며 인지한다. 움직임을 위한 능동적 추론이 의식이 존재하게 된 이유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뇌가 "나"라는 의식을 만들어낸 이유는 칸트나 사르트르가 생각하는 것처럼 외부적 대상을 투명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의식은 움직임을 위해 뇌가 만들어낸 기능이다. 의식의 본질은 의도에 있고, 의도의 본질은 의미 부여에 있으며, 의미부여의 기반은 가추법에 있다. 이러한 의도의 목적은 주어진 환경에서 효율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나의 몸으로 외부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기 위해서다. 즉 움직이기 위해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한 다음에 그에 따라 움직인다기보다는 보다 효율적인 움직임을 위해 뇌는 세상을 추론해내고 구성해낸다. 따라서 뇌가 인식하는 세상은 늘 왜곡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뇌는 우리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감각정보들을 왜곡하여 세계상을 만들어낸다. 헬름홀츠가 말한대로 지구가 자전한다는 사실을 알아도 우리의 눈에는 동쪽 하늘에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지구의 자전을 우리 감각 기관으로 직접 느끼는 것은 움직임에 별도움이 되지 않으며 따라서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가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움직임은 삶의 핵심이다. 움직임은 항상 외부 환경에 대한 지각을 필요로 한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효율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내기 위해 "나"라는 의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뇌과학자인 지나스 역시 뇌의 존재 이유는 움직임에 있으며 의식은 움직임을 위한 도구라고 단언한다. (Llinás, 2002). "생각"이라는 것은 다름아닌 내적인 움직임(internalized movement) 그 자체라는 것이다. 뇌는 움직임에 앞서 "움직임을 위한 사전행위"(premotor acts)를 하는데, 생각이 곧 그러한 움직임을 위한 사전행위다. 온갖 생각과 사유의 본질은 의도와 관련된 스토리텔링이며, 모든 의도의 근원에는 움직임이 있다.
철학자 썰 역시 의식의 본질은 "의도성 (intentionaltiy)"에 있다고 보는데 의도성의 개념을 따라가보면 역시 모든 의도성의 핵심에는 인간의 행위와 움직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Searle, 1983). 의도성이란 특정한 대상과 관련해서 나의 행위를 준비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철학자나 뇌과학자나 인간의 의식에 대해 깊이 천착하는 학자들은 이처럼 의식의 저변에는 인간의 움직임이 있음을 발견하고 있다.
신경시스템이나 두뇌는 움직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동물은 움직이기 때문에 뇌가 있다. 반면에 식물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뇌가 필요 없다. 지나스는 고착성 해양동물인 우렁쉥이류(sea squirt)의 예를 든다. 우렁쉥이의 대표적인 것이 멍게다. 멍게는 동물임에도 마치 식물처럼 평생 바위에 붙어 산다. 따라서 신경망이 거의 없다. 물론 뇌도 없다. 그러나 멍게도 어린 유생기에는 올챙이처럼 자유롭게 헤엄치는 시기가 잠시 있다. 이때에는 주변의 환경을 인지하는 감각신경도 있고, 빛을 감지하는 피부도 있으며, 원시적인 척추도 있고, 당연히 뇌도 있다. 그러다가 성장한 후에 적당한 바위를 찾으면 자신의 머리를 바위에 파묻고 고착된다. 그리고는 평생 같은 자리에서 산다. 따라서 움직일 필요가 없고 뇌도 더 이상 필요없게 된다. 바위에 고착된 멍게는 곧 자신의 뇌와 척추를 소화해서 흡수해버린다. 스스로의 뇌를 먹어버리는 것이다. 멍게의 독특한 사례는 동물의 신경시스템과 두뇌는 움직임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을 명확히 말해주고 있다. (Llinás, 2002, p.17. 그림 참조).
움직임을 위해서는 다양한 종류의 감각정보를 통합(binding)하여 하나의 의미있는 환경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뿐만아니라 내 몸의 상태와 위치 등에 대한 감각정보도 한데 통합되어야 한다. 이러한 내적 외적 정보를 모두 통합하여 하나의 몸이 하나의 세상 속을 살아간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 뇌에게 주어진 기본 임무다. 이를 효율적으로 해내기 위해 뇌는 의식을 만들어 내었다.
뇌과학자 월퍼트 역시 의식의 존재 이유는 움직임에 있다고 본다. 월퍼트는 피험자로 하여금 손이 안보이는 깜깜한 방에서 다양한 조건에서 (저항주기, 도와주기 등)자신의 손을 움직이게 하고 손의 위치를 예측하게 하는 실험을 통해서 내적모델의 존재를 입증했다. 우리의 뇌에는 움직임과 관련된 예측을 계산해내는 내적인 모델이 있다는 사실을 보인 것이다. 특정한 움직임을 하기 전에 우리의 내적 모델은 이미 그러한 행동에 대한 계획을 하고 마음 속으로 흉내를 내어 움직임의 결과(예컨대 내 손의 위치와 속도 등)를 미리 예측한다. 이러한 내적모델 덕분에 특정한 상황에 대해 보다 빠르게 반응할 수 있다. 만약 내적 모델 없이 외적인 자극에 의한 피드백만으로 움직임을 조절한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내적모델은 또한 예측과 결과간의 차이라는 피드백을 제공한다. 이러한 예측의 오류를 수정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은 움직임에 대한 지속적인 학습의 기회를 갖게 된다 (Wolpert, Ghahramani, & Jordan, 1995; Wolpert & Ghahramani, 2000).
내적 모델의 존재는 간지럼 실험을 통해서도 입증되었다. 내가 내 손바닥을 건드리는 것은 별로 간지럽게 느껴지지 않으나 다른 사람이 같은 자극을 주면 간지럽게 느껴진다. 그 이유도 바로 운동-감각 신경과 관련된 예측 모델 때문이다. 내가 내 손바닥에 어떤 자극을 줄 때, 나는 나의 손가락이 움직임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이 자극을 줄 때에는 나는 그러한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간지럽게 느낀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 월퍼트 교수 팀은 스스로 자신의 손바닥을 건드릴 때 로봇팔을 통해서 자극을 주는 실험을 진행했다 (Blackemore, Wolpert & Frith, 1998; Blackemore, Wolpert, & Frith, 2000).
로봇팔을 통한 자극이 실시간으로 전해질 때에는 간지럼을 느끼지 않았으나 시간차를 두고 전해질 때는 간지럼을 느꼈다.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상황이지만, 이러한 자극이 로봇팔을 통해 0.1초 뒤에 전달되자 실시간으로 전달될 때보다 사람들은 더 간지럽게 느꼈던 것이다. 0.2초 지연은 더욱 더 간지럽게 느꼈으며, 0.3 초 지연되어 전달되는 자극은 다른 사람이 간지럽히는 것과 거의 비슷정도로 느꼈다. 시간의 지연은 자극이 내가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남이 주는 것이라고 우리의 뇌는 계산하기에 간지럽게 느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시간의 지연뿐만 아니라 자극의 방향을 바꿔서 전달하는 실험 역시 결과는 비슷했다. 자극의 방향을 30도나 60도 정도 틀어서 전달하면 더 간지럽게 느꼈으며, 90도로 틀어서 전달되는 자극은 마치 다른 사람이 간지럽히는 것과 비슷한 정도로 느꼈다. 이러한 실험은 내가 나를 간지럽히느냐 아니냐가 간지러움의 정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특정한 자극에 대해 우리의 뇌가 얼마나 예측할 수 있느냐가 간지러움의 정도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상황에서도 그러한 자극이 시간차를 두고 전달되거나 방향을 바꿔 전달되면 그러한 자극은 우리의 뇌가 예측하는 것과는 다른 감각신호를 주기 때문에 간지럽게 느끼는 것이다. 손바닥 간지럽히기 실험을 통해 월퍼트 교수는 또 한번 움직임과 자극에 관한 예측을 담당하는 내적모델이 우리 안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지나스나 월퍼트처럼 뇌과학자들은 뇌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가 움직임에 관한 "예측"에 있다고 본다. 자신의 움직임의 결과를 예측해야만 효율적인 움직임을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측은 물론 예측 오류를 최소화하려는 능동적 추론의 기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움직임에 대한 의도와 움직임을 위한 능동적 추론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인간의 뇌가 발전시킨 독특한 기능이 바로 의식(consciousness)이다.
우리가 움직이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다. 우리의 뇌는 여러 감각기관들이 제공하는 다양한 정보를 통합(binding)하여 움직임이 일어나는 환경을 하나의 세계로 파악한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움직임을 통제하고 조율하고, 움직임의 결과를 예측하는 주체가 떠오르게 되는데 그것이 곧 자아의식 또는 셀프다. 지나스는 "중앙화된 예측"(centralized prediction)이 곧 셀프의 본질이라고 본다. "나"는 예측하고 행위하는 존재인 것이다.
행위에 대한 예측과 결과에 대한 의미부여는 의식에게 과거와 미래라는 개념도 갖게 한다. 시간의 축이 선험적으로 먼저 존재하고 그 맥락속에서 행위를 한다기보다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추측과 스토리텔링이 과거와 미래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이다. 의식 없이는 시간도 없다. 시간은 스토리텔링의 산물이다. 시간이나 공간은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인 것도 아니고 문화적으로 보편적인 것도 아니다. 지구상 언어의 절반 가량이 과거나 미래형 시제가 없다. 예컨대 아마존 지역이나 호주 원주민 부족들은 사물이나 사건으로부터 독립된 시간의 개념이 없다. 이들 문화에는 사건이나 사물의 순서나 관계만이 있을 뿐 별도로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다. 시간이나 공간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경험에 대한 뇌의 모델링의 결과라 보는 것이 옳다(Buzsáki & Llinás, 2017). 사실 인류가 국가적으로나 전세계적으로 단일한 시간이라는 개념을 공유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전파 매체가 생겨난 이후의 일이다.
물리학자 란자가 간결히 요약하고 있듯이, 시간이나 공간은 물리적이고도 객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인간의 의식이 창출해낸 생물학적인 실체다 (Lanza & Berman, 2009). 물리학자인 란자에 따르면 우리가 경험하는 사물은 물론이고, 그러한 사물이나 사건이 존재하는 시간이나 공간마저도 우리의 의식에 의해서 생산된 매트릭스다 (Lanza & Berman, 2009). 하나의 생명체는 그 자신이 이 우주의 중심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각각의 생명체는 자신이 존재하는 우주를 구성해내며 따라서 그 우주에서는 자신이 중심이다. 이것이 윅스퀼이 말하는 움벨트(Umwelt)의 의미이며 (Von Uexküll, 2010), 깁슨이 말하는 어포던스의 의미다 (Gibson, 2014). 존재하는 것은 지각하는 주체와 지각대상의 상호작용의 결과물인 "지각편린(percepts)"뿐이다.
인간이 세상을 지각하는 것은 항상 행위를 전제로 해서다. 움직임이 지각에 선행한다. 행위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 움직임의 가능성을 유발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지각하는 방식과 지각의 범위가 결정된다. 움직임의 기반인 의식이 어포던스를 통해 움벨트를 생산해내어 대상을 지각한다. 그것이 의식의 본질적인 기능이다. 움직임은 몸을 통해 일어난다. 그래서 몸은 지각의 장(field of perception)이 된다 (Merleau-Ponty, 2013).
과거나 미래 역시 실체라기보다는 인간의 의식이 움직임을 위해 창출해낸 일종의 개념적 틀이다. 과거나 미래는 실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무한히 펼쳐지는 지금-여기 뿐이다. 삶은 항상 지금-여기에만 존재한다. 움직임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의 모든 움직임은 항상 현재 지금-여기에서만 펼쳐진다. 지금-여기에 현존하는 한 어떠한 예측도, 예측의 오류도, 스토리텔링도 없다. 온전한 움직임과 생명만이 존재할 뿐이다.
움직임과 공간
움직임은 물론 공간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이 공간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움직임을 통해서다. 공간은 그 자체로서는 인지되거나 경험되어지지 않는다. 공간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사물과 그 사물의 움직임을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공간에 대한 감각을 생성해낸다. 움직임의 가능성이 공간을 생성시킨다. 의식이 움직임의 가능성을 공간으로 추론해내는 것이다. 빈 공간에 대해 손바닥을 대고 마치 투명한 벽에 막혀 못 움직이는 것처럼 행동하면 그것을 보는 다른 사람들은 그 공간에 투명한 무언가가 있다고 저절로 느낀다. 뇌는 그렇게 추론하는 것이다. 타인의 움직임을 통해 나의 움직임의 가능성을 알아차리고, 그에 따라 공간의 한계와 구조를 뇌 안에서 능동적 추론을 통해 구성해낸다.
이처럼 공간은 움직임이 만들어낸다. 공간이 있기에 움직일 수 있다기보다는 움직일 수 있는 여건을 공간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공간은 아무것도 없이 텅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주에 텅 비어있는 공간이란 없다. 우주는 에너지로 가득차 있다. 물질과 반물질, 에너지와 다크에너지로 가득차 있다. 우주에 아무것도 없음이란 없다. 텅빈 공간이라는 것은 움직임의 가능성에 의해 구성된 개념이다.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을 공간이라고 추상화할 뿐이다. 즉 움직임과 움직임의 가능성이 공간을 만들어낸다. 움직임이 전제되지 않는 공간이란 없다. 마치 시각중추가 전제되지 않는 빛이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청각 중추가 없이는 소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공간을 공간 자체로 이해하기란 어렵다. 소리 없이 고요함을 고요함 자체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소리의 경험이 있어야 고요함을 알아차릴 수 있다. 소음이 문득 끊길때 비로소 고요함을 느낄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물에 대한 경험의 부재가 공간의 경험을 만들어낸다.
고요함과 공간은 우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 속에도 있다. 마음 속의 고요함과 공간 역시 내 마음속을 휘젓고 다니는 시끄러운 소음이나 둥둥 떠다니는 사물과도 같은 것들의 경험을 통해서만 느껴진다. 그러한 마음 속의 소음이나 사물에 대한 격렬한 경험 후에 문득 그러한 소음과 사물의 부재를 느낄때 마음 속에서의 고요함이나 텅빈 공간감이 느껴진다. 마음 속의 소음이나 사물이 바로 생각과 감정이다. 소용돌이치는 생각과 감정이 문득 사라지는 상태, 혹은 그 격렬한 소용돌이 가운데에 있는 태풍의 눈과도 같은 고요한 상태에서 내면의 고요함과 공간감이 떠오른다. 바로 이것이 진짜 "나"다. "나"는 고요함과 공간 그 자체다. 사물이 있어야 그 사물이 가리고 있는 공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소음이 있어야 그 소음이 가리고 있는 고요함을 알아차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생각과 감정이 있어야 그 생각과 감정이 가리고 있는 배경자아를 알아차릴 수 있다. 복잡한 생각과 격렬한 감정은 고요하고 텅비어 있음의 순수한 배경자아로 안내하는 이정표다.
후썰과 헬름홀츠는 서로 방법론적으로는 다르지만 상당히 서로 보완적인 방법으로 움직임과 지각의 관계에 대해 면밀한 분석을 시도했다. 이들은 분석은 인간의 움직임, 지각, 인지라는 기본적인 기능들이 본질적으로 서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Sheets-Johnstone 2012). 이 세가지 기능을 통합시키는 것이 곧 의도(intention)와 주의(attention)고, 일련의 의도와 주의들의 끊임없는 생산과정이 곧 의식이다.
"움직임은 정지되어 있음(stillness)이 없는 지속적인 고요함의 현존(continuing presence of silence)다. 고요함은 그래서 다이내믹하다. 역동적인 호흡이 그 고요함을 관통한다. 살아있는 전체로서의 몸의 역동성이 고요함을 관통한다. 그 역동성은 살아있는 의미이고 몸으로 느껴지는 공명이며 몸에 의해서 드러나는 공명이다... 그렇기에 움직임의 고요함은 강력한 힘을 지닌다...아리스토텔레스는 움직임을 공동체적인 의미(sensu communis) 즉 상식 (common sense), 즉 당연한 의미의 결정체라 보았다. 움직임에 닻을 내리고 있는 몸의 기호학은 존재론적인 의미를 드러내며 이러한 움직임의 기호학이 곧 인지적 기호학의 기반이다". (Sheets-Johnstone, 1999).
움직임은 근본적으로 몸에 관한 것이기에 현대 철학자들도 몸의 기호학을 통해 움직임을 인간 본성의 근원으로 보고 있다. 데카르트가 "인지" 혹은 마음을 인간 본성의 기반으로 본 반면에, 메를로퐁티는 몸과 지각을 인간 본성의 기반으로 보았다. 이제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철학자들은 몸의 움직임 자체를 인지와 지각과 통합하여 인간 본성의 기반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Sheets-Johnstone, 1999). 움직임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철학뿐만아니라 생물학과 진화론적 관점에도 매우 중요한 분석의 틀을 제공하며 뇌과학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