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나, 깨달음의 기록
'바라봄 그자체가 되어보라'
'걸음 그자체가 되어보라' 라는 말들을 떠올리며 계속해서 걸었다.
참나의 상태가 무엇인지 깨닫고자 했지만
개념들이 와닿지 않았고 알듯 말듯한 상태였다.
그러다 척수성(隻手聲)을 떠올렸다.
두손이 맞닿아야 비로소 박수로 완성되듯
내가 대상을 바라보아야 관찰이 완성된다.
여기서 문득 지금까지 ‘나’라는 주체에 갇혀 사고했다는것을 깨달았다.
내가 바라본다. 내가 듣는다. 내가 기쁘다. 내가 우울하다 등등
항상 주체가 ‘나’였다.
그리고 언어가 사고를 제한하듯
나라는 이 주체가 나를 이고안에 가둬놓았다는 생각이들었다.
나무를 바라보는 예를 들어보면,
내가 나무를 바라본다.
이 문장에서 ‘내가’ 부분이 힘이 실렸었다.
내가 나무를 바라본다.
마치 내가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체인 마냥,
그렇지만 실상은 어떠한가?
나라는 존재는 사실 미미한 통제권만을 가질뿐이었다.
그저 눈꺼풀을 뜨고 감는 정도?
떠진 눈에 보여지는 대상을 내가 정할수 없으며
그 세부적인 눈의 신경 작용등을 통제할수 있는것도 아니었다.
즉, 지금까지 난 내가 이 바라봄 행위에 큰 통제권이 있다고 착각했고
그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주체가 된 마냥 사고해왔다.
그렇다면 대상인 ‘나무’는 어떠한가?
내가 나무를 바라보는것인가?
나무가 나에게 보여지는것인가?
혹은 이 두 행위가 마치 양손마냥 부딪혀서 비로소 바라봄이 완성되는것인가?
여기까지 사고가 전개된 후
모든 행위에 ‘나’와 ‘대상’을 제거해보았다.
나는 나무를 바라본다 > 바라본다.
나는 너에게 화가난다 > 화가난다.
나는 운동장을 걷는다 > 걷는다.
내가 여자친구에게 선물을 준다 > 선물한다.
그러니 비로소 그 행위, 상황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 어떤 감정이 섞이지 않은 그대로 마주하게 되었다.
바라봄, 화남, 두려움, 슬픔, 기쁨, 우울함, 즐거움, 걸음, 베품
이 모든 것들에 ‘나’라는 필터를 없애버린 느낌이랄까?
그전까지 온갖 다양한 색과 크기등 각기 다른 형체였던 것들이
놀랍도록 무채색에 그저 똑같아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더 쉬운 예를 들어보자면
우리가 친구를 만났는데 친구가 몹시 스트레스받는 상황에 있다고 해보자
그 친구는 감정적으로 그 상황을 설명하며 이야기를 한다.
헌데 그 이야기를 듣는 나는 어떠한가?
소위 말해 강건너 불구경하는 마음 아닌가?
열심히 듣고 공감하고 나름의 조언도 해줄지언정
진정 그 상황속에서 똑같이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는다.
바로 이 느낌이 ‘나’라는 필터를 없애고 세상을 봤을때의 느낌과 비슷하다고 설명하고싶다.
갑자기 그 모든것이 사라진것도 아니고 변한것도 아니다.
사실 그 모든것들은 항상 그대로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단지 내가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았냐의 차이일 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것들이 어린시절 입던 옷이라 비유하면
나는 이미 몸이 성장하여 이 옷들이 맞지 않음에도 굳이 그 옷을 입고 다닌것만 같은,
내가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의 모든것은 이미 조화롭고 완벽하다.
'슬픔' '우울' '두려움' 같은 것들은 아닐것 같다고?
그렇지 않다.
만약 당신이 그것들에 대해 다른 느낌과 이미지 감정등이 떠오른다면,
그것은 당신이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살아온 껍데기의 필터가 만들어낸 환상일뿐이다.
'슬픔' '우울' '두려움' 조차도 '행복' '기쁨' 같은것과 다르지 않다.
지금 당장 이글이 와닿지 않고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려도 괜찮다.
마치 '트루먼쇼'의 주인공 짐캐리가 하늘에서 떨어진 조명을 보며
자신의 세계에 의심을 품기 시작하고 그렇게 균열이 시작되듯
그 균열이 결국 당신을 참나의 길로 이끌것이다.
기억하라
당신은 트루먼쇼의 주인공이 아니다.
당신은 전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