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여있는 의식이 아니며 끊임없이 변하고 흐르고 있음을 깨닫다.
20대의 나는 고양이를 좋아했다.
“난 개보다 고양이가 좋더라”
“고양이 기르고 싶어”
“난 고양이가 좋아”
당시의 내가 종종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30대의 나는 고양이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분명 고양이는 그대로인데
그들을 향한 내 마음은 변해왔다.
그럼 내가 규정하고 인식하는 소위 '나'라는 사람은
그대로인게 맞을까..?
고양이에대한 내 인식변화를 떠올려보면,
먼저 유년시절 아빠가 들려주신 이야기가 생각난다.
젊은시절 월남전에 참전하신 아빠는 본인이 당시 그곳에서 겪은 경험으로 인해
고양이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복수를 하기도 하는 영악한 동물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계셨고
그로 인해 어린 나에게도 부정적인 인식이 새겨졌다.
성인이 되어 고양이에 대한 인식이 변했다.
언제부턴가 미디어에서는 자기 신념대로 남 눈치 보지 않고 마이웨이식으로 살아가는 캐릭터들이
호감의 이미지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들의 모습을 쿨하다 느꼈고 그 삶의 방식이 닮고싶어졌다
이때를 계기로 고양이란 동물에 대해 재정의를 하게 된듯하다.
왜냐하면 고양이의 모습이 그러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가지고있는 이미지를 빌려 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잘 표현하고자 했다.
즉, 인정욕구를 표출하는 대상으로써 고양이가 가진 이미지를 좋아했을 뿐
난 고양이란 동물을 순수하게 좋아한적이 없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캣맘들과 해당 사유지의 주인들 사이의 사회적 갈등 사태와
무분별하게 번식된 길고양이들이 생태계교란종이란 사실등.
다시한번 고양이에 대한 내 인식은 변했다.
고양이가 많은 카페에가도
고양이를 귀여워하는 사람을 봐도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고양이는 변했는가?
아니다.
고양이는 항상 그대로였고
대상을 바라보는 내 시각이 변했다.
이러한 생각의 전개는 나와 남이라는 뚜렷한 구분에
균열을 내고 흐릿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제 또다른 질문을 던진다.
그럼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긴 하는가?
나인줄 믿어 왔던 의식, 관념들이 흐르는 물과 같이 계속해서 바뀌고
생물학적으로 내 몸을 구성하는 세포조차 끊임없이 변하는데,
고여있는 물인줄 알았던 내 의식이 흐르면서 다른물로 채워진다면
이 근원은 무엇인가?
이 흐름을 따라가면 무언가 더 거대한 흐름이 있는건 아닐까?
거대한 우주, 전체, 신, 양자장 혹은 그 무언가..
정확히 규정할수 없는 미지의 영역
결국 생각은 무언가 더 큰 존재나 흐름으로 이어진다
중요한것은 나라는 존재는 내가 만든 환상에 가까울뿐 존재하지 않는다는것이다.
위의 사고과정을 통해 나와 세상의 구분이 흐릿해지면서
나라는 존재의 단단한 철갑옷에 금이 가버렸다.
내가 나라고 굳게 믿고있던 고인 물은 사실 흐르고 계속해서 변화해왔고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더 큰 흐름만이 존재 한다.
그 큰 흐름이 곧 나이고, 나외에 모든 사람들이고, 세상이다.
그리고는 의문이 생겼다.
내가 지금까지 알던 나로 살던, 전체로 살던
무슨 차이인건데?
내가 전체임을 깨닫는것이 곧 현재를 사는것이고
인생을 행복하게 살수 있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사과 농사를 하는 농부에게 사과를 갉아먹는 곤충들은 눈엣가시나 다름없다.
하지만 농부의 시선이 아닌 전체의 시선으로 본다면 이또한 자연스런 조화일뿐이다.
굳이 농부의 예시를 들것도 없이
우리 모두는 남의 일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 할수 있다.
소위 말해 강건너 불구경하듯의 마음가짐을 유지할수 있는데
그 같은 일이 나에게 일어나면 십중팔구 그러지 못한다.
그렇지만 당신이 전체임을 깨닫는다면
더 넒고 거시적인 시각으로 들여다본다면,
전체의 시점에서 농부의 사과와 곤충은 큰 조화이며
내가 아닌 남에게 일어난일에 초연함을 유지하듯
나에게 일어난 일또한 그렇게 바라볼수 있다.
그렇게 되었을때
당신은 비로소
과거나 미래에 얽메이는 것이 아닌
진짜 당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수있게 되는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또한
자신이 지금껏 알고 지낸 자신에 대하여
사유할수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