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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경혜 Jan 27. 2022

빨강머리 앤의 위로.

이 세상 모든 만화여 영원하라!




빨강머리 앤은 좋아하는 사람을 찾기보다 싫어하는 사람을 찾기가 더 힘든, 여자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만화영화이다. 게다가 내게는 빼빼 마른 데다가 주근깨가 있었고 머리는 붉은, 딱 미운 오리 새끼 같던 어린 시절이 있었으니 앤을 사랑하지 않기란 어려웠다. 머리가 붉어서 염색했냐는 오해를 종종 사기도 했던 중학교 시절까지 나는 꼭 앤 같아서, 예쁘지 않아도 괜찮은 자부심을 느꼈다. 딱히 공부에 몰두하지 않았지만 왠지 바빠야 할 것 같던 고등학생 시절을 지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나게 놀았던 대학생활 동안 앤은 내 기억에서 잊혔다. 그러다 뜻하지 않게 인생에서 손꼽을 정도로 힘들었던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 기억 속에 묻혀있던 앤을 다시 만났다.


서울에서 회사생활을 하며 3년 동안 모은 돈을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하기 위해 쏟아부은 적이 있다. 학원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허름한 슈퍼 2층에 원룸을 얻고 자전거로 오가며 공부에만 매진했다. 벌어놓은 돈은 빠듯하게 한정되어 있었지만 재료비와 학원비 생활비는 끝없이 들어가는 통에 오래전에 들어놓은 청약통장을 나보다 더 아쉬워하며 동그랗게 뜬 눈으로 만류하는 은행원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깨버렸고 부모님에게 염치없이 자주 손을 벌렸다. 설상가상으로 그 당시에는 제대로 된 병명을 몰랐던 공황장애까지 와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며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돈은 턱없이 부족하고, 내가 사는 슈퍼 2층은 취객들이 자주 오가는 길목에 위치해 연신 주위를 살피며 어둠이 내리기 전 후다닥 집으로 뛰어 들어가던, 불안하고 경직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2층에 있는 방들은 모두 5개 정도였는데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당최 알 수 없는 기이한 느낌의 어두운 복도가 있는 낡은 건물이었다. 한밤중에 경찰들이 들이닥치는 듯한 소란스럽고 무시무시한 소리가 같은 층 어느 방인가에서 들리기도 했다. 나는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문을 확인하고는 했는데 어느 날은 취객이 2층까지 올라왔는지, 아니면 그곳에 거주하던 누군가가 취해서 방을 착각했는지 내 집 문을 한동안 두드리고 벌컥거렸다. 그 저녁인가 밤에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을 기도하며 울었다. 그런 곳에서 불안한 몸과 마음으로 2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되어서까지도 나를 위로해주었던 만화, 빨강머리 앤 덕분이었다. 왜, 어느 때부터 앤을 떠올렸는지 정확한 시점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 겨울 공부가 끝나면 냉골인 자취방에 들어와서 옷도 벗지 않은 채로 전기장판을 켜고 컴퓨터 파일로 소장하고 있던 빨강머리 앤을 틀어놓고 이불속에 쏙 들어가 몸이 녹을 때까지 앤을 보았다. 그럼 꽁꽁 얼어 한기가 가득한 자취방에 따뜻한 기운이 스며들었고 나를 뻣뻣하게 지탱하던 불안과 두려움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빨강머리 앤 이라는 만화가 지니고 있는 따뜻하고 밝은 기운이 건물의 어둡고 음침한 기운을 멀리 쫓아버리는 듯했다.


매튜 아저씨와 마릴라 아줌마, 앤은 옹기종기 난로에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하고 밥을 다 먹고 나면 아저씨와 아줌마는 차를 마시고 앤은 수학 문제를 풀며 오늘 있었던 일을 재잘거린다. 그 곁에 나도 앉아 따뜻한 눈 맞춤을 나누며 차를 홀짝이고 앤의 수다를 듣는다. 나는 김이 퐁퐁 나는 부드러운 거품 욕조에 몸을 담그듯 앤의 밝고 명랑한 세계 속에 푹 빠졌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녹이고 나면 다시 차갑고 낯설게만 느껴지던 서울 생활을 견딜 힘을 얻었다. 빨강머리 앤 뿐만 아니라 그 시기에 본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들, 벼랑 위의 포뇨, 귀를 기울이면, 센과 치이로의 행방불명 등도 언제나 마음을 몰랑몰랑하게 만들어주는 묘약이다. 그 차갑고 어두웠던 시기를 무사히 지날 수 있게 해 준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없었다면 과연 내 삶에 지뢰처럼 존재하는, 나를 무너뜨리려고 호시탐탐 노리던 그 시기들을 잘 지나올 수 있었을까? 지금도 마음에 삭막하고 메마른 바람이 불 때면 앤의 따뜻하고 밝은 목소리가 주는 마법을 느끼고 싶다. 마릴라 아줌마와 매튜 아저씨를 만나서 말없이 차를 마시고 그들이 사는 초록 지붕 집에 하염없이 앉아 있고 싶다. 앤의 2층 방 창가에 앉아 오래도록 풍경을 바라보고 싶다. 오래전 소설로 만들어졌던 빨강머리 앤이 지금까지 다양한 버전으로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은 누구나 거칠고 친절하지 않은 이 세계를 견딜 따뜻함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 속 어딘가에 보물처럼 깊이 묻혀있던, 내게 여전히 남아있는지 미처 알지 못했던 여리고 투명한 마음을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시대를 초월해서 지금 여기 내게도 전해지는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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