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사치일까?
강화도의 북스테이를 왔다. 인생 첫번째 연차를 북스테이에 이틀 태웠다. 이전에 남아도는 시간 속에서 북스테이를 가는 것과 지금의 연차를 써서 북스테이를 가는 것, 막상 떠나면 더 잘 써야할거 같고, 더 잘 놀아야할 것 같고, 그런 부담감에 사로잡히지 않을까 싶었지만, 막상 그렇지도 않다. 그냥 오랜만에 잘 쉬고 배불리 먹고 여기저기 치이지 않고 그냥 나만의 리듬 속에서 지내다 온 것 같다.
커피맛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에 대한 동경이 계속 있어왔다. 인생의 여러가지 재미로 드러나는 것들 중에 하나는 커피이다. 음악, 문학, 예술, 운동 등 현실 속에서 내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일들에 대한 갈망이 있어왔다. 단순히 일만 해가고 그냥 인생의 숙제처럼 여러 과제들을 해나가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20살까지 그런 삶을 살아온 것에 대한 반발일까. 그래서 멋진 커피맛을 즐길 줄 아는 사람으로 살고자 커피를 여러번 시도해봤지만 마실때마다 오히려 머리가 뿌얘지는 느낌을 받는다. 커피 부분은 포기해야 할까.
강화도는 이전까지 가본 지방 도시들과는 또다른 느낌이다. 어쨌든 곧 부산의 인구를 추월할 예정인 대도시 인천이 근접해 있어서일까. 젊은 사람은 인천으로 출퇴근도 가능할 것 같다. 속초, 군산, 파주처럼 인접한 대도시가 없는 지방 도시들은 그 안에서 관광, 산업을 유치하려고 애쓴티가 나지만 강화도는 그런대서 좀 자유로운 것 같다. 강화도는 관광객으로 붐비는 도시는 아닌 것 같다. 딱히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애쓰는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그런지 억지스러운게 별로 없다는 점은 장점이다. 그리고 앞으로 10년 20년 뒤에는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기대 된다.
강화도에서 서가명강이라는 책 시리즈를 접했다.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얉은 지식의 확장 버전이라고나 할까. 지적대화를 위한 조금 더 넓고 조금 더 깊은 지식이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저런 책을 다 읽어본다면 내 진로를 정하는데에 훨씬 수월할 것 같은데. 2024년 젊은 작가상 수상작을 읽어봤다. 여기서 교양고전읽기를 가르치는 선생님에 관한 소설이 있다. 결국 내 직업의 세계도 저렇지 않을까 싶다. 비물질적 가치를 쫓는답시고 열정을 불태우다가 그 결과를 보고 자조섞인 한숨을 내쉬고, 그러다가 다시 본래의 나로 돌아가 열정을 불태우고 다시 자조섞인 한숨을 내쉬고. 그러다보면 30년 뒤에 내가 일을 그만두고 난 뒤에, 바뀐 대한민국 사회의 모습에 좋든 나쁘든 일정부분 내가 기여한게 나타나겠지. 그래도 그 열정의 결과가 조금이라도 드러났으면, 결과를 보고 한숨을 내쉬는 일이 조금이라도 적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직업을 선택했지만 결국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
음악이 멈춘순간 진짜 음악이 시작된다는 책을 읽었다. 음악은 정말 아는만큼 보이는 것 같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말이다. 베를린 필하모니를 보러갔을때 속성으로 3시간동안 읽었던 오케스트라 악기에 관한 책이 큰 도움이 되었다. 처음에 악기에 대해 세세하게 아 이 소리를 이 악기구나, 이 악기를 여기에 배치하고 이 정도 강도로 들어오게 하다니 정말 기가 막힌 배치다. 이런 생각으로 시작돼 점차 근 오케스트라 전체의 조화를 생각하고 그러다가 음악에 몰입하게 된다. 하지만 여유가 없을때에는 음악에 총체적으로 녹아들지 못한다. 아마 감정에 휘둘려서 내가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입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편이기 때문인 것 같다. 음악에 오로지 내 몸을 던져놓는다면 이후에 내가 해야 할일을 제대로 못할 수도 있고, 그 감정에서 다시 평정심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내게 음악은 내가 온전히 안전을 보장받고 주위를 경계하지 않을때 작용하는 분야인것 같다. 그 외에 음악은 나에게 기분전환을 위한 도구적 수단 그 이상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퇴근 후에 값비싼 오케스트라 공연에서도 잠을 참지 못했던 것이다.
유행이라던 쇼팬하우어의 철학 책을 외면하다 외면하다 읽어보았다. 이런 사상도 있을수 있겠다 싶으면서도 그런 사상이 유행처럼 번저나가고, 그 사상에 위로받는 대한민국이 좀 안쓰러웠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 혹은 우울증에 빠질 것 같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일년에 책한권 읽기도 바쁜 우리나라에서 힘들고 치이는 삶으로 인해 우울증에 걸린 이들을 위로하는 목적론적인 철학이 마냥 바람직한 거 같지는 않았다. 목적론적으로 철학을 접하면 그 철학에 몰입하게 돼 자유로운 사유 중 하나인 철학이 아니라 정답을 찾는 철학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는 것에는 정답이 없고 우리의 역량상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 내면적 어려움을 알지 못하고 좋은 모습만을 보게된다. 나는 정말 괜찮은가? 나는 진짜로 지금의 삶에 만족하는가?를 항상 물어보면서 지내다보니 이기적일수 있지만 나 자신의 삶은 잘 지켜나가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안좋아질거 같으면 아직까지는 그 일을 잘 조절하고 정화하면서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 틈은 마련해놓고 있다.
감정은 내가 괜찮은가 되물을때 한번씩 꺼내서 살펴봐야한다. 우리의 진짜 감정은 단단한 겉껍질 속에 쌓여있다. 평소 감정을 자주들여다 보는 사람은 그 겉껍질을 좀더 자유롭게 통과해서 드나들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감정이 썩어가는지 알지 못한채 그 겉껍질만 보고 판단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 감정은 결국 내 감정이다. 어떻게 하면 내 감정이 좀 더 깨끗해지는지, 어떻게 하면 잘 자랄수 있는지는 나만 아는 문제이다. 그렇기에 감정과 상호작용하고 의사소통할 통로를 뚫어놓고 지속적으로 방문하면서 그 길을 닦아두는 것은 인생에서 중요한 문제이다. 이 감정이 썩는지 모르고 방치한다면 큰 병으로 이어질 수 있고, 감정과의 상호작용을 놓친다면 삶을 남들과 다르게, 풍요롭게 살지도 못한다. 이성으로 사는 삶은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기계가 오든, 다른 사람이 오든 대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정에 너무 귀기울여서 소통이 아니라 제압된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최악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감정은 휩쓸리는 대상이 아니라 소통하는 대상이다. 감정이 일방적으로 분노를 표출할때면 저어기 멀리 놔두고 스스로 화를 달래게 놔둔뒤에 감정이 대화가 되는 상태가 됐을때 시도해야한다. 감정이 너무 힘들고 슬퍼할때면 몸을 움직여 감정을 뭐가 슬픈지 그 슬픔이 잘 전달되는 형태인지 스스로 반죽하게 한뒤에 시도해야한다. 직관은 모든 판단의 기초가 되지만 직관과 감정이 설치도록 두지 않고 잘 조절되도록 넛지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이성의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