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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 Aug 28. 2020

펼쳐진 정밀검사 목록

이 검사를 다 받아요?

입원 경험이 꽤 있던 나는, 멀쩡한 사람도 환자복을 입혀놓으면 힘이 빠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환자복은 환자를 더 환자답게 만들어주는, 이름에 정말 충실한 옷이다.




복도 맨 끝 방, 1인실에서 남편과 내가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였다. 병실 문이 활짝 열리며 간호사가 들어왔다. 간호사는 나를 보고 "환자복으로 갈아입으셨네요~."하고 웃었다. 그러고는 안내사항이 있으니 내게 데스크로 나오라 말했다.

잘 갔다 오라고 손을 흔드는 남편을 뒤로하고 나는 긴 복도를 지나 간호사 데스크로 향했다.


보통 다른 병원에 입원해보면 병실도 적당히 시끌시끌, 간호사 데스크도 적당히 시끌시끌했는데 이 곳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그냥 내 느낌에 그랬다. 차가운 냉기가 흐르는 병동 이랄까.


데스크에 도착하니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젊어 보이지만 노련해 보이는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일하나님~~ 이쪽으로 오셔서 일단 키랑 몸무게 잴게요."

그녀는 내 손목을 감고 있는 환자 팔찌와 인적사항을 꼼꼼히 확인한 후 몸무게와 체중을 확인했다. 

그 후 그녀는 믿음이 가는 인자한 목소리로 내게 앉으라며 의자를 밀어주었다. 그때부터였다. 길고 긴 질문들과 설명이 이어지기 시작한 것이.


"일하나님, 최근에 수술하시거나 입원한 적 있으세요?"

"10년 전쯤에 어깨 파열로 수술했었고요.. 6년 전엔 폐결핵으로 1년 치료받았고, 4년 전에 폐렴으로 입원했었고... 2년 전엔 소파술 하느라 입원했었고... 두 달 전에는 게실염으로 입원했었어요. 그리고 이번에 소파술 한번 더 받고... 암 확진받았고요"


내 말을 열심히 받아 적던 간호사는 중간중간 "잠깐만요"를 외쳤고 다 적은 후에는 나를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많이 아프셨네요." 하면서.


그 후 가족력에 대해 물었는데 나는 엄마의 병력을 모르니 정확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예전에 한번 친척 누군가에게 '니네 엄마가 자궁암과 유방암에 걸려서 죽을 것 같으니 너희를 찾았다더라.'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아 대충 그렇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간호사는 "아... 가족력이 있으시네요."라고 했다.


많은 질문과 답이 끝나고, 그 외 병동에서 알아야 할 수칙이나 안내사항을 한참 동안 알려준 간호사는 곧이어 무언가 빼곡히 적혀있는 종이를 내밀었는데 그 종이에는 <검사 안내>라고 쓰여있었다.

난 그 종이를 보자마자 얼굴이 굳은 채 "이 검사를 다 받아요?"라고 물었다.

A4용지에는 딱 봐도 10개가 넘는 온갖 검사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청력검사, 유방촬영, 폐기능, PET CT, 골반 CT, MRI, 위 대장 내시경, 경정맥신우조영술, 방광경 등 들어보지도 못한 검사들까지.

간호사는 검사의 필요성을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청력검사는 나중에 항암을 하게 될 경우를 대비해 보는 것이고(항암을 하면 청력이 안 좋아진다 했다.) 그 외 검사들은 전이 여부를 보는 것이라 했다. 상황에 따라 검사가 추가될 수도, 취소될 수도 있다는 것과 검사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30분 가까이 설명을 듣다보니... 나는 이미 지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참 험난하겠구나...


간호사의 설명을 다 들은 나는 "네..."라는 짧은 대답을 한 후 얼굴이 일그러지며 눈물이 나왔다. 

내가 왜 이 자리에 앉아있어야 하는지 기가 막혔다. 이 자리에 앉아있어도 되는 사람이란 없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닐 줄 알았다.

입을 꾹 닫고 애써 울음을 참고 있는데 간호사가 조용히 내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고. 많이 무서우신가 보다... 검사가 많긴 한데~ 힘들지 않게 스케줄 조절 잘해 드릴 거예요."

간호사의 말에 나는 끄윽끄윽 울먹이며 대답했다.

"5살 아이가 있는데.... 갑자기 제가 암이라고 해서..."

"아효... 그러셨구나~"

간호사는 내 등을 조용히 토닥여 주었고 덕분에 진정이 된 나는 감사드린다는 말을 하며 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은 수간호사였고 환자들을 참 아끼는 분이었다.)




울먹이며 병실로 돌아오니 남편이 조용히 말했다. "병동 한 바퀴 돌아볼래?"

오늘은 검사도 없다고 하니 그럼 한번 돌아보자 하고 병실을 나왔다. 

저기에 전자레인지가 있군, 여기는 휴게실이다, 저기엔 야외로 연결되는 곳이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7층을 크게 한 바퀴 둘러보았다. 우리는 같은 공간을 다녔지만 보는 것은 달랐다. 남편은 편의시설 위주로 보는 것 같았지만 나는 병실 위주로 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병실 문 옆에 환자들의 나이가 써져있는 이름표 위주로.


아무리 둘러봐도 내 나이의 환자들은 없었고 대부분 7~80대 어르신 들이었다. 그나마 젊다 생각하는 나이가 50대 전후반 정도.


'내가 참 이른 나이에 암에 걸렸구나. 나도 앞에 숫자가 3보다는 훨씬 높은 숫자였으면 좋겠다. 아니.. 이게 그냥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병실로 돌아왔다.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어 계속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남편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나 애 때문에 자주 못 올 텐데... 혼자 병실에 있는 것보다 다인실로 옮기는 게 낫지 않겠어? 혼자 있으면 쓸데없는 생각만 계속할 것 같은데. 그리고 검사만 받는 건데 1인실에 계속 있을 필요는 없잖아. 수술하면 힘드니까 그때는 봐서 1인실에 있고..."


"... 나도 알아... 내가 뭐 1인실로 오고 싶어서 왔나...병실이 없으니 왔지.."


"그니까. 그럼 간호사 선생님한테 다인실 신청하고 올게. 괜찮지?"


"어. 근데... 다인실 가면 다 암환자 밖에 없으니까 좀 무섭긴 하네... 내 또래도 없던데."


"무서울게 뭐가 있어! 저분들 다 치료받고 계신 건데. 같이 있으면서 이것저것 좀 듣고 얘기 나누다 보면 적어도 외롭지는 않겠다. 너 혼자 있으면 죽는다는 생각밖에 더 하겠냐고."


"알았다고~ 1인실 너무 조용하긴 해. 빨리 가서 신청하고 와..."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다인실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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