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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 Aug 31. 2020

서로를 안아주다

병실 안 사람들

나는 중증환자였다. 서류상 그랬다.

'암환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고 내가 알기에도 남들이 알기에도 그러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였다.

서류상으로 도장을 쾅 찍어놓고도 암세포를 떡하니 받아놓고도 말이다.

내가 암환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오진일 수도 있다는 허황된 희망을 마음 한쪽에 숨겨놓고 있었다.


다인실로 옮기면서 생각했다.

'나는 검사하러 온 것뿐이야. 암이 아닐 수도 있어. 항암을 하고 있는 그들과 같은 대화를 나누지 않을 거야...'


암환자와 같은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순간 정말 암환자가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암환자라는 그룹 안에 빼도 박도 못하게 포함될 것 같아서 무서웠다.


그때까지도 내 마음은 건강한 일반인도 아닌 완벽한 암환자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 놓여있었다.  




6인실로 옮긴 뒤 이틀간은 침대 옆 커튼을 사방으로 쳐놓은 채 병실 안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았다.

다른 환자들은 대부분 항암을 하고 있거나 수술을 받고 온 사람들이어서 대체로 조용했고 가끔 환자들 간의 짧은 대화가 오갈 뿐이었다. 

입원한 다음날은 주말이어서 검사도 많지 않았다. 때문에 초반 이틀 정도는 청력검사나 폐기능 검사 등 비교적 쉬운 검사들만 진행되었기에 병실 안을 왔다 갔다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남편은 회사를 가고 아이를 돌보느라 병원에 자주 오지 못했고 오더라도 점심시간에 잠깐, 퇴근길에 잠깐이었다. 내가 하루 종일 하는 말이라고는 간호사와의 짧은 대화가 전부였다.

그렇게 나는 내 침대, 커튼 안 나만의 작은 공간에 나를 가두었다.


3일째 날이 되고 아이와 영상통화를 끝낸 나는 커튼을 방어막 삼아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휴지로 눈물을 닦고 있는 나를, 지나가던 나이 지긋한 환자가 보고는 살짝 열린 커튼 사이로 말을 걸어왔다.


"젊은 애기 엄마네. 아까 애기 목소리 들리던데... 왜 그렇게 울어요. 밥도 안 먹는 것 같던데. 잘 먹어야지~그래야 힘이 나지."


나는 그 아주머님의 한마디에 둑이 무너지듯 눈물을 펑펑 쏟았다.


"아이가 이제 5살인데 제가 암이라고 해서....."


그때부터 주변의 환자들이 한 마디씩 걸어왔다.

"이제 검사하러 들어온 거구만."

"지금이 제일 힘들 때야. 지금이..."

"그렇지. 지금이 제일 힘들고, 검사 끝나고 결과 들으면 그나마 좀 나아질 거야. 그리고 수술 날짜 잡히면 또 괜찮아질 거고. 아이고~ 지금 얼마나 힘들겠어. 우리도 다 겪어봐서 알아!"

"수술하면 괜찮아져요. 다들 검사받는 시기에 제일 힘들어해. 몇 기 인지 모르니까 무섭지. 차라리 알고 나면 마음이 편해."


그들의 관심에 어느덧 나를 둘러싸고 있던 커튼은 활짝 열렸고, 내 옆의 침대와 내 앞의 침대 그리고 대각선 침대에 앉아있는 환자들은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엄마 같은 따뜻한 목소리로.




처음엔 내게 말을 걸지 않았으면 했다. 입원 경험이 다소 있던 나는 병실 사람들이 종종 말을 걸어온다는 것(내가 먼저 말을 건넨 적도 있다...)을 알고 있었다. 가끔은 지나친 오지랖이나 텃새에 짜증이 날 때도 있었다. 그러니 이번엔 제발, 조용히 있다가 퇴원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생각은 그랬는데 마음은 아니었나 보다.

사실 나는 관심과 공감, 대화가 필요했던 거다. 몰랐는데 그랬다.

그들이 내게 말을 건넨 순간 그동안 쌓여있던 외로움과 설움이 폭발했고,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이 분들은 나를 이해하는구나. 이제 힘들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후에도 병실 안 사람들은 내가 검사하러 갈 때면 아픈 거 아니라고 거짓말도 해주고, 밥을 삼키지 못하는 날이면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추천해 주었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같은 두려움을 이야기하며 남게 될 우리의 자식들을 걱정하고 서로의 마음을 보듬었다.

암환자들의 병실인지라 화기애애 호호하하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 조용함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이해는 충분히 이루어졌다.




어쩌면 그들은 내가 가여웠는지도 모른다.

아이와 통화가 끝날 때마다 울고, 부모는 찾아오지도 않는... 검사 결과를 매번 혼자 들어야 하는 보호자 없는 이 젊은 암환자가 어쩌면 불쌍해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나를 보며 '그나마 나는 아이라도 컸으니 다행이다.'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날 어떻게 보든 상관없었다. 

그 병실에 있는 동안 나는 마음의 위로를 많이 받았고 앞날을 버티고자 하는 의지가 생겼다.

내 손을 꼭 잡고 "수술 잘 받아요. 무조건 잘 먹고." 라 말하며 퇴원하면서도 내 걱정을 해주는 그분들 덕분에.


누군가에게 안기고 싶었던 나를 그들은 안아주었고 괜찮다고 다독여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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