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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 Nov 09. 2020

알쏭달쏭 언니의 세계

그녀는 천사거나 혹은 웬수거나

수술하고 한 달쯤 지나 언니는 조카들 방학을 틈타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내게 말했다. "언니가 현이 봐줄 테니까 넌 그동안이라도 좀 쉬어."


...

하지만 언니가 있는 동안 난 회복을 한 건지.. 화병이 난 건지... 분명 몸은 회복이 된 것 같은데... 계속 뭔가 찝찝한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무뚝뚝한 자매였기 때문이었을까... 싶다.




언니는 나와 내 아이를 보살피기 위해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남편은 서로의 편한 생활을 위해 시댁으로 피해 주었고, 그렇게 언니와 어린 조카 둘, 나 그리고 내 아들까지 5명은 우리 집에서 복작이며 지냈다. 

그들은 별 스케줄 없이 한국에 왔기에 우리는 거의 하루 종일 붙어있었고 아이는 눈뜨면 놀아주는 형과 누나가 있으니 언제나 싱글벙글했다.

언니는 매일 아침 나와 함께 일어나 애들을 씻기고 밥을 먹인 후 내 대신 아이를 등원시켰다. 미국보다 더운 날씨에 언제나 밀짚모자를 꾹 눌러쓰고 집에 도착하면 호들갑스럽게 물 한잔을 들이켰다. 언니의 그런 행동이 우습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오늘은 내가 등원시킬게"라고 했지만 날이 갈수록 아이의 등하원은 언니의 일과가 됐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나는 아침에 일어날 필요 조차 없게 되었다.


나는 집 안에서도 집 밖에서도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집안일은 대부분 언니가 했고 집 밖에 나가게 되면 언니가 내 아이까지 챙겼다.


그녀가 있는 하루하루는 그 어떤 날보다 편했다. '엄마가 있었다면 이렇게 편했겠구나' 싶을 만큼.




나는 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도 통증이 꽤 컸다. 낮에는 괜찮았지만 아침엔 그랬다. 자는 동안 멈춰있던 장기들은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요동을 쳤고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온 몸을 떨었다.

언니는 내가 아침마다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조금씩 예민해졌다. 내 혈색이 안 좋거나 조금이라도 피곤해하면 언니의 인상도 안 좋아졌고 때로는 내가 내 애를 보는 것조차 신경질적으로 말렸다. 니 애 보지 말고 니 몸이나 챙기라고... 아픈 몸으로 애를 챙기니 니가 더 안 좋아지는 거 아니냐고...


가끔은 그런 식으로 정색하는 언니가 싫었다. 말 좀 이쁘게 하면 좋으련만... 언니의 가시 돋친 말에 나도 신경질이 확 올라오고는 했다.

그러나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나를 대하다가도 언니는 이내 담요를 챙겨 와 내게 주었다. "발 시리다며- 담요라도 좀 덮고 있어."


웬수같은 언니가 천사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으르렁대다가도 금방 풀렸고 또 신나게 수다를 떨며 일상을 함께 했다.


나는 언니에게 매일같이 '한국에 온 김에 건강 검진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가라고' 재촉했다. 언니는 처음엔 아주 귀찮아했고 필요 없다고 했다. 아픈 곳도 없고 의료보험도 안되는데 무슨 검진이냐고... 하지만 나는 "언니 앞에 암환자 있다" 라고 말했고 언니는 그런 내 재촉에 이 병원 저 병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던 어느 날 자궁쪽과 유방쪽 검진을 다녀온 언니는 물혹이 몇 개 있다는 소견을 들었다. 병원에서는 '흔한거니 1년에 한 번씩 검진 잘하면 된다'라고만 했기에 나와 언니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형부는 아니었다.

유방에 혹이 있다는 말을 듣고 형부는 미국에서 전화를 걸었다. 언니는 형부와 통화하는 내내 괜찮다고 안심시켰고 살짝 투덜거리며 전화 좀 끊으라고 말했다.


"괜찮다고. 그냥 물혹이 있대, 대부분 갖고 있는 거래... 아니~ 괜찮다니까? 괜찮다고! 암이 되거나 그런 게 아니라고... 그니까 그냥 지켜보면 된대. 1년 후에 다시 검진 하래~ 아 진짜 왜 그래. 병원에서 괜찮다는데 무슨 검사를 또 해. 아 됐어! 끊어. 그만 좀 해."


언니는 거실에, 나는 주방에 있었지만 작은 집에서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나는 언니의 통화를 들으며 '참... 암환자 앞에 두고... 너무들 하네~'라고 생각했고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언니나 형부의 마음도 이해는 되었기에 가만히 있었다.

언니는 통화가 끝난 후 터벅터벅 걸어와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아 계속 투덜거렸다. "아니~ 평소엔 걱정도 안 하면서 오늘따라 왜 저래~"

나는 헛웃음을 지으면서 받아쳤다. "걱정되겠지 당연히, 처제가 암환자인데. 그리고 나 유방쪽에도 암 될만한거 갖고 있는 거 알지? 그러니까 언니도 조심해~ 유방은 유전이 크다는데 내가 있으면 언니도 있을 수 있으니까. 한국 올 때마다 검진하고 미국 가서도 할 수 있으면 꾸준히 하고~ 언니 똥배 너무 나온 것도 이상하니까 난소 쪽도 종종 들여다 보고~ 이번엔 이상 없다니 다행이지만."


...

내가 계속 잔소리를 해대서 그런 건지, 형부가 잔소리를 해대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빈정이 상한 건지, 내 말을 들은 언니는 강한 어조로 내게 냉소적인 말을 내뱉었다.


"나는 암에 걸리면 수술 안 받을 거야. 그냥 죽을 거야. 너처럼 그렇게까지 살고 싶지 않아!"




...

...

언니는 나보다 더 험난한 어린 시절을 겪었다. 그나마 나는 언니라는 방패가 있었지만 언니는 방패라고는 전혀 갖지 못했다. 아빠는 어른들로부터 우리를 지키지 않았고 언니는 어른들로부터 나를 지키느라 아주 많이 애썼다. 내 대신 맞는 것도, 내 대신 구석으로 몰리는 것도 항상 언니였다.


언니는 사는 것이 고달팠을 것이다. 나보다도 훨씬 더. 그러니 삶에 미련이 없을 터였다.

나도 암환자가 되기 전엔 그랬다. 죽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아이를 지켜주고는 싶지만 내가 죽을 운명이라면 아이도 그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암 확진을 받은 날 그 생각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런 생각을 한 것조차 치가 떨리게 후회됐다. 아이 곁에 오래 있고 싶었고 아이가 스무살이 되든 서른살이 되든 그 마음은 변함없을 것 같았다.

내 마음은 '살아있으면 어떻게든 지켜줄게'가 아니라... '엄마가 어떻게든 살아서 지켜줄게.'로 바뀌었다.


하지만 언니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나는 언니가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언니의 모습은 예전의 내 모습과 같았고 삶을 바라보는 눈도 예전의 나와 같았기에..

'죽을 때 되면 죽는 거지, 뭐하러 꾸역꾸역 살아...'

그것은 그동안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는지를, 얼마나 삶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우리들의 극단적인 표현 방법이었다.

아이들에게 엄마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본인은 엄마가 없어서 삶이 매우 힘들었음에도... 그랬다.




나는 언니의 그 시리도록 차가운 말에 희미한 웃음을 보였다. 사실 그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기가 막혔지만 이내 언니의 모습에서 예전의 내 모습이 겹쳐 보여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빌었다. '하나님. 언니가 아직 두려움을 몰라서 그래요. 저 인간이 아파봐야 알겠지만 그렇다고 저처럼 아프게 하지는 말아주세요. 그 두려움 계속 모르게 해 주세요. 암환자는 집안에 한 명으로 족해요.'


속으로 이런 생각들을 하며 실실 웃고 있는데 언니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치마를 걸치고 내게 줄 복숭아를 깎은 다음 아이들에게 먹일 떡갈비를 준비했다. 나는 식탁 의자에 앉아 언니가 준 복숭아를 집어먹었다. 설거지도, 청소도, 요리도 언니의 몫이었다. 뭐 하나 도와줄라 하면 언니는 "놔두고 들어가서 잠이나 좀 자"라는 말을 툭툭 던졌다.


...

나는 그런 언니에게 말하고 싶었다.

'언니는 가끔 천사같아. 근데... 아주 자주 웬수같기도 해... 징글징글한 웬수'

그러면 언니는 내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사돈 남 말 하고 있네...'라고..

그래서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냥...

언니의 세계를 조용히 받아들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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