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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 Jan 16. 2021

암환자가 되기 전엔 몰랐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2019년 3월.

남편이 미국에 온 지 8일째 저녁. 우리는 뒷마당에 노란빛 전구들을 대롱대롱 달고서 바비큐 파티를 열었다.

아이들은 텐트와 트램펄린을 오가며 정신없이 뛰어놀고 형부와 남편은 고기를 구웠다. 그리고 언니와 나는 화로대 앞에 앉아 간지럽게 피어오르는 불을 지켜봤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언니네와 슬프지 않은 짧은 인사를 나눴다.

"다음에 언니가 한국에 오고 그 담엔 내가 또 미국에 오지 뭐. 잘 있어~"




한국에 도착 후 다시 일상이 시작되었다. 아이는 유치원에 입학했고 나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심리상담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센터에 찾아간 날 원장님은 내게 말했다. "뭔가 분위기가 바뀐 것 같아요~ 많이 좋아진 것 같은데요?"

그 후 우리의 상담은 산뜻하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역시... 갈수록 힘들어진 나는 남은 상담 회차를 끝내고 원장님에게 말했다.

"원장님. 저 이제 상담 그만두고 싶어요. 사실 원장님이랑 얘기하는 게... 처음엔 후련하기도 하고, 깨닫는 것도 많아서 좋기도 했거든요. 근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일단 제가 여기서 상담하고 집에 가더라도 이제는 후련하지 않고요... 오히려 마음이 아픈 게 더 크고.. 저한테는 더 상처가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조금 쉬고 싶어요. 너무 지쳐서요... 그리고 미국에 있으면서 느낀 게 있는데, 당분간은 그런 마음을 좀 더 많이 들여다보고 앞으로의 제 감정에 대해 천천히 알아가고 싶어요. 그래서 상담은 여기서 그만두고 싶습니다."


원장님은 내가 말하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실망한다는 사실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내게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다고... 초반에 감정을 깨야 하는 과정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시간을 힘들어한다고.. 그러니 이해한다고. 일단 지금은 쉬고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다른 전문가에게라도 상담을 다시 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후 원장님과 깍듯한 인사를 하고 센터를 나왔다. 아쉬움은 없었다. 더 해야 하나 망설임도 없었다. 그저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상담은 내가 원해서 지속했던 것이 아니었다. 가족에 대한 마음때문에 붙들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내 감정을 아프게 하는 일 따윈 하지 않겠다고, 남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 내가 되겠다고 다짐을 했다.






나는 적극적인 아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소극적인 아이도 아니었지만 나 스스로를 위해 나선 적은 없었다. 

조금은 무뚝뚝한, 나와 관련된 일에는 심드렁했던 나...

누군가 내 흉을 본다는 말이 들려오면 "놔둬~ 어차피 걔는 내가 어떻게 해도 내 욕 할 애야."라고 했다. 또한 나보고 누군가를 따라잡으라 하면 "뭐하러~ 쟤는 쟤고 나는 난데"라고 말하던 나였다.


그러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예민했다.

나보다는 조금 더 얌전한 언니가 동네 애들한테 놀림받을 때 나는 달려가 욕을 퍼부었다. 그들이 나보다 4살이 많든 열 살이 많든 상관없었다. 

조금 더 크고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위축된 아빠가 친척들한테 무시를 당할 때마다 내가 대신 나섰다. 당신들이 해준 게 뭐 있냐고, 우리가 잘 나갈 때는 아빠 돈 다 받아먹고 이제 와서 큰소리냐고 악악 거렸다.

성인이 된 후 회사를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 팀원들에게 불합리한 처사를 하는 간부들과 종종 마찰을 빚고는 했는데 덕분에 '까칠이'라는... 그리고 '쌈닭'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나는 싸움을 싫어했다. 말싸움도 당연히 몸싸움도 싫다. 나는 평화주의자다. 그런데 별명이 싸움닭이라니...


나는 싸우는 것이 귀찮았다. 내게 불합리한 일은 궁시렁거릴 망정 그냥 참고 넘어갔다. 그럼에도 돌아오는 건 쌈닭이라는 평가였다. 남들을 대신해 싸우다 보니 생긴 별명... 근데 나는 무엇을 위해 그리 했던 걸까.

내가 회의실에서 간부들과 싸워대도 팀원들은 고마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팀장인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니는 나보고 예민하다고 했다. 성격이 너무 예민해서 자주 아픈 거라고...

또한 아빠는 내게 말했다. "너는 그 불같은 성격 좀 고쳐~ 사람이 유해져야 사는 게 편한 거야."라고...


결과만 따지고 봤을 때 나는 참 멍청했다. 차라리 생색이라도 냈으면 좋았을 텐데 성격이 그렇지 못해서 남들은 내가 방패막이를 하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러다 보니 나는 그냥 쌈닭이라는 별명 하나 남았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남의 방패막이보다 내 방패막이가 돼야 한다는 것을. 남들 신경 쓰지 말고 내 인생이나 신경 썼어야 했음을...


생각해보면 내게 자신을 책임져달라고 말한 사람은 없다. 누군가 나에게 책임감을 가지라고 말한 적은 있지만 다른 사람의 삶을 책임지라고 말한 적은 없다.

그럼에도 나는 쓸데없이 남들의 상황을 책임지려 했다. 나 자신을 책임지지도 못하는 주제에 남을 책임지려 했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참 답답하다.

 



암환자가 되고 보니 다 부질없었다. 나는 결국 아픈이가 되었고 그들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 

미국에서 지내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불필요한 책임감은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손대지 않아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그냥 놔둬도 내 아이가 알아서 잘 지낸 것처럼.


나는 시댁행사를 다 버리고 미국에 갔었다. 그동안 시댁 일에는 빠진 적이 없었기에 무거운 마음으로 미국을 갔다. 하지만 막상 한국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없는 빈자리는 누군가가 채웠고 내게 뭐라 하는 사람도 없었으니 애초에 걱정할 필요가 없던 일이었다. '나 아니면 어머님 혼자 하시려나' 걱정하던 마음은 말 그대로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때문에 미국에서 깨달았던 것들이 한국에 와서 더 정확해졌다. 

암환자가 아니었다면, 미국에서의 휴식이 아니었다면 깨닫지 못했을 마음들.

'나를 위해 살자.'

'내 마음이 아프지 않아야 몸도 아프지 않다.'

'내가 잘 살아야 아이도 지킬 수 있다.'

'내가 하지 않아도 나를 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여 이제부터 나는 나를 우선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아프면 쉬고, 슬프면 울고, 가고 싶으면 가고, 어쩔 수 없는 일에는 매달리지 않고..



암환자가 되기 전엔 몰랐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하지만 암환자가 되어보니 알겠다. 이 몸 하나 책임지면 되지 남의 인생까지 책임질 필요 없다는 것을.

그래서 내 세계를 지킬 수 있다면 충분히 그래도 된다는 것을.


그러니 이제, 나는 나를 위해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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