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부동산 투어를 마무리하고 근처 카페에 가서 그날 본 집들에 대해 복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선 첫 번째 집은 신축이라 그런지 모든 게 좋아 보였다. 풀옵션이라 냉장고도, 세탁기도 전부 내가 처음 써 보게 될 것이라는 것도 좋았다. (두 번째 집은 생략한다.) 세 번째 집은 넓다는 게 큰 장점이었다. 창이 넓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두 집 모두 괜찮았지만 공통적으로 아쉬운 점도 있었다. 나는 창이 넓고 채광과 풍경이 좋은 집을 원했는데 이 날 봤던 집들은 그와 거리가 멀었다. 사실 이 동네 대부분이 빽빽한 빌라 골목이었기 때문에 맞은편엔 바로 다른 건물이 있어서 창이 커도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고 생활하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하긴, 서울에서 탁 트인 풍경을 가진 원룸 찾기는 힘들겠지? 현실과 이상 사이에 타협하는 마음으로 내 로망은 접어두었다. 그 이상이 고작 '탁 트인 풍경'이라는 것이 조금 서럽고 아쉽긴 했지만.
금액적인 면에서도 고민되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원했던 금액의 상한선은 [보증금 1억, 월세 40만 원 안쪽의 전세/ 반전세]였다. 여기서 보증금은 '중소기업 청년 전세대출'의 연 1.2%라는 파격적인 금리를 통해 빌릴 계획이었으며 그렇다면 월 10만 원의 이자가 추가된다. 이렇게 낮은 금리로 보증금 대출을 받아도 월세와 관리비를 합치면 월 60만 원의 지출이 생기는 셈이었다.
물론 부담되는 금액이긴 하지만 나는 60만 원이 내가 얻게 될 자유에 비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월세뿐 아니라 생활비와 같은 고정적 지출이 더 추가되겠지만 오히려 아껴 산다면 독립 전보다 더 돈을 절약할 수도 있겠다는 낙천적인 생각까지 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나는 거의 매일 외식을 하거나 카페에 갔기 때문에 독립한다면 이 비용을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다만, 같이 고민하던 다른 친구들은 집에 비해, 그리고 내 소득이나 상황에 비해 그 금액이 비싸다고 말했다. 생활비도 내가 대략적으로 추정했던 것보다 더 많이 나올 거라서 돈을 아끼거나 모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선호하는 집도 사람마다 달랐다. 나는 아무래도 첫 번째 집이 신축이라 깨끗했고 텅 비어있었기 때문에 자꾸만 마음이 갔다. 하지만, 오히려 세 번째 집이 현재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라서 가구 배치를 참고하기도 좋고 살기 좋다는 반증이라 믿음직스럽다는 의견도 있었다.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그 당시 나는 한시라도 빠르게 독립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그날 바로 집을 결정하고 싶었다. 부동산 투어는 한 번밖에 안 해봤는데도 생각할 것도, 재고 따질 것도 너무 많아서 이걸 또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여러 조언들이 내 독립 의지를 가로막는 것 같아 예민해졌다. 또 하필 다들 듣고 보니 맞는 말만 해서 안 그래도 차고 넘치는 혼란이 가중되었다. 몇 시간의 치열한 고민 끝에 결국 그날 바로 집을 정해버리자는 계획은 철회했다. 우선 첫째로 두 집이 모두 쏙 마음에 들었던 것도 아니었고, 둘째로 여러 조언들을 조금 더 생각해보기로 했으며, 마지막으로 겨우 두 개 있는 선택지 중에서도 뭐가 더 좋은지 정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니 독립에 대한 확신이 조금 흔들렸다.
나는 어떤 집을 얻고 싶어 하지? → 나는 왜 그런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 내 생각이 틀린 거면 어쩌지? → 나는 왜 나 자신의 선택에 확신이 없지? → 이런 마음으로 독립을 하는 게 맞나? → 내가 독립을 진짜로 원하는 게 맞나? → 나는 뭘 원하는 거지? → 나는 뭐지?
이와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독립하려다가 갑자기 인생과 나 자신에 대한 고민까지 피어오르니 참 헛웃음이 나고 답답할 노릇이었다. 나에게 독립은 생존은 아니었지만 실존의 문제였다. 샤르트르는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했는데 집을 구하는 바쁜 와중에 '나는 왜 사는가?'와 같은 내 존재 이유에 대한 질문에 봉착하니 이렇게 허무할 수가 없었다.
동네와 부동산을 정하느라 부동산 투어를 하기까지도 정말 힘이 들었다. 그래도 투어만 마치면 집을 바로 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왜 독립을 하고 싶은지부터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목표 바로 앞까지 갔다가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