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집을 좀 보려고 하는데요.
부동산에 연락할 때는 친구들의 조언을 듣고 내가 원하는 조건을 문자로 먼저 보냈다.
"안녕하세요. 최근 계약한 B에게 소개받아 문자 드립니다. 전세 자금 대출 가능한 보증금 1억, 월세 40만 원 안쪽의 전세/ 반전세를 구하고 있습니다. O호선 근방 동네에 햇빛 잘 드는 깔끔한 곳이면 좋겠습니다. 주말에 방 보러 갈 수 있는데 가능할까요?"
문자를 보낸 지 얼마 안 되어서 답장이 왔다.
"토요일에 오세요."
토요일 2시로 시간을 잡고 부모님 집에서 1시간 반이 걸리는 동네로 갔다. 부동산 투어는 처음이라 집을 볼 줄 몰랐기 때문에 확인해야될 사항을 주변 친구들에게 꼼꼼히 물어보고 갔다. 집을 보러 간다고 부모님에게도 이야기를 했는데 엄마는 힘들 텐데 조심하라며 응원까지 해주었다.
부동산 중개인 분은 그 지역에서 오랫동안 부동산을 운영해온 할아버지셨다. 그분은 내가 말씀드린 조건에 맞게 여러 집을 찾아두셨고, 할아버지의 차를 얻어 타고 먼저 가장 근처인 첫 번째 집으로 향했다.
첫 번째 집은 이 부동산을 소개해준 A의 집과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빽빽한 골목 속 빌라라서 빛이 잘 들거나 풍경을 즐길 수는 없었지만 깔끔한 분리형 원룸에 신축이라 내가 첫 입주자였다. 방 크기도 넉넉했고 작은 베란다 겸 세탁실도 따로 있었다. 2층이라 큰 필요는 없었으나 엘리베이터도 있었고 건물 보안도 잘 되어있었다. 내 집에 쏘오옥 맘에 드는 집이란 찾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지만 첫 번째에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집이었다. 다만, 가격이 괜찮지 않았다. 보증금 1억에 월세 44만 원, 관리비는 6만 원으로 보증금 외에 월 50만 원의 지출이 필요했다. 우선 신축이라 부담 없이 사진을 남기고 집에 대한 내용을 메모장에 빠짐없이 기록하고 다음 집으로 향했다.
두 번째 집은 보증금 7천만 원짜리 전셋집. 전세 7천만 원짜리 매물도 볼 생각이 있냐고 물어보셔서 마침 첫 번째 집 가격 부담이 있던 터라 흔쾌히 오케이를 외쳤다. 부동산 어플에서도 보증금 1억 미만의 집은 잘 없던데 혹시 좋은 집을 싸게 잘 구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설레기도 했다. 부푼 마음으로 도착한 집은 신축 빌라였던 첫 번째 집에 비해 꽤 낡은 빌라였다. CCTV나 대문 비밀 번호 등 현관 보안 장치도 없었고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그래도 보증금이 저렴하니 이 정도 인프라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우리가 볼 집은 4층이었고 집주인 할머니는 바로 위인 5층에 살고 있었는데 나를 환하게 맞아주며 두 번째 집의 문을 열어주셨다.
그리고 문을 여는 순간 자욱한 안개가 나를 감쌌다. 담배 냄새와 함께 인센스 비스무리한 향 냄새도 진하게 풍겨져 왔다. 신발장까지 겨우 들어간 후 나는 더 이상 그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사람이 사는 집이라고는 생각이 들지도 않을 정도로 짐과 쓰레기들이 현관까지 가득 차 있었다. 신축인 첫 번째 집도 조심히 신발을 벗고 들어갔는데 이 집은 그 누구도 신발을 벗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 신발이 집보다 깨끗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혹시 청소하면 괜찮아지지는 않을까 하며 겨우 정신을 차리고 집을 둘러보았다. 집 자체는 첫 번째 집의 1.5배 정도로 꽤 넓었고 넓은 베란다도 있었다. 심지어 화장실도 넓었다. 하지만 네 사람이 그 집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신발장에서 한 발짝 정도일 뿐이어서 우리는 옹기종기 붙어서 눈으로만 집을 훑었다. 당황한 나를 두고 집주인 할머니가 여러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 사는 아가씨가 명문대생인데 학생 때부터 여기 살았다... 직장도 좋은 곳 구했는데 외국 출장이 잦아서 집을 잘 치우 지를 못한다... 지금 이사할 거라서 짐이 다 나와있는 거다... 도배, 장판은 다 해줄 거니 걱정하지 말아라...'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집에서 나와 다시 차를 탔다. 갑자기 뭔가 나의 신세가 서러워졌다.
그 후 아무 말 없이 마지막인 세 번째 집으로 향했다. 문제의 두 번째 집은 부동산 할아버지가 갖고 있던 매물이 아니라 옆 부동산에서 소개받은 매물이었다. 우리가 집을 보고 나온 후 곧바로 두 번째 집을 소개해준 부동산에서 집은 잘 봤느냐고 전화가 왔다. 집이 오랫동안 안 나가서 집주인도, 부동산도 집이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던 듯했다. 부동산 할아버지는 단칼에 집이 너무 더럽다고 말씀을 하셨다. 역시나 저렴한 집은 이유가 있다.
세 번째 집도 다른 부동산에서 소개를 받은 집이었다. 이번엔 첫 번째 집과 비슷하게 보안이 좋은 새 건물이었고 엘리베이터도 있었다. 3층에 내려서 이번에 볼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작은 창문이 있는 넓은 주방 모습이 먼저 보였다. 이곳도 분리형 원룸이었는데 보통 문 하나로 분리된 곳과 다르게 짧고 좁지만 나름의 복도로 분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복도에는 화장실이 있었는데 작은 창문이 나있었고 세면대와 샤워실이 분리되어 있었다. 이제까지 본 집에서는 모두 샤워기가 완전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았었기 때문에 화장실을 본 순간 너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방의 문을 활짝 열었는데 와! 방이 정말 넓었다. 웬만한 아파트 안방 크기 정도인데 세입자가 킹 사이즈 침대를 두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방이 넓은 게 느껴졌다. 창문도 꽤 컸다. 빌라 골목 특성상 맞은편에 바로 다른 빌라가 있어 시야가 트여있지는 않았지만 넓은 창문으로 햇살이 잘 비쳤다. 방을 천천히 훑어보면서 창문 앞에는 책상을 놓고, 벽 쪽에는 소파를 놓는 그림을 상상했다. 이 집은 보증금 1억에 월세 45만 원, 관리비 6만 원. 첫 번째 집과 마찬가지로 월 50만 원의 지출이 필요했다.
세 번째 집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부모님과 상의해본 뒤 다시 연락드린다고 말씀드리고 부동산을 떠났다. 그 순간 나에게 커피가 절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