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선 미국 영어, 공부는 뉴질랜드 영어, 생활은 호주 영어
요즘 말이 줄었다. 원체 말 많은 내가 말조심을 하기 위해 줄인 거라면 좋겠지만 그것은 아니다. 환경이 변했다. 내가 잘하는 말로는 이곳에서 말할 곳이 줄었다. 지금 이곳은 호주, 그러니까 영어를 쓰는 나라다. 나는 한국어로 말을 잘한다. 영어로는 말을 잘 못한다. 그래서 말이 줄었다. 잘하지 못하는 말을 잘할 수 없어서 말이 줄었다. 하루하루 매일매일 못다 한 말들이 쌓여갔다. 더 이상 쌓아둘 수 없을 정도가 되자 엉뚱한 곳에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 모여진 말들을 글자에 담았다. 그렇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편한 '한글'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면서 말이다. 호주에서 지내는 이야기를 유창한 모국어 실력으로 뽐내곤 하는 데 가끔 겉도는 기분이 든다. 영어권 국가에서 지내면서 '영어'를 빼놓고 글을 쓰자니 뭔가 중요한 게 빠진 느낌이다. 이 답답하면서 갑갑한 기분을 안고 며칠 넘게 고민을 했다. 사실 답은 이미 나와있었다. 엄두가 나지 않아서 망설이고 있었을 뿐이다. 이런저런 환경이 변했지만 제일 큰 변화는 '언어의 변화'다. 생활 속에서 나를 표현하는 방식의 달라짐을 다루지 않고는 지금의 나를 모두 쓸 수 없다. 그래서 이제 내 방의 코끼리처럼 모른 척하고 있던 '영어'를 마주하고자 한다. 그 시작은 나와 그것과의 질긴 인연으로 출발해야 한다.
우선 난 영어를 태어날 때부터 잘 못했고 지금까지도 꾸준히 못하며 지내왔다. (출생지 : 대한민국) 못하기 때문에 피할 수 있으면 모두 피했고 가까이 가지 않았다. 절대 피할 수 없었던 수능시험의 외국어 영역을 제외하고는 입사하기 위해 본 토익이 첫 영어시험이었다. 이것도 벌써 12년 전 일이다. 몇 번만 보면 남들 다 턱턱 넘는다는 900점 문턱도 넘지 못했다. 취준생 시절 유행하기 시작했던 각종 영어 말하기 시험(OPIC, GTELP)도 어쩔 수 없이 봤지만 늘 중간 언저리에서 맴돌았다. 얼핏 보면 그래도 평균은 하는 것 같은데 괜히 엄살 부린다고 볼 수도 있겠다. 아니다. 이게 내 모든 능력을 박박 긁어모아 이룬 최대치이며 최고의 성적이다. 그리고 이런 성장은 불가능이며 기적에 가깝다. 무에서 무언가를 창조하는 일은 그냥 되지 않았다. 이런 있을 수 없는 성장은 특별한 계기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나는 영어의 'ㅇ'자도 모르는 진정한 ‘영알못'이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학창 시절 내게 영어는 암기과목이었다. 무식하게 외워대는 것은 자신이 있었기에 영어 단어만 죽어라 파댔다. 단어 뜻은 알고 있으니 문법과 상관없이 대충 이런 뜻이겠구나 하고 문제를 풀었다. 보기 싫지만 꼭 등장했던 문법 문제는 무조건 3번으로 찍었다. 들어야 뜻을 아는 듣기 문제는 들리지 않아서 자주 틀렸다. 이런 무턱대고 외우기 신공은 수능까지도 동일했다. 영어 공부를 따로 안 하고도 거의 늘 만점을 받는 친구들이 정말 신기했다. 영어를 언어로서 이해하고 있는 외계 생명체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변하는 방법을 몰랐기에 나와는 상관이 없었다. 그저 수능을 마치고 나서 안도할 따름이었다. 이제 영어와 안녕이구나. 앞으로 나와 상관없으니 더 이상 고통받지 않을 수 있겠구나.
대학교를 들어가니 그게 아니었다. 전공 서적은 대부분 원서, 즉 영어로 쓰여 있었다. 영어를 모르면 공부를 할 수 없었고, 공부를 하지 못하니 성적은 잘 나올 리가 없었다. 그래도 방법을 모르니 외워서 버티고 버텼다. 그때도 영어와 사이좋은 친구들이 신기했지만 그게 다였다. 전처럼 익숙한 답답의 시간을 보내다 2년의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교수님이 영어로 강의를 하셨다. 나도 영어로 발표를 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어쩔 줄 몰라하며 부끄러운 순간을 계속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내 인생의 대부분처럼 그때그때 어떻게 대충대충 꿋꿋하게 넘겼다. 그렇게 지낸 시간이 쌓이고 쌓여서 곧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우연한 기회로 마케팅 공모전에 입상해서 해외여행 기회를 얻었다. 내 인생의 첫 해외여행이자 첫 호주 여행이었다. 케언즈부터 시드니까지 대형버스로 한 달 동안 대학생 친구들과 함께 하는 엄청난 시간이었다. 그때 절실하게 느꼈다. 영어가 살아있는 새로운 환경을 접하고 눈이 떠졌다. 더 이상 피할 수 없겠다는 자각을 했다. 영어를 배워야 하고, 영어를 모르면 경험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겠구나 싶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바로 휴학을 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뉴질랜드로 떠났다. 뉴질랜드에서 영어를 말 그대로 '에이 비 씨'부터 배웠다. 유치원을 거쳐 초등학교 수준으로 나아갔다. 난생처음 영어를 제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신기하게도 영어라는 언어가 재밌었다. 쳐다보기도 싫던 문법조차도 하나하나 모두 흥미로웠다. 영어를 알게 되고 사용하며 잊을 수 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때가 내 영어 인생 유일한 성장기였다. 영어를 처음으로 마주한 순간들이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입사를 위한 각종 영어 시험을 치렀다. 태어나 처음으로 영어에 자신감이 붙어 있었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 달렸기에 절대적인 실력과 무관하게 스스로의 당당함으로 필요한 점수를 얻었다. 그 당시 생겨났던 영어 면접도 무리 없이 통과했다. 영어라곤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그 관문을 넘고 취업에 성공했다. 그 강렬한 감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취업 후에도 그 열정을 이어가려고 애썼다. 하지만 환경이 그렇지 않았고 정작 일하는 데는 필요가 없어지면서 쉽게 식어버렸다. 아주 짧게 불타 올랐던 시간은 그보다 더 빨리 사그라들었다. 동인이 없어진 바퀴는 굴러가지 않았다. 가끔씩 맛보는 해외여행이 영어에 대한 유일한 자극이었으나 크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영어에 대한 마음을 접게 만들었다. 해외여행 다니는데 불편함 없으면 되지 라며 손쉽게 내려놓게 되었다.
인생은 참 알 수 없다. 그렇게 다시 멀리 떨어졌던 영어가 다른 경로로 되돌아왔다. 인생의 파트너인 파랑(와이프)이 불타 올랐다. 그녀는 나보다도 더욱 한국 토종이었다. 해외 경험이 전무했다. 나를 만나 다닌 해외여행이 그 시작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영어를 잘하고 싶고 영어로 일하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녀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나는 나만의 이유로 지금 우린 호주에서 생활 중이다.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내가 영어를 쓰는 나라에 살게 될 줄이야. 10년의 학교생활을 통해 미국식 영어를 배웠으나 내겐 무용지물이었다. 시험 잘 보는 방법만을 터득하고 익혔을 뿐이었다. 큰 깨달음을 얻고 떠났던 뉴질랜드에서는 다행히 기초부터 배울 수 있었다. 아쉽게도 내 꿈은 작았기에 결국 기초까지만 배운 뒤 만족하고 멈추었다. 이젠 어쩌다 호주에 온 뒤로는 닥치는 대로 영어와 싸우며 생활하고 있다. 집과 차도 구하고, 아들 유치원과 학교도 보내며 주어진 상황을 쳐내며 버티고 있다.
결국 다시 돌아와서 원점이다. '영어 공부하기 싫어서 평생 피해 다녔고, 지금도 못하는데 살려면 당장 피할 수 없다’라는 구구절절한 사연을 늘어놓았다. 내 영어 인생은 근본이 없다. 뿌리도 없고 기원도 없다. 이리저리 피하며 그때그때 필요해 의해 생존해왔다. 이젠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마주하고자 한다. '영어'에 대해 글을 쓰고자 한다. 근본 없는 내 영어 인생이지만 해보려고 한다. 생활하면서 듣든, 뒤적이는 영어책에서 보든, 과거에 공부했던 게 생각이 나든 무엇이든 꺼내 보고자 한다. 나름의 ‘오 이런 표현은 재미있는데?'라는 판단을 내린 표현들을 내 마음대로 남겨두려고 한다. 그게 미국 영어인지, 영국 영어인지, 호주 영어인지, 뉴질랜드 영어인지 나는 잘 모른다. 실제로 문법적으로 맞는지 생활에서도 정말 많이 쓰이는지 확인되지 않았다. 그저 내 생각과 경험에 의해 기억나거나 인상 깊었던 것을 적어둠을 밝혀둔다.
후퇴도 없고 근본도 없는 무한 직진 <근본 없는 영어 이야기>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