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록Joon Jun 21. 2020

잃어보지 않은 자는 잃은 자를 절대 이해할 수 없다

10년이 흘러서야 호주에서 만들게 된 '집 김치만두'

나는 딱 두 번 장모님을 만나 뵈었다. 한 번은 연애 초기 인사동에서 무척이나 어설펐던 첫인사 자리에서, 마지막은 1년 뒤 소천하시기 바로 직전 임종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1년 뒤에 파랑과 결혼을 했다. 결혼 준비부터 신혼생활, 그리고 임신부터 출산, 육아와 워킹맘으로의 생활까지 이 모든 것을 파랑은 혼자서 친정엄마의 빈자리를 비워둔 채 씩씩하게 해내 왔다. 요즘에는 자주 볼 수 없는 모습이지만 예전에는 종종 돌아가신 장모님 꿈을 꾸거나 그 생각에 눈물짓는 경우가 많았었다.


다행히 지금은 새 장모님과 장인어른께서 함께 의지하며 잘 지내고 계신다. 혼자 계셨던 장인어른이 걱정되었을 딸은 마음을 한 시름 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여전히 파랑의 친정엄마의 빈자리는 쉽사리 채워질 수 없는 것 같았다.


공감능력이 많이 부족한 남편 옆에서 결혼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서럽고 아쉽고 속상한 순간들이 많았을지, 그때마다 친정엄마의 빈자리가 얼마나 많이 생각이 났을지 나는 사실 잘 모른다. 그저 옆에서 안아주고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을 뿐이었다.






어려서부터 파랑은 요리에 관심이 많고 좋아했었다고 한다. 항상 장모님이 해주시는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고 본인이 하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곧잘 해먹기도 했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신혼 때부터 아주 맛깔난 밥을 차려주곤 했었다. 여러 가지 종류의 음식을 잘했지만 특히 한식이 특별했다. 파랑의 설명에 의하면 장모님의 손맛을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가며 떠올려서 흉내를 내본다고 한다. 파랑의 음식도 충분히 맛있는데 장모님께서 살아계셨더라면 더 맛있는 음식을 먹었겠구나 하고 가끔 생각해보기도 했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다양한 음식들을 돌아가신 엄마의 손맛을 따라가는 파랑의 모습을 지켜보며 그 음식을 먹는 것은 내게 가끔 짠한 맛을 주었다.


그런데 파랑이 정말 좋아하는 음식이 있는데 쉽사리 시도를 하지 못하는 음식이 하나 있었다. 장모님이 해주시던 음식들 대부분 거의 어지간한 것들은 사 먹기도 하고 기억을 더듬어서 만들어 먹으면서 해소를 해왔었는데 특히 이것은 시도도 못했었다. 깍두기, 파김치, 오이소박이, 여러 장아찌 등 어려운 담가먹는 음식들도 이제는 척척 쉽게 하는 파랑이었지만 어쩐지 이 음식은 항상 어려워했다.


바로 ‘집 김치만두’ 였는데 파랑이 설명하는 '집에서 만든 김치만두’는 밖에서 어느 것을 사 먹어도 해소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김치가 아주 많이 들어있는, 그래서 김치 맛과 향이 아주 풍성한 그런 '집에서 만든 김치만두'는 밖에서 먹을 수가 없었다. 그 먹어도 먹어도 질릴 수 없는, 먹어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그 맛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 싶다. 파랑이 어릴 적에 장모님과 종종 해 먹었었을 때 워낙 번거로웠던 기억에 전혀 엄두를 내지 못 내겠다고 했다.






사 먹기도 힘들고 만들어 먹기도 힘든 '집 김치만두'가 다행히도 내 어머니가 자주 만드시는 음식이었다. 내 고향집에 내려가면 가끔 해주시거나 싸 주시는 김치만두를 먹어본 파랑이 이 만두가 맞다고 했다. 파랑은 그 김치만두를 맛보고 나서는 시어머니께 같이 만들어보자고 자주 말씀을 드렸다. 하지만 직장 생활하면서 양가 도움 없이 손자 키우느라 고생하는 며느리에게 시댁에 까지 와서 일을 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 어머니는 늘 미리 만들어두시고는 싸주시곤 했었다. 


그게 여러 해 반복이 되다가, 1년 전 우리가 호주로 떠나기 전 마지막 인사 차 방문한 날에 맞춰서 드디어 김치만두를 직접 다 같이 만드는 판을 벌려주셨다. 어마어마한 규모로 친척들이 총동원된 김치만두판은 시끌벅적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숙모 이모 손자 손녀 할 것 없이 모두 모여서 김치만두를 만들었다. 기진맥진하도록 엄청나게 많은 만두를 빚어낸 시간이 끝나자 어머니는 파랑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해봐야 다시는 하자고 안 할 것 같아서 그랬다." 


여러 가지 감정과 생각으로 판을 벌리신 어머니이자 시어머니의 마음을 나와 파랑은 어느 정도 알 것도 같았다.






그렇게 이곳에 오기 전에 소원을 풀고 난 파랑의 집 김치만두 노래는 한동안 사라졌었다. 그리고 호주에 온 지 약 1년이 다되어가던 즈음에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벌어졌다. 밖에서 음식을 사 먹는 일이 불가능해지고 나니 집밥이 점점 다양해지고 질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파랑이 선언했다 "나 이제 김치만두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이곳에 와서도 한인마트에 가면 들어와 있는 모든 종류의 김치만두를 사서 먹어보았는데 늘 그렇듯 모두 자격미달이었다. 너무 먹고 싶었던 것인지, 집밥 실력에 자신이 붙어서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르겠지만 한다면 하는 파랑이 결정을 내렸다.


준비해둔 재료로 미리 만두소를 파랑이 열심히 준비했다. 그리고 만두를 빚을 때가 되어 나와 아들이 함께 자리했다. 내 어릴 적 만두를 빚었던 기억도 되살아나면서 이렇게 먼 곳 타지에서 함께 만두를 빚고 있으니 묘하게 흥분되었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 만두 빚기 경험을 했던 아들은 제법 익숙하게 모양을 만들었다. 나도 오랜만이었지만 기억을 더듬어가며 즐겁게 이런저런 모양을 만들어 보았다.


그리고 대망의 찜 시간. 먼저 만든 김치만두 한판을 한 솥 가득 찌어냈다. 그 푸짐한 냄새가 부엌과 주방을 가득 채우면서 우리의 기대를 높여주었다. 첫 판이 완성되었다. 찌어진 모양은 아주 그럴듯했다. 그리고 맛을 보았다. 맛이 정말 똑같았다. 몇십 년을 먹어왔던 어머니의 집 김치만두와 똑같았다. 파랑도 아주 만족해했다. 우리는 만든 만두의 대부분을 그 끼니에서 먹어버렸다.






나는 파랑의 집 김치만두에 대한 간절함을 옆에서 보아왔기에 그 순간이 너무 기뻤고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그날 파랑은 따로 장모님을 이야기하진 않았다. 그날 아내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것도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파랑이 많이 강해져서인지 아니면 세월에 무뎌진 건지 부모를 여의어보지 못한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잃어보지 않은 자는 잃은 자를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잃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기 시작한 집 김치만두를 여러 다른 집과 나누어 먹었다. 파랑이 자주 이야기해주는 장모님의 이야기 중 하나가 남과 함께 나누는 일이었다. 어렵고 힘든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시고, 특히 음식을 많이 해서 나누셨다고 들었다. 이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저 내 생각과 감정으로만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의 따님이 당신의 모습을 닮아 만든 음식을 이곳 타지에서 나누는 모습을 하늘에서 보시면서 흐뭇해하시지 않을까? 딱 내가 짐작할 수 있는 정도가 이 정도였다.


우리 아들은 엄마를 닮아 요리에 관심이 많다. 엄마가 엄마의 엄마의 요리에 관심이 많았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두 번이나 만나 뵌 것에 비하면 아들은 할머니를 한 번도 만나 뵙지 못했다.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그분의 음식을 맛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나는 직접 먹어보지 못한 장모님의 음식을 아내의 음식 속에서 만나고 아들은 직접 만나 뵙지 못한 할머니를 엄마의 음식 속에서 만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 먼 호주에서 집 김치만두를 빚어먹으며 그분을 함께 만나고 있다.


지금도 내 아내 파랑은 어떤지 사실 잘 모르겠다. 짐작도 가질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옆에서 안아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이다. 잃어보지 않은 자는 잃은 자를 절대 이해할 수 없다.


호주에서 집 김치만두를 처음 빚어본 날 아들






이 브런치는 이런 곳입니다.

이 작가와 책을 만나보자!


매거진의 이전글 퇴사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