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록Joon Nov 15. 2021

남는 건 사진이 아닌 음식

9번째 결혼기념일 여행

우린 10년 차 부부다. 9번째 결혼기념일이 지났다는 말이다. 9년을 꽉 채워 함께 보냈고 이제 그다음 시간을 함께 하고 있다. 결혼 후 매년초 함께 시작한 날 즈음이 되면 여행을 갔다. 이제 주인공이 우리 둘만이 아니고 아들까지 셋이다. 이번에도 1박 2일 일정으로 떠났다. 여행의 주인공이 바뀌고 있었다. 아침부터 아들은 이목을 집중시켰다.


나 쉬야 마려워~ 못 참겠어~

1시간을 달려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다. 주차장을 찾는 초행길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뒷좌석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 전해졌다. 여행 시에는 이런 일이 종종 있기에 파랑이 미리 준비한 페트병에 담긴 남은 주스를 서로 마시며 비우기 시작했다. 우선 쉬야할 공간은 확보했으나 아들이 고집을 부리며 화장실에서 하겠다며 버텼다. 억지로 넘긴 음료가 울렁거렸지만 참아냈다. 어렵게 주차에 성공한 뒤 아들을 유모차에 싣고 달렸다. 어쩐 일인지 그 많던 화장실이 잘 눈에 띄지 않았다. 뛰어다니는 엄마 아빠의 마음을 알았는지, 아니면 급해짐이 심해져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페트병에 하겠다고 선언했다. 구석에 세 가족이 잘 숨어서 일을 처리했다. 아이도 우리도 곧바로 행복해졌다. 시작부터 뛰며 달리며 했더니 배가 고파졌다.


날씨가 무척이나 쨍하고 좋았다.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더위가 시작되었다. 긴장이 풀린 우리는 여유롭게 주변을 걸었다. 유모차를 꼭 챙기자는 파랑의 의견은 신의 한 수였다. 우리와 함께 있진 않지만 믿을 만한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아침 식사 장소를 정했다. (by 구글 평점) 자리에 둘러앉으니 이제야 좀 여행 온 기분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름다운 카페였다. 오가는 활기찬 사람들에게 호랑이 기운이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맛있었다! (사랑해요 구글!) 맛있는 아침은 즐거운 하루를 열어준다.



Fuelled Cafe & Bar




미술관을 좋아한다. 우리 가족, 나중에 합류한 아들까지 모두 좋아한다. 우리의 첫 목적지는 '퀸즐랜드 미술관'이었다. 무더운 날씨를 뚫고 시원한 실내로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경험이었다. 아들이 꽤 커서 작품들을 진지하고 호기심 넘치게 감상했다. 때로는 설명을 때로는 토론을 나누며 즐겼다. 원래 내 스타일인 '힘들면 힘내'라고 하지 않고 얼른 유모차에 태워 다녔다. 그게 서로 좋은 선택이었다. 꽤 오래 돌아다니면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평온하고 편안했다.



Queensland Art Gallery




우리가 1박 여행을 결정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숙박비가 비싸지 않아서였다. 마침 연말, 연초 공식적인 홀리데이 기간이 끝나고 나니 브리즈번 시티 호텔은 가격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평소에 한 번쯤 묵어보고 싶었던 시티 중심가에 있던 '더 세벨'에 체크인했다. 주차부터 체크인까지 친절하고 만족스러웠다. 아직 방 청소가 덜 끝나서 우리는 아들의 여행 기념품을 위해 장난감 가게로 향했다. 얼마 전 똑 떨어진 찰흙 장난감(플레이 도우)을 충전하기 위함이었다. 꽤 오랜 시간 파랑과 아들은 어떤 것을 살 지 열심히 논의했다. 난 그 시간에 잠시 빠져서 어른 장난감을 정신없이 구경했다. 장난감의 세계는 심오했다. 뭔가 가지고 즐겁게 놀 수 있다면 모두 장난감이 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에 빠져들 때쯤... 그들의 선택이 끝났다. 주말에 있는 친구 생일 파티에 가져갈 선물도 샀고, 우리 가족 장난감도 하나 장바구니에 넣었다.



The Sebel Brisbane




다시 배가 고팠다. 시계가 없어도 문제가 없을 정확한 시간 알림이었다. 한인 식당을 가기 위해 고만고만한 위치, 평점, 메뉴를 가진 곳들 중에 골랐다. 안 가본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마치 김밥천국에 온 기분으로 반가워하며 마구 시켰다. 돈가스, 비빔냉면, 양념치킨, 꼬마 갈비탕. 돈가스, 갈비탕은 맛있었고 나머지는 너무 달았다. 양은 모두 엄청나서 결국 남겼다. 파랑은 지난번에 갔던 '맛동산'이 더 맛있다고 했다. 어쨌든 부른 배를 두드리며 호텔로 돌아왔다. 서로 각각 쉬었다. 나는 책을 읽다 낮잠을 잤고 아들과 파랑은 플레이도우로 뭔가 열심히 만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해가 더 지기 전에 수영장에 가야 할 것 같아서 급하게 갈아입고 물에 뛰어들었다. 노는 동안 해가 지는 바람에 방으로 다시 돌아와서 따뜻하게 씻었다. 그리고 다 같이 '젠가'를 시작했다.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하던지 마치 보드게임방에 온 듯했다. 배가 고플 때까지, 아니 밤이 올 때까지 계속했다. (배는 계속 불러있었다.)



Maru




호주에 온 뒤 파랑과 내가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인 적이 없었다. 술을 잘 못 마시고 좋아하지도 않지만 항상 누구가 운전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날은 애초에 이 저녁을 위한 1박이었다. 지난번 온 가족이 감명 깊게 점심을 먹고 온 식당으로 향했다. 분위기는 적당히 어둑하니 딱 술집으로 변해있었다. 식사를 시키지 않고 먹고 싶었던 술안주를 잔뜩 시켰다. 좀 많나 싶었지만 결국 모두 다 먹었다. 굉장한 것은 우리 둘 다 시킨 맥주를 모두 마셨다는 것이다. 만취한 상태로 귀가했고 아주 오랜만에 술기운에 잠들었다.



Izakaya Kotobuki




아침이 밝았다. 우리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바로 먹는 것. 이 호텔로 정한 것도 아침 식사를 맛있게 제공했던 기억이 있어서였다. (다른 호텔에 묵었을 때 이 호텔 식당에서 밥을 먹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때와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코로나로 뷔페는 사라졌고, 메뉴와 실제 음식도 매우 간소해져 있었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에 느낌은 그냥저냥 그랬다. 언제나 느끼지만 기대는 실망을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것이 좋다. 살짝 아쉬움을 뒤로하고 체크 아웃했다.



The Croft House Town Kitchen & Bar




오전에 중요한 약속이 있었다. 얌전하게 있어준 아들 덕분에 기분 좋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우리 부부의 기분도 상쾌하고 명쾌해졌다. 같은 내용에 대해 이렇게 다르게 이야기할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종이 한 장 차이의 의견이었지만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었다. 나와서 작은 우리 동네에 없는 커다란 서점으로 향했다. 한국에서는 큰 서점에 자주 놀러 갔었는데 이곳에서는 처음이었다. 각자 원하는 책들을 열심히 구경했다. 도시에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마친 우리는 미련 없이 차에 올라탔다.


우리가 향한 곳의 위치는 중요하지 않았다. 향한 목적이 중요했다. 바로 '맛있는 점심'! 식당 앞에 줄이 길었다. 끈기 있는 파랑 덕에 결국 테이블을 차지할 수 있었다. 닭고기 덮밥, 나시 레막, 칠리 크랩. 10년 전 싱가포르에서 먹던 그 맛 그대로였다. 정말 정말 맛있었다. 여행은 그것으로 완결되었다. 더할 나위가 없었다.


* 아빠로서 아들을 기록하는 글을 쓰고 나면 자주 듣는 말이 있어요. 어떻게 아빠가 이런 육아 일기를 쓸 수 있냐고요. 부럽고 신기하다고요. 정말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혀 관심 없던 전과 달라진 건 사실입니다. 그 변화의 일대기는 제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에 담겨있습니다. 변화를 원하신다면 권해봅니다. 또 누가 변할지 모르니까요.

※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아빠 육아 업데이트』를 바로 만나보세요!



Little Singapore (Chermside)






이 브런치는 이런 곳입니다.

이 작가와 책을 만나보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