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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Mar 22. 2022

원하지 않았던 재주

손바닥 체온계

재주가 별로 없는 내게 쓸 만한 녀석이 하나 생겼다. 나만 있다고는 못하겠지만 나도 있다고는 할 수 있는 안심이랄까. 평소와 다른 아이의 상태를 눈치채면 바로 손으로 이마를 짚어본다. 그리곤 체온을 대강 알아챈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 기계의 힘을 빌리면 큰 차이가 없다. 내 느낌과 과학기술의 결론이 크게 다르지 않다. 해열제를 줄까 말까 하는 판단이 틀리지 않고 거의 옳다. 아이가 학교를 다닐 나이가 될 때까지 천천히 자연스럽게 습득한 이 능력을 '손바닥 체온계'라고 부르며 만족하는 중이다. 


쓸 일이 없는 게 제일 좋은 기술을 요 며칠 자주 사용하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그러니까 이 낯선 땅에 와서는 청정지역이라는 미명 아래 아들은 제대로 아파본 적 없이 보냈다. 이번엔 이렇다 할 이유도 낌새도 없이 갑자기 덜컥 앓아버렸다. 활발한 친구답게 조금 열이 나고 조금 훌쩍 대도 한참을 설쳤는데 지치지도 않고 찾아오는 기침에 결국 무너졌다. 어른도 반복되는 기침엔 목이 긁히고 배 근육이 당겨 힘든데 7살 아이가 견디긴 무리였을 테다. 점점 힘이 약해지더니 조용히 책 읽는 시간이 늘어났다. 


때가 때인지라 자가진단을 서둘러해 보았다. 아직 나도 한 번도 못해본 경험을 아들이 먼저 콧구멍을 허락하며 눈물을 흘렸다. 다행히 한 줄. 열은 높지 않았지만 줄지 않는 콧물이 넘어가며 만드는 끊기지 않는 기침이 문제였다. 해가 떠있을 때는 밝고 따뜻한 기운에 어떻게 버텨냈으나 문제는 어두워진 다음이었다. 할 수 있는 준비를 모두 갖추고 잠자리에 누우면 얼마 안 돼서 콜록콜록 온몸을 들썩이며 힘들어한다. 콧물 기침약, 입&목 스프레이, 따끈한 비타민 물 등을 옆에 두고 챙겨보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젯밤부터 오늘 새벽까지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아들은 기침으로 지켜보는 나도. 새벽 중간에 다른 종류인 마른기침약을 혹시나 해서 주었더니 갑자기 고요해졌다. 설친 잠은 쉽게 찾아오지 못하고 편안해진 아들 얼굴을 보다가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던 순간들을 남기고 싶어 자리에 앉았다.





누구나 혼자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아들도 최근 자신만의 작업실을 갖추었다. 책과 장난감이 가득했던 방을 나름 요리조리 꾸미더니 제법 그럴듯하게 만들었다. 최근에 설정한 구체적인 꿈을 향한 공간의 마련이다. 미술관에 걸린 그림을 그리는 화가. 그림은 말을 하기 전부터 주로 활용하던 표현의 방식이다. 지금까지도 알아서 제일 많은 시간을 쓰는 게 그리기다. 한 번도 따로 분리된 적이 없던 아들이 요즘엔 완벽히 격리된 집중을 꾀한다.


시작은 이랬다. 어느 토요일 오후, 마주 보고 있는 아들의 작업실(구 놀이방)과 내 서재의 문을 모두 닫았다. 제대로 집중을 하고 싶다는 아들의 요청이었다. 이게 얼마나 큰 일이냐면 원래는 자신의 시선에 우리 부부 둘 중 한 명이 꼭 있어야 했던 게 지난날이었다. 아들은 그럴듯하게 좋아하는 옛날이야기를 틀어놓고 각종 그리기 도구 사이에 앉아 영감을 종이에 옮겼다. 덕분에 새벽에만 겨우 가질 수 있는 조용함을 엉겁결에 가진 나는 음악을 들으며 글감을 정리했다.


괜히 그 순간이 떨리고 따뜻했다. 저쪽 방엔 공개된 장소에 자신의 그림이 걸리는 꿈을 꾸는 아들이, 이쪽 방엔 먼저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책을 내는 꿈을 꾸는 아빠가. 혹시 떨어져 있더라도 우리의 기척을 느끼기 위해 꼭 문이라도 열고 있던 아이가 독립된 공간에서 아늑하게 집중하는 재미를 알아간다. 묘하게도 좋은데 아쉽다. 육아란 결국 아이의 독립을 향해가는 길임을 하릴없이 인정하는 순간이다.


최근에 어디선가 받았던 '아이에게 만들어 주고 싶은 순간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짧은 시간이라도 자기 혼자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간을 갖는 거라고. 눈을 감고 있든 그림을 그리든 글자를 끼적이든 뭘 하든. 가지고 있는 고민을 깊게 파도 좋고 엉뚱한 상상을 펼쳐도 좋고 앞으로 미래를 그려도 좋고. 30년을 넘게 살고 나서야 가진 그 시간이 요즘 너무 좋아서다. 이러고 나면 뭔가 나만의 세계를 놀러 갔다 온 것 같기도 하고 부쩍 사고가 확장된 느낌이다. 이때 했던 공상이 나중에 불현듯 현실로 연결되기도 하고.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을 통해 혼자서 골똘히 머리를 한계 없이 굴려보는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다. 어쩐지 이를 위해선 아이만의 공간과 시간을 확보해주어야 할 것 같았는데 스스로 알아서 잘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곳에서 자기에게 푹 빠져있다가 돌아오면 훨씬 생기가 도는 눈치다. 아들도 나도.





요즘 아들은 머리가 부쩍 굵어지고 있다. 학교에서 자신 있어하는 수학 시간에는 친구들을 많이 돕는다 했다. 근데 절대 답을 알려주진 않는다고 한다. 차근차근 푸는 원리를 알려주고 친구가 풀어가길 기다려 준다고. 괜히 내가 뿌듯해서 '아빠처럼?'이라고 덧붙였지만 아들은 모른 채 한다. 정말 머리가 굵어진 거군.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품고 있다가 문득문득 던지기도 한다. 최근엔 '바퀴벌레와 코로나 중 무엇을 남길 거야?'라고 했는데 어려웠다. 대답을 못하자 코로나가 없어져야 하는 이유를 논리 정연하게 풀어놓았다. 그걸 몰라서가 아니라 바퀴벌레가 너무 싫어서였기에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은 똑같은 걸 해도 왜 어떤 사람은 바로 잘하고 다른 사람은 못 할 수 있냐고 해서 설명이 쓸데없이 길어졌다. 듣고 난 아들이 덧붙인 의견에 옆에 있던 파랑은 심장이 덜컥했다. 뭔가 더 잘할 수 있는 것도 귀찮을 때가 있어서 적당히 하고 말 때가 많다는 내용이었는데 파랑의 지난날과 똑같아서 그랬다. 나야 뭐 잘하는 게 없어서 열심히만 하다가 끝났으니 이해할 수 없는 공통분모였지만.


커지고 복잡해지는 머리만큼이나 몸이 자라려고 지금의 고통을 겪고 있는 모양이다. 밥도 잘 먹고 운동도 열심히여서 최근 몸무게도 늘고 힘도 세졌는데 이렇게 주저앉아 아파하고 있으니 내 마음이 엉망이다. 아프고 나면 더 잘 클 것을 알지만 지금 당장 기운 없는 녀석을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좋아하는 학교를 어제도 못 갔고 오늘도 그럴 셈이다. 친해진 친구들 이름도 새로워지고 신기한 에피소드도 많이 들려줬는데 며칠은 참아야겠다. 내 손으로 뜨거움을 정확히 알아내는 장면이 줄어들 때쯤이면 씩씩하게 가방을 메고 나설 것을 믿는다. 잘 크고 있다고 여기며 안쓰러움을 티 내지 않는다. 지겨워진 기침이 어서 아들 곁을 떠나기를.


* 매일 쓰는 진짜 일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급 정보가 있지도 않은 아이와 지내면서 겪는 온갖 후회와 반성의 잡생각 뭉탱이 '육아 생존기'를 애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로서 기록하는 글을 쓰고 나면 자주 듣는 말이 있어요. 어떻게 아빠가 이런 육아 일기를 쓸 수 있냐고요. 부럽고 신기하다고요. 정말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혀 관심 없던 전과 달라진 건 사실입니다. 그 변화의 일대기는 제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에 담겨있습니다. 변화를 원하신다면 권해봅니다. 또 누가 변할지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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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제가 쓴 책이 나왔습니다. 애만 만들고 아빠인 척하던 제가 변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아닌 척 모른 척했지만 저도 그저 엄마가 애를 키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많아져서 함께하는 육아가 당연해지는 날을 꿈 꿉니다. 책 표지에 적어 둔 것처럼 인세 수익은 모두 필요한 아이들에게 기부합니다. 다른 욕심 없이 오로지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져서 세상이 변하길 바랍니다. 아이가 있거나 아직 없거나 다 컸거나 심지어 없을 예정이어도 읽으면 좋습니다. 엄마 아빠가 함께하는 육아를 아이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이해해야만 바뀌기 때문입니다.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필요한 분들에게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순간을 나눌 수 있어서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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