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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Mar 04. 2022

역전이 자연스러운 거라지만

아이가 힘이 세지면

학교를 마치고 나온 아들과 만나면 즐거운 하루 보냈냐는 인사 뒤에 꼭 따라붙는 주제가 있다. 바로 '점심 도시락'인데 말을 꺼내는 순서는 그날의 결과에 따라 다르다. 싹싹 비워 온 날이면 내가 묻기도 전에 먼저 알려준다. 반대의 경우엔 물어볼 때까지 아들은 말을 아낀다. 워낙 야리야리하고 먹는 데 흥미가 없는 녀석이 싸준 도시락을 잘 먹고 오면 좋겠는데 쉽지가 않다. 남겨 오는 날이 거듭되면 걱정이 짜증과 억울함으로 변한다. 아침에 열심히 싸줬건만 거의 그대로 돌아오면 뒷목을 잡게 된다. 부모가 특히 예민한 부분은 어릴 적 자신의 기억과도 맞물린다는데 나 역시 먹기엔 관심이 없었기에 도시락을 비우는 게 늘 일이었다. 눈치가 보이는 날엔 집에 돌아가는 길에 풀밭의 거름으로 준 적도 있다. 그때를 이렇게 돌려받나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차갑게 식어 다시 마주하는 도시락을 보면 기분이 좋지 않다. 아무데서나 작용하는 보상심리 때문일 텐데 관대하지 못한 어른이라 내 노력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을 놓지 못한다. 베테랑 아내에게 받은 조언은 남겨와서 속상한 마음만 아들에게 전하고 감정적인 표현으로 죄책감을 주지는 말라인데 이게 참 어렵다. 네가 남겨와서 나는 언짢다는 걸 전하면 나를 우울하게 만든 건 너의 먹지 않고 돌아옴 때문이라는 건데 구분이 될까 싶다. 아들도 답답한지 친구들한테 물어봤다고 한다. 단골손님 같은 아들의 이유는 먹을 시간이 없어서인데, 친구들은 시간이 부족해서 밥을 남겼다고 하면 안 혼난다고 했단다. 그러니 난 이미 아들을 밥 안 먹었다고 혼을 내고 있는 사람인 셈이다.


그랬던 이 친구가 2학년이 되자 밥을 쭉쭉 다 먹고 있다. 첫 주부터 5일 연속으로. 그 이후로도 타율이 매우 좋다. 한 번은 식당에 가서 태어나 처음으로 더 시켜달라고 해서 더 먹기도 했다. 얘가 그 애가 맞는가 싶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급작스러운 변화에 어리벙벙해서 물어보니 대답은 간단했다. 키가 크고 싶고 힘이 세지고 싶다고. 그러려면 혼자 생각해보니 밥을 잘 먹고 우유 많이 마시고 운동하고 햇빛을 많이 받아야 할 것 같다고. 밥을 잘 먹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운동 마니아로 돌변했다. 틈만 나면 몸을 움직인다. 내가 하는 웨이트 트레이닝도 열심히 따라 하고 밖에서 뛰는 축구도 자주 하자고 한다. 저번엔 운동 마치고 같이 씻고 나서 시원하게 외쳤다. 이제야 아빠가 운동하고 씻는 개운한 기분을 알겠다며. 푸핫. 육체를 단련하는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어느 날 아주 기분 좋은 얼굴로 하교를 했다. 무슨 좋은 일 있냐며 물으니 반 친구들과 팔씨름을 해서 2등을 했다고 했다. 지금까지 밥 잘 먹고 운동한 건 모두 이를 위해서였다고. 아들은 반에서 키가 뒤에서 두 번째다. 팔씨름을 처음 했을 때 가장 작은 친구는 당연히 이길 줄 알았는데 지고 나서 충격을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강해지겠다고 마음을 먹고 변화를 꾀했던 것이다. 마치 무술영화의 주인공이 처절한 패배 후 지독한 단련을 통해 강해지는 스토리처럼. 괜히 나 어릴 적에 똑같은 처지가 떠올랐다. 체육시간 씨름 실기 평가 때 나보다 유일하게 작은 친구에게 연거푸 패배했던 그때가. 비참한 마음은 비슷했지만 나는 잘 먹고 운동할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아들은 달랐다. 그 이후에도 먹고 운동하기를 멈추지 않더니 어느 날 활짝 웃으며 드디어 모두 이기고 1등을 했다고 했다. 네가 내 아들이 맞나 싶었다. 이 무슨 굉장한 의지란 말인가.





몸이 자란 아들은 학교에서 혼자 해나가는 일이 많아졌다. 비 오는 날엔 우산을 쓰고 가방도 메고 등교를 곧잘 한다. 아직 몸보다 커 보이는 가방이 불안불안 하지만 균형 잡는 법을 터득한 모양이다. 들어가는 길에도 여유롭게 중간중간 날 한 번씩 돌아보며 인사를 해주는 데 그게 그렇게 기분이 좋고 든든하다. 학년 초에 있는 자기소개도 척척 하고 왔다. 자기를 보여주는 태극기, 노랑 색연필, 레고 블록, 퍼즐, 과학만화책을 골라가서는 시원하게 설명하고 왔단다. 한 주에 한 명 뽑는 '스타 스튜던트'에도 학년이 시작하자마자 뽑혀왔다. 무엇이든 열심히 배우는 자세를 칭찬해주시는 선생님의 축하 카드와 함께. 새 선생님 어때라고 물으니 대답이 명쾌하다. '쉽게 알려줘서 좋고, 공부시간에 조용하게 만들어줘서 좋아. 3번 떠든 친구는 교감 선생님한테 보내거든.' (ㄷㄷㄷ)


말도 많이 늘었다. 우선 좋아하는 팝송을 곧잘 외워서 따라 부른다. 내가 영어 공부 겸 따라 적고 부르는 노래를 옆에서 듣더니 쉽게 흥얼거린다. 민망해지지만 출발이 다르니 어쩔 수 없다. 좋아하는 노래를 같이 부르면 또 다른 기쁨을 만난다. 저학년이라서 필수는 아니지만 마스크를 쓰고 오는 반 친구가 한 명 있다고 한다. 그걸 보고 오더니 아들이 말했다. '불안해서 나도 써야겠어. 좀 불편해도 살 거야!(코로나에게 당하지 않고 살아남겠다는 뜻)' 결국 마스크를 사다 줬더니 정작 불편했는지 하고 가진 않았다. 크는 중인지 예전만큼 아침에 벌떡벌떡 일어나질 못한다. 늦잠으로 비몽사몽 헤매던 어느 날 그럴듯한 이유를 댔다. '왜 엄마가 한번 널브러지면 일어나기 어렵다는 지 이제야 알겠네.' 좋아하는 속담도 이리저리 응용도 곧잘 한다. 놀이터에서 오르던 정글짐이 점점 높아지자 '휴, 이건 뜨거운 죽 먹긴데?' (식은 죽은 너무 쉬우니)





키도 크고 담도 커진 아들과 오랜만에  아담한 놀이동산에서  타는  없이 신나게 즐겼다. 물에 흠뻑 젖는 통나무 타고 떨어지는 놀이기구를 제일 좋아했다. 물을 좋아하는 아들과 상관은 없겠지만 국외부재자 투표를 하러 가까운 도시에 들렀다 홍수에 며칠이나 갇혀있다 왔다. 덕분에 아들은 학교를 이틀이나 쉬었고. 어렵사리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고 아들은 힘차게 학교로 돌아갔다. 아들이 있으면  한다는 아빠와의 팔씨름을 하루에도 여러  한다. 대부분 이기지만 방심  고의 반으로 지기도 하는데 그때의 만족스러운 표정이 낯설다.  언제고  번이라도 이런 열정을 가지고 전념한 적이 있던가. 녀석은  닮은 면도 있지만 분명히 다른 사람이다. 그게 뭐든 간에 스스로 생각하고  보고 깨닫고 하며  찾아가면 좋겠다. 나도 그렇게 꿈틀대며 살고 있으니 아들 옆에서 답답한 사람으로 보이진 말아야겠다. 언젠가 장난기 없이 맞선 팔씨름에 완벽히 지는 날이 오고  테다. 그때가 빨리 오길 바라야 하는지 늦게 오길 바라야 하는지 헷갈린다. 오래도록 손을 맞잡는 가까움이 계속되면 좋겠는데.





* 매일 쓰는 진짜 일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급 정보가 있지도 않은 아이와 지내면서 겪는 온갖 후회와 반성의 잡생각 뭉탱이 '육아 생존기'를 애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로서 기록하는 글을 쓰고 나면 자주 듣는 말이 있어요. 어떻게 아빠가 이런 육아 일기를 쓸 수 있냐고요. 부럽고 신기하다고요. 정말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혀 관심 없던 전과 달라진 건 사실입니다. 그 변화의 일대기는 제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에 담겨있습니다. 변화를 원하신다면 권해봅니다. 또 누가 변할지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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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제가 쓴 책이 나왔습니다. 애만 만들고 아빠인 척하던 제가 변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아닌 척 모른 척했지만 저도 그저 엄마가 애를 키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많아져서 함께하는 육아가 당연해지는 날을 꿈 꿉니다. 책 표지에 적어 둔 것처럼 인세 수익은 모두 필요한 아이들에게 기부합니다. 다른 욕심 없이 오로지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져서 세상이 변하길 바랍니다. 아이가 있거나 아직 없거나 다 컸거나 심지어 없을 예정이어도 읽으면 좋습니다. 엄마 아빠가 함께하는 육아를 아이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이해해야만 바뀌기 때문입니다.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필요한 분들에게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순간을 나눌 수 있어서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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