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에서 제일 아까운 건
호주 밀 키트(Meal Kit) - Hello Fresh(헬로 프레쉬)
아내가 집을 나갔다. 그리고 이 상자가 도착했다.
집에서 '요리' 담당은 와이프, 파랑이다. 주방 담당은 아니고 요리만. 일단 전업 주부는 나니까. 요리에 해당되는 건 파랑이 하지만 음식을 차려먹고 치우는 일은 내가 한다. 그러니까 요리에 해당하지 않는 것들은 나도 한다. 라면이라든지 달걀프라이든지. 이것뿐이라면 너무하니 짜장라면, 써니 사이드업, 에그 스크램블로 눈 가리고 아웅도 가능하다. 이것도 안되면 떡볶이, 김치볶음밥, 야채볶음밥 정도는 뚝딱이다. 아! 아들 도시락도 다 내가 할 수 있다. 레퍼토리가 좀 있다. 샌드위치, 주먹밥, 치킨마요 덮밥, 파스타, 삼각김밥 등. 대충 어떻게든 먹고 산다는 말이다.
'오늘 뭐 먹지?'에 대한 질문에 난 늘 있는 걸로 대충 먹자 주의다. 하지만 파랑은 항상 새로움을 추구한다. 덕분에 우리 가족이 먼 타지에서 맛있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 그런 파랑이 당분간 제대로 요리에 집중할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어 지원군을 불렀다. 그게 바로 저 박스의 정체다. Hello Fresh (헬로 프레쉬). Meal Kit(밀 키트) 회사로서 가정식을 배달해주는 구독 서비스다. 한국에도 비슷한 서비스가 많을 것이다. 아무튼 그리하여 이 녀석과 마주했다.
언박싱
요리도 싫고 물건 사는 것도 싫은 내가 언박싱을 하다니!
이렇게 들어있다. 양쪽에는 서비스 자랑과 재활용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음식물 쓰레기 최소화, 식재료의 신선함, 간결한 유통과정 등 일단 다 좋다는 이야기. 박스, 쿨 파우치, 아이스팩 모두 적극 재사용해주고 나중에 재활용도 100% 가능하다고 하지만 어쨌든 쓰레기는 많이 나온다. 다음은 서비스 설명 카탈로그 앞과 뒤. 건강한 레시피, 신선한 재철 식재료, 음식물 쓰레기 최소화까지 죄다 좋단다. 원하는 대로 맞춤 주문하고 받아서 키트별로 간편하게 요리해 먹으라는 훈훈한 안내로 마무리.
레시피와 재료
우리에게 온 3가지 요리에 대한 레시피. 소고기 햄버거, 치즈 치킨, 연어 스테이크. 각각에 들어가는 고기와 소스, 치즈, 야채가 구분되어 들어있다. 다 똑같아 보이는 내겐 개별 포장으로 나눌 수 있어서 편하다.
첫 밀 키트 요리 도전 후기
어차피 한 번은 혼자서 부딪혀야 하는 과제다. 당연히 가장 시간이 짧은 것을 골랐다. (밥 준비하고 먹는 시간이 세상에서 제일 아까운 사람) 오늘 저녁은 '감자샐러드와 야채샐러드를 곁들인 연어 스테이크'! (이름이 길어야 있어 보인다고)
레시피에는 아주 친절하고 상세하게 설명이 되어있다. 아들에게 아빠가 오랜만에 요리를 한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시작했다. 보기엔 정말 대충 금방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레시피에 적힌 시간이 정말 다 필요했다. ('준비+요리' 1시간)
어쨌든 미션 완료! 나도 아들도 맛나게 먹었다. 남이 준비 다해준 밥상을 차리는 것도 왜 이리 힘든 건지 참. 결국 요리 준비하고 먹고 다 치우고 나니 잠잘 시간이었다. 하하.
혼자서 내린 결론은 이거다. '못 해 먹겠다.' 시간 아까워서 다시는 못하겠다. 그냥 요리는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이 하자. 난 이렇게 안 먹어도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영원히 전자레인지만 사용해서 밥을 먹고 싶다. 미안하지만 못 해 먹겠다.
서비스 정보
허탈하고 기운 빠져서 그냥 갈 뻔했다. 중요한 가격 및 배송 정보를 깜빡했다.
주문 방식은 위처럼 타입, 인원, 횟수를 고를 수 있다. 우리는 고기&야채, 2명, 주 3회로 골랐다. 원래 가격은 75.93불(대충 6만 8천 원)인데 한 달 동안 40% 할인을 해주고 있다. (몇몇 레시피는 가격이 추가됨) 세 가족 주 3회 식사에 이 가격이면 호주 물가 치고 나쁘지 않다. 배송 날짜는 매주 화요일.
파랑이 이 서비스를 시작한 이유 중 하나는 이거다. '도대체 호주 가정식은 무엇일까?' 특별히 호주 음식이랄 것도 없는데 무엇을 먹고 사는지 궁금했다. 매번 피시 앤 칩스만 먹진 않을 테니. 아들도 친구들이랑 어울리고 우리도 살아가는 동안 그들을 이해하려면 음식문화를 아는 게 필요했다. 이 서비스의 느낌으로는 음... 신선한 고기와 야채를 잘 버무려 먹는 일반적인 서양 식단 정도? 당연한 이야기다. 사실 잘 모르겠다. 우선 최소한 할인 기간 4주간 써 볼 테니 난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뭐든 잘하는 사람이 그냥 하는 게 제일 낫다는 것은 제대로 배웠다. 파랑 고마워. 내가 일부러 못하는 건 아니야.
* 아빠로서 아들을 기록하는 글을 쓰고 나면 자주 듣는 말이 있어요. 어떻게 아빠가 이런 육아 일기를 쓸 수 있냐고요. 부럽고 신기하다고요. 정말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혀 관심 없던 전과 달라진 건 사실입니다. 그 변화의 일대기는 제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에 담겨있습니다. 변화를 원하신다면 권해봅니다. 또 누가 변할지 모르니까요.
※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아빠 육아 업데이트』를 바로 만나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