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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Apr 29. 2022

변하지 않는 피부색의 의미

호주 다문화

길을 걷다 마주치는 백인들을 보면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한다. '너희는 좋겠다. 조상들이 이곳에 먼저 깃발을 꽂은 덕분에 주인으로 살고 있어서.' 주인이 없던 이곳 호주에 가장 먼저 정착해서 제 집으로 삼은 그들에 대한 부러움이다. 미국을 비롯하여 신대륙이라는 곳이 다 그렇듯이 먼저 선점한 사람들이 주도권을 가진다. 물론 기존에  평화롭게 살고 있던 원주민과의 관계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우리가 먼저 와서 시작했다면 '그들과 다를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도 가져본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게 아니니 잠시 접어두자.


결과적으로 호주는 백인들이 중심이 되어 지내는 곳이다. 그들의 먼 조상들이 범죄자 집단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건 핵심이 아니다. 하얀 피부의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다른 피부의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 원래 살던 어두운 피부의 사람, 멀리서 꿈과 미래를 찾아온 하얗지 않은 누렇거나 검은 사람들이 많다. 비슷한 하얀 피부의 사람들도 새롭게 이곳을 찾지만 원래의 주인과 눈에 띄는 차이가 없어 티가 안 난다. 이들이 우연히 한 장소에 함께 머무르게 되면 순간적인 계층 의식이 느껴진다. 나만의 주관적인 착각일 수 있다. 내가 이곳에 먼저 도착한 하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호주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들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몸으로 표현하는 수업시간에 '아리랑'을 들으면서 '부채춤'을 연습하고 있다고 했다. 나중에 학교 전체가 모이는 시간에 한국인 학생들이 무대에 올라 함께 공연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학년의 딱 한 명뿐 한국인, 아들에게 한국에 대해 소개를 부탁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전통문화와 놀이를 다루는 어린이집을 오래 다닌 아들은 즐거워했다. 주목받게 된 것을 쑥스러워하긴 했지만 싫지 않는 눈치였다. 어떤 식으로든 긍정적인 기운을 넣어주는 것 같아 나도 좋았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파랑의 생각은 달랐다. 여러 문화를 체험하는 것은 문제가 없으나 굳이 한국인 학생을 따로 모아서 무대를 마련한 것에 대한 불편함이 있었다. 들으면서 처음엔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싶었다. 몇 가지 아찔한 비유와 예시를 듣고 나니 마냥 그렇지 못했다. 혹시 외모만 한국인이고 순수한 호주 태생이라면? 또는 혼혈이나 입양된 거라면? 그래서 이 아이들이 한국에 대해 전혀 모른다면?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로만 구분지어서 나누는 것에 대한 반감이었다. 결정적으로 무대에 따로 세우는 모습이 '동물원 원숭이'같을 수 있다고 했다. 생각해보라고. 어떤 힘없는 소수민족 아이들에게 전통 의상을 입혀서 춤을 추게 하는 모습을. 좀 많이 간 것 아닌가 싶다가도 이어지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들이 한국에 대해 소개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작년 처음으로 학교를 갔을 때 담임 선생님의 배려가 있었다. 자기소개를 번갈아가면서 하는 데 그때 한국을 소개하는 음식이나 과자를 곁들이면 아들이 좀 더 자신 있게 적응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이건 제안이었다. 받아들이고 말고는 우리의 결정에 달려있었다. 이게 지금과 그때의 차이였다. 사전에 조심스럽게 우리의 의견을 물어보거나, 최소한 미리 안내를 해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어떤 취지로 이번 이벤트가 기획되었으며 아이를 참여시켜도 괜찮은지 형식적인 동의라도 있었어야 했다는 게 파랑의 의견이다.


난 그저 주목받으며 즐기는 태도의 아들을 보며 잘되었다 싶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들으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곳은 다양한 인종, 민족, 문화가 섞여서 살아간다. 그런 다양함을 이해하고 존중하기 위한 움직임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정말 동일한 위치에서 함께 지내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는 인종차별, 혐오 문제가 언제나 남의 일은 아니다. 우리 스스로의 평등의식과는 무관하게 사회 인식과 분위기가 계층을 만들어 낸다. 이곳의 시작을 알린 하얀 사람의 깃발 꽂기는 여전히 유효한 의미로 남아있다.


지금부터 여러 세대가 지나면 어떻게 될까? 나라와 민족, 인종과 문화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지금과 같은 백인, 흑인, 황인의 순서 정하기는 여전할까? 한국에서 한국인으로만 지낼 때는 마주하지 않았던 의문들이다. 못 보던 것들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게 된다. 왜 다 똑같지 않고 서로 다른 사람이 함께 살아가게 되었을까? 진정한 평등에 보이는 외모가 방해가 된다면 눈을 감으면 해결이 될까? 앞으로도 꾸준히 고개를 들 풀리지 않을 궁금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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