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가는 내가 어려운데
요즘 부쩍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많아졌다. 예전엔 한 시도 가만있지 않아서 그럴 틈이 없었지만, 이젠 골똘히 혼자서 집중하는 일이 늘어 그렇다. 특히 책을 잡고 있을 때가 많은데, 이때 조그마한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게 된다. 한참을 하나씩 부분 부분 뜯어서 보아도 납득이 안된다. 내겐 아직 작디작은 꼬마 아기인데, 입고 있는 옷을 보면 어엿한 초등학생 교복이다.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유다. 처음 주양육자로 마주했던 유치원 시절을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물론 시계를 내 쪽으로 감아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난 초등학교 2학년 때, 내가 다 큰 줄 알았다.
많이 큰 게 확실한 아들은 예측을 자주 뛰어넘는다. 코로나 격리 후 복귀한 녀석은 아주 쌩쌩했다. 걸려있을 때도 별 다른 점이 없었으니, 갇혀서 에너지를 비축했으니 그럴 만하다. 안 아프면 좋은 거라며 날뛰는 아들을 반길 뿐이다. 어느 날 아침, 아들을 학교에 보내 놓고 아내 파랑과 브런치를 먹자고 이야기를 나눴다. 중간에 껴서 듣던 아들이 "나도 갈래!"를 진지하게 시전 했다. 이런 적은 없던지라, 산 사람 소원은 들어줘야지 하며 헐레벌떡 다 같이 나섰다. 카페에서 배불리 아침을 먹고 교문을 통과한 아들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인사했다. 밝은 기운 넘치는 아들은 반대로 눈물도 많아졌다. 혼나거나 속상하고 마음대로 안되면 눈물이 먼저 쏙 나와 볼을 타고 흐른다. 여전히 눈물에 약한 나는 이걸 받아줘야 하는지, 그래도 강하게 따끔하게 마무리해야 하는지 헷갈린다. 어떤 식으로든 마음의 상처를 덜 줘야 하는데 서툴다.
이런 애매모호한 태도를 간직한 채, 방학을 맞은 아들을 데리고 겨울 섬, 타즈매니아로 여행을 떠났다. 이미 호주는 겨울인데, 남극에 가까운 섬으로 간 이유는 하나였다. 아들에게 하얀 눈을 보여주기 위해. 오랜만에 타는 비행기로 시작한 여정은 출발이 좋았다. 준비성 좋은 파랑이 마련한 패딩과 어그부츠 덕분에 어딜 가도 문제없었다. 한국의 한 겨울 추위를 겪은 우리에겐 딱 좋은 온도였다. 좋은 와중에도 유독 에너지 넘치고, 고집도 세진 아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고비가 많았다. 받아주는 내가 어른답지 못하게 한계를 드러내면 분위기는 금방 가라앉곤 했다. 회복력이 빠른 아들 덕분에 나도 다시 기분을 세우길 반복하며 즐거운 기분을 이어나갔다.
여행 중간에 저녁을 먹으며 즐기는 공연이 있었다. 그중 테이블을 돌며 타로카드 점을 봐주는 순서가 있어 하나씩 뽑았다. 아들은 '유혹', 파랑은 '연인', 나는 '마법사'. 내 나름의 해석은 이렇다. 아들은 여행 때 유튜브를 너무 많이 보는 바람에 유혹에 빠졌다. 마인 크래프트 실력이 늘어서 놀라니 한 마디 했다. “내가 유튜브만 그냥 보는 줄 알았지!” 파랑은 어디 가서 누굴 만나려고 'The lovers'를 뽑았을까. 나보고 조심하라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더 알려줬으면 좋겠는데. 난 매직이 펼쳐지는 놀라운 카드를 가졌다. 곧 두 번째 책이 나올 예정인데 어떤 마법이 펼쳐지려고 그러나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곤 정말 마법에 걸렸다. 코로나와 독감에 동시에. 그것도 여행이 끝나기도 전에. 그리고 책이 나오기도 전에.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잠깐 힘이 돌아오는 낮시간을 이용해 관광을 하고 나머지 기간엔 죽은 듯 뻗어있었다. 몸 져 누운 나와 기운 넘치는 아들을 돌보느라 파랑이 여행 막판에 고생이 많았다. 어렵게 집에 도착해서도 병은 쉽게 낫지 않았다. 책은 출간이 되었는데 기운이 없으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언제나 열정 넘치는 나를 멈추게 한 거니 매직이라고 해도 되겠다. 몸이 아프니 손 쓰지 못하는 상황에 마음도 아팠다. 타로카드는 이제 절대 뽑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깊숙이 박였다.
다행히 아들은 타즈매니아 여행이 좋았던 모양이다. 남은 방학 내내 즐거웠다고 노래를 불렀다. 기운 빠진 나와 다르게 알차게 남은 휴일을 꽉꽉 채웠다. 학교에서 날아온 반가운 편지에는 상반기에 우수하게 생활을 했다는 소식이 들어있었다. 뿌듯해하는 아들 얼굴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마지막 주말에는 오랫동안 모아 온 YES DAY 쿠폰으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누렸다. 아침으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놀이동산에 가고, 게임하다 잠드는 꿈의 일정을 소화했다. 덕분에 개학 첫날 몸이 아파서(라고 했지만 노느라 피곤해서) 결석하고 하루 쉬었다. 오랜만에 아들을 보내고 쉴 생각에 부풀었던 난 순간 욱 했지만, 내려놓고 그날 종일 아들과 놀았다. 내겐 아직 아기지만, 많이 커버린 아들에 적응을 해나가고 있다.
아이가 크면 분명히 편한 게 있다. 갓난아이는 필요한 시선과 손발, 물품이 정말 많지만 점점 줄어든다. 근데 신경 써야 하는 총량은 여전히 그대로다.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챙기고 파악하고 알아줘야 하는 부분이 생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많아서 오히려 더 어렵다. 그렇다고 나 편하자고 놓아버리면 점점 소원해질 게 뻔해서 두렵다. 그런 절묘하고 애매한 과정에 놓여있는 걸 느끼는 요즘이다. 한 번은 아들이 물었다. "아빠는 내가 몇 학년일 때가 궁금해?" 눈앞에 크는 녀석이 당장 궁금해서 초등학교 고학년이라고 했더니, 본인은 대학생 때 뭘 공부할지 기대된다고 했다. 그때도 우리가 이렇게 같이 살고 있을까 호기심 가득 되물었더니 정색하며 답한다. "그럼! 절대 같이 있어야 돼!" 그래. 그때도 우리가 마주 보며 이야기하는 사이로 남으면 좋겠다. 내가 요즘 불안한 건 그래서였나 보다. 커가는 널 보며 행여나 우리가 멀어져 말 없는 관계가 될까 봐서.
* 매일 쓰는 진짜 일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급 정보가 있지도 않은 아이와 지내면서 겪는 온갖 후회와 반성의 잡생각 뭉탱이 '육아 생존기'를 애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로서 기록하는 글을 쓰고 나면 자주 듣는 말이 있어요. 어떻게 아빠가 이런 육아 일기를 쓸 수 있냐고요. 부럽고 신기하다고요. 정말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혀 관심 없던 전과 달라진 건 사실입니다. 그 변화의 일대기는 제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에 담겨있습니다. 변화를 원하신다면 권해봅니다. 또 누가 변할지 모르니까요.
※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아빠 육아 업데이트』를 바로 만나보세요!
※ 아파서 놓친 타이밍이 아쉬워서, 갑자기 책 홍보할게요. 제 두 번째 책, 『퇴사라는 고민』이 출간되었습니다. 하나 둘 읽어주시는 분들의 후기가 쌓이고 있는데요. 놀라운 이야기가 많아요. 특히, 명작 <미생>을 언급하시면서 그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자세하고 흥미진진하다고 남겨주십니다. 아무것도 따지지 마시고 그냥 한 번 읽어주시면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나는 죽어도 못 읽겠다 싶으면, 옆사람이라도 한 명 붙여주십시오. 꼭입니다 꼭이요!
첫 번째 책에 주신 관심 덕분에 두 번째 책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인생에서 긴 시간을 차지한 ‘회사’ 이야기입니다. 제목처럼 전 여전히 ‘퇴사’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내년이면 영원할 줄 알았던 휴직이 끝납니다. 꼭 돌아갈 것 같았지만 이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책이 해답을 줄 수 있을까요?
직장에서 느끼는 온갖 사건과 감정이 담겨있습니다. 함께 즐겨주시면 저와 우리가 해나갈 고민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꼭 읽어주시길 추천과 부탁을 동시에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첫 번째 책과 마찬가지로 모든 인세 수익은 도움이 필요한 곳에 쓰입니다. 이번 책으로는 과로, 우울증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직장인들을 위해 기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