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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Oct 13. 2022

죽도록 싫은 아쉬운 소리

부탁이 어려운 고집

헉헉. 벌써 2시간째다. 이제 그만하자고 벌겋게 달아오른 애인의 얼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움직인다. 수없이 반복하고도 지치지 않고 이리로 저리로 목표를 향해 치닫는다. 이쯤이면 짠하고 나올 때가 되었건만 도통 소식이 없다. 한눈팔지 않고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끝이 안 난다. 터질듯한 열기를 내뿜으며 미친 듯이 들쑤시지만 나타날 기미가 안 보인다. 손안의 지도엔 선명한 목적지가 눈앞의 장면엔 안개같이 모호하다.


수년  무더운 여름날, 여행지에서 길을 헤매던 광경이다. 바로 몇십 미터 앞에 있어야  장소가 아지랑이처럼 잡히지 않아 답답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사막이 아니었다. 주택과 상점이 있고 주민과 주인이 번듯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주변을 손금 보듯   아는 그들에게 물어보면 간단히 풀릴 일이었다. 단지 물어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사지 멀쩡한 내가 지도까지 들고 있는데 남에게 도움을 구하는 상황을 용납할  없었다. 함께  여자 친구는 물어보자고, 아니면 자신이 직접 묻겠다고 했지만 모두 내게 막혔다. 시간이 흐를수록 즐거운 여행은 괴로운 고행으로 변해갔다. 결국 뻣뻣해진 고집은 뜨거운 더위에 쓰러졌다. 오래 빙글빙글 돌던 우릴 구한  친절한 행인의 어느 한쪽을 향한 손가락질이었다. 그전까지 없던 건물이 갑자기 나타나 그곳에 떡하니 있었다. 아직도  귀신이 저지른 만행이라 믿고 있다.


길을 묻지 않는 건 여전하다. 당장 온몸이 무너져 오도 가도 못할 경우가 아니라면 앞으로도 모르는 사람 잡고 구원을 요청할 일은 없다. 도와주면 쉬운 일도 어지간하면 직접 한다. 힘들고 귀찮아도 그게 훨씬 마음이 낫다. 집에서든 사회에서든 기본 방침이 그렇다.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야 하는 일이 벌어지면 일단 부르지 않고 먼저 고민한다. 남 없이도 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서면 혼자서 한다. 좀 더 오래 걸리고 복잡해지더라도 한결 속이 편하다. 가끔 꼭 필요한 상황을 무시해서 여행지 미아처럼 사서 고생을 하기도 하지만. 천성이 아쉬운 소리를 거부하고 부탁을 어려워한다.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하고, 할 수 없는 일은 덜 하고 만다. 외부에서 뻗치는 구원의 손길이 그저 부담스럽다.


누군가 필요한 상태로 노출이 되는 게 싫다. 홀로 서지 못하는 모습이 비치는 걸 견딜 수 없다. 남이 없으면 완성되지 못하는 결점이 부끄럽다. 괴팍한 아집 부리지 말라며 좋은 게 좋은 것만큼 편한 게 좋은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태생이 그런 걸 어찌하리. 백지장도 맞들면 낫지만 그래도 혼자 드는 게 좋다. 신세를 지는 순간의 신세가 초라하다. 내버려 두었으면 어떻게든 힘 빡 줘서 해냈을 일을 남의 손이 들어오자 몸에 힘을 빼고 의지하는 내가 볼썽사납다. 자기의 일은 스스로 알아서 척척척 하자는 CM송처럼 독립적인 인간을 꿈꾸는 나에겐 틈을 주는 게 옳지 않다. 밖으로 헬프 미(Help me)를 외치기보단 안으로 헬프 마이셀프(Help myself)를 종용하는 까닭이다.


폐를 끼치기 싫은 마음도 한몫한다. 도와줄 수 있냐고 묻는 것 자체가 미칠 영향을 따져보면 민폐다. 가능한 상황인지, 어떻게 해야 할지, 얼마나 해줘야 하는지 등 없던 고민을 나 때문에 가득 안게 된다. 각자 살기도 바쁜 세상에 내 한 몸 편하겠다고 남에게 던져 놓는 짓은 피하고 싶다. 머리를 굴리게 만드느라 소비된 그의 정성에 미안하다. 어떤 정보에 관해 묻기를 조심하는 이유도 똑같다. 사람에게 묻기 전에 할 수 있는 모든 정보의 수집을 원칙으로 한다. 내가 들일 발품으로 해결되는 걸 생각 없이 알려달라며 부담을 주기 싫어서다. 남의 시간도 내 것 못지않게 소중하다는 걸 잊지 않고 이기적인 질문을 최소화한다.


구조요청에 돌아올 반응이 겁나는 것도 사실이다. 거절당하면 이유와 무관하게 실망한다. 기대와 다르기에 당연하다. 사정을 이해해도 아쉬움은 남는다. 이럴 바엔 아예 꺼내지 말 걸 하는 후회까지 맴돈다. 관전 포인트는 상대가 수락한 후에 벌어지는 마음속의 딜레마다. 조금 전까지 동등했던 관계가 확실하게 기울어진 기분이다. 당신의 도움이 내게로 넘어오면서 갚아야 하는 빚이 돼버린다. 괜찮다는 말이 진심이라 해도 절대 괜찮아지지 않는다. 기한이 한참 지난 체납금이 통장을 따라다니듯 신경이 쓰인다. 신세를 갚기 전까진 깔끔하게 떨쳐 낼 수 없다. 심지어 먼저 내미는 손도 건네받지 않고 어색하게 되돌린다. 그 사람이 천사여도 안된다. 이처럼 받지 못해도 별로고, 받더라도 불편해질 게 뻔해서 애초에 시작을 안 한다. 내가 홀가분해지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혼자 떠안는 수밖에 없다.


이렇다 보니 정반대를 발견하면 신기하다. 부탁하는 데 거리낌이 없고 거절에 쿨하다. 자신은 필요하다고 말했을 뿐이고 상대는 사정이 안 되었을 뿐이라 여기고 넘어간다. 캐릭터가 다른 거라 부럽기도 하지만 때때로 선을 넘는 걸 보면 불쾌하다. 아니면 말고 식으로 일단 묻고 보는 사람이 그렇다. 껄끄럽고 번거로운 요청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건 황당하다. 받아 든 사람의 곤란한 기분이나 어렵게 거절해야 하는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른다. 보관소에서 맡긴 짐 찾아가듯 질문을 줄줄이 쏟아내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찾아보지 않고 하나부터 열까지 생각나는 대로 묻는다. 답변 속도는 네이버 지식인을 원하면서 내용 수준은 전문 컨설팅을 바란다. 무례한 태도로 원하는 걸 다 빼먹고 나면 휙 사라진다. 대부분 고맙다는 말도 함께 빼먹고.


 다른 특징은 지인 찬스에 강한 점이다. 지나가듯 이야기한 것도 까먹지도 않고 모두 챙긴다. 긴가민가해도 두툼한 얼굴답게 그쪽에 앉아있으니 뭔가  나은  없냐고 쉽게 묻는다. 조직에 속하다 보니 관련 업계 상품에 대한 지인 혜택 문의를 종종 받았다. 처음 생긴 명함으로   잡으려고 없는 것도 만들어서 제공했다. 의외로 만족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애걔, 겨우 이거?   안되나? 별거 아니네?' 같은 괘씸한 적반하장을 접하곤 바로 관두었다.  주고도 욕먹는 짓은 헛수고니까.  후로는 누가 물어도  모른다거나, 다른  통하는  낫다고 말해버린다. 나로선   보고   사이면 모를까 계속  사람에게 괜한 부담을 주면서까지 찾아 먹는  이해하기 어렵다. 내겐 무겁기만  도움의 빚이 이들에겐 깃털처럼 가벼운 것도.


충격적으로 들리겠지만 도움을 주는 건 좋아한다. 단, 나같이 도와달라 못하고 쩔쩔매는 사람에게만. 대놓고 이것 좀 도와달라고 하면 정황을 따져보고 적당히 대처한다. 예의를 갖춘 만큼만 기력을 쏟는다. 빌려준 돈 찾듯 덤비는 이에겐 귀가 안 들리는 척 넘어가기도 하고. 신나서 도와주는 드문 경우는 또 다른 나를 발견했을 때 진행된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주변에 손 벌리기는 싫어 겨우 버티는 자가 있으면 이거다 하고 달려든다. 동정의 감정을 쏙 빼는 건 필수. 나와 같은 종족의 특징을 훤히 꿰고 있기에 공짜가 아님을 알린다. 해결되고 나면 이러저러한 걸로 바로 갚아달라고. 빚 갚을 기회가 약속되면 그제야 마음을 열고 내 도움을 흔쾌히 받는다. 꽉 막힌 자신을 안쓰러워하는 마음도 없지 않다. 나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묘한 지점을 달래는 애달픈 쾌감을 느낀다. 그대로 죽으면 죽었지, 살려 달라는 말 한마디 못 할 게 보여서.


모든  억센 자존심 때문이다.  말을 쓰지 않고 마무리하려 했지만, 대체가 어려워 하릴없이 사용한다. 모른다고 인정하기 싫어서 묻지 못하고, 부족하다고 시인할  없어 도와달라 못한다. 꾸며댄 허세보다도 솔직한 처량이 두렵다. 타인에게 기대는 순간 무너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까 무섭다. 아직은 젊어서 괜찮다. 파고드는 따뜻함을 피해도 문제없이   있으니. 나중에 혼자서   있는  점점 사라질 때가 오면 어떠려나. 자립 생활이 무너져 인간의 존엄성이 희미해지면 흔히들 괴로워한다던데. 누구보다도 빨리 이루 말할  없는 고통에 뒤덮일  보여 벌써 짠하다. 오늘만 사는 놈이 괜한 내일 생각을 했다. 지금은 세울  있는 자존심을 모두 세울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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