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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Sep 25. 2022

스스로 어리석기 싫어서

화를 참는 이유

"이거 아빠다!" 뭔가 싶어 아들이 들고 온 만화를 들여다보면 뻔하다. 붉어진 얼굴로 부글부글하는 캐릭터. "어, 이것도 아빠다!" 이번엔 또 뭐길래 하며 고개를 돌리면 피식하며 끄덕인다. 온몸에 공기를 가득 넣고 터질 듯이 부풀린 가시복. 뾰로통한 표정으로 뾰족한 가시를 내보이면서 '나 건들지 마!'라고 외치는 자세. 둘 다 못난 내 모습과 닮아서 뭐라 말도 못 하고 "그러네..."로 마무리한다. 아쉬운 마음에 한 템포 늦게 가져다 붙여보는데. "그래도 아빠 많이 나아지지 않았어?" 할 말 마친 아들은 이미 멀리 뛰어가고 없다. 차라리 듣고 나서 "아니!"라고 하는 것보단 나은 건가.


화에 약하다. 쉽게 감정이 끓어오른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의인은 아니다. 혼자만의 잣대에 어긋나면 발동된다. 가진 상식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듣거나 상황에 부닥치면 따뜻한 이해보다는 뜨거운 분노가 차오른다.  전투태세로 변하는 전형적인 단계를 밟는데, 먼저 표정이 사라진다. 웃어도 무서운 얼굴이 정색과 함께 주변을 굳게 만든다. 예의 갖추어 상대를 배려하던 단어를 숨긴다. 날카로워진 말속에 의미 전달을 위한 최소한의 덩어리만 남긴다. 거기에 더해 강한 표현을 위한 거센 어휘가 곳곳에 배치된다. 찌르기를 장착한 말로도  통하면 다음으로 치닫는다.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내용은 의미가 없어진다.  이상 대화가 아닌 한쪽으로 던지는 말투로   없이 내리꽂는다.


시간이 흘러 가라앉고 나면 남는  개운함보다는 후회다. 화에 몰입하기 직전,  아래에서 끓어오르는 녀석을 느낄 때부터 끝을 이미 알고 있다. 장면이 마무리되고 나면 쭈그린 자세로   참을  그랬다며 못난 스스로 자책할   안다. 반복된 과거가 생각나 잠시 주춤하는 사이, 벌게진  다른 내가  올라온다. '! 이럴  시원하게 쏟아내야 . 맨날 참기만  거야?'하고 저번에도 성공한 논리를 대며 이겨 먹는다. 붉은 악마가 백전백승하던 시절에는 나를 두고 말이 많았다. 하루가 멀다고 시뻘건 기운을 뽐내던 신혼 때는 아내가 분노 조절 치료를 받아야 하지 않겠냐 했었고, 불만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던 사회 초년생 때는 머리가 아닌 성대에서 거친 말을 뽑아낸다는 평을 듣곤 했었다.


자유로운 표현이 뭐가 문제일까 싶었던 어리석음많이 줄었다. 다행히 기력이 점점 달려서  자주 내고 싶고  오래 유지하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가까이 지내며  보고 배우는 어린 가족도 생겨서 조심한다. 이런 세월과 환경이 90 정도의 영향이라면 10 정도가 게으른 깨달음이다. 나도 무엇이 잘못되고 고쳐야 하는지 알고 있다. 아는 것과 행동이 달라서 탈일 뿐이다. 물론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여전히 모르는  많아서겠지만. 담배가 백해무익하듯이 내가 뿜는 화도 좋을  하나도 없다고 인정한다. 심지어 내고 나면 제일 힘든  본인인 것도 파악했다. 하향곡선임은 틀림없으나 한창때   내던  이젠   정도 낸다고 하면 과한 후려치기려나.


떨쳐내지 못하는 화딱지를 과감하게 떼겠다고 새해가 되며 목표를 정했다. 의지만으로는 어려울 것 같아서 소원으로도 빌었다. 더도 말고 부정적인 감정인 '욱, 짜증, 화'를 절반으로 줄여달라고. 나름의 방법을 찾기 위해 여러모로 애도 써봤다. 확률을 낮추기 위해 말 자체를 줄였다. 사람을 만나 대화하다 보면 말을 많이 섞을수록 더 빠져들고 부딪힐 가능성이 올라갔다. 감정이 노출되는 표면적이 넓어진다고나 할까. 효과는 확실했다. 입을 확 닫아버리니 가치 판단할 필요가 없어졌고 뭐라 대꾸할 경우가 사라졌다. 자연스럽게 강한 표현의 빈도가 줄었다. 한 가지 단점은 말 많던 사람이 가만히 듣고만 있으니 오히려 화가 났다고 판단하며 당황한다는 사실이다.


2주 동안 좋은 습관을 기르는 모임에도 참여해 봤다. 다른 사람들은 일찍 일어나기, 매일 운동하기, 핸드폰 멀리하기처럼 작심삼일에 익숙한 주제를 잡았다. 신년 다짐에 꽂혀있던 난 '욱, 짜증, 화 3종 세트 없애기'로 미션을 적어 냈다. 설명도 그럴싸하게 늘어놓았다. 한 집에서 지내는 가족에게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며, 특히 아이에게 영향을 끼칠까 두렵다고. 공개하는 선언은 꽤 힘이 있었다. 위기와 고비가 없진 않았지만, 평소처럼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대참사는 피하며 14일을 보냈다. 이렇게 오랜 시간 평온하게 지낸 건 처음이지 않을까 싶으면서 자축했다. 아내와 아들에겐 티가 나지 않았는지 아무도 아는 체를 하지 않아서 아쉬웠다. 물어보면 내가 모른 척 일부러 지워버린 티끌을 찾아낼 것 같아서 굳이 꺼내진 않았다.



연초의 왕성한 기운으로 시작하던 야심은 한 해의 절반을 넘어가며 쥐 죽은 듯 고요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이 반성문이다. 여느 때처럼 옆 사람과 한바탕하고 나서 만인에게 공표하듯 붙여 두었다. 특유의 못난 점을 살려 상대를 후벼 판 잘못을 반성하고 사과하며 잊지 않기 위해서. 눈에 잘 띄는 곳에 두고 볼 때마다 마음에 새겨서 꼭 바뀌고 말겠다는 의지였다. 이쯤이면 되겠다 싶을 때 보란 듯이 떼어내겠다고 했다. 여전히 떡 하니 자리하고 있는 모양새가 뚜렷한 기약이 없어 보인다. 눈에 익어 정확히 어떤 그림인지 모르는 벽에 오래전부터 붙어 있는 액자처럼 가끔 이게 뭐지 하며 가까이 들여다볼 정도니.


새해 목표 같은 거 없이 살다가 난생처음 정했는데 그동안 왜 넘어갔는지 알 만하다. 어차피 달성이 어려우니 괜한 수고를 들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영리한 녀석. 이대로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지나가면 빚을 넘기듯 내년으로 밀어둘 공산이 크다. 한번 넘기면 편하게 또 그다음 해로 이어질 테고. 뭔가 나만의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초조함이 몰려온다. 품성이 착하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이런 다짐이 필요 없었을 테다. 그렇지 못한 이기적인 나를 위한 방식이 어디 있지 않을까 머릿속을 헤집는다. 궁하면 통한다더니 퍼뜩 스치는 내용이 있어 책을 뒤진다. 기억은 옳았고 찾고 말았다.


화를 내지 않은 것은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한 처신에 불과했다.

<그리스인 이야기 2권> (시오노 나나미, 살림)


고대 아테네 민주정치의 전성기를 이룩한 페리클레스가 언론의 자유를 무기로 자신을 조롱하는 자를 상대하지 않은 까닭이다. 절제 능력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자존감이든 자존심이든 누구 못지않게 높은 내게 통하는 이유였다. 생각 없고 부족한 사람으로 보이는 걸 죽도록 싫어한다. 어떤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충분한 고민과 나름의 이유를 가졌다고 여겨지고 싶다. '화'는 이 모든 걸 깨부수는 '독'이었다. 얼마나 모자라는지 대놓고 알리는 최악의 수단이었다. 문장을 읽고 또 읽으면서 내게 물었다. 순간을 주체하지 못해서 평생 자신을 깎아내리고 싶냐고.


방법을 갖췄다. 남이 불편해하고 기분이 상해서가 아니다. 그런 이유는 나를 먼저 생각하는 내게 번번이 무너져왔다. 당장 내 분이 풀리지 않는데 더 중요한 건 없었다. 계속 실패한 건 내 안의 고장 난 저울 때문이다. 내 쪽으로 고정되어 기울어진 상태를 쉽게 고칠 수 없다. 갑자기 생기지 않는 선한 마음을 바라는 건 무리수다. 잘할 수 있는 강점을 살리자. 단지 내가 못나 보이기 싫어서 화를 참겠다. 열을 내고 소리를 높이며 주워 담지 못할 나쁜 말을 뱉는 내 모습을 창피해하며 다스리겠다. 잘난 놈은 못돼도 못난 놈이 되는 건 막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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