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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Oct 27. 2022

남이 나를 위한다는 착각

나로 살아남는 외면

잘될 거야, 잘할 거야, 잘하고 있어, 잘될 수밖에 없어, 잘되면 좋겠어, 잘되길 바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지겹게 쏟아져 나온다.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어서일까. 흘려듣지 않고 귀담아듣는 이가 많다. 마치 들은 대로 따라서 외치기만 하면 그렇게 되고 말 거라는 듯이. 난 배가 불러 보기만 해도 질려 버린 음식을 대하듯 피한다. 행여나 속 빈 강정에 손이라도 댈까 봐 멀찌감치 물러선다. 고개를 세차게 저어 흔적조차 남지 않게 떨어낸다. 도통 이해할 수 없다. 생판 모르는 남이 무작위로 던진 근거 없는 희망 노래가 끊이지 않고 울려 퍼지는 이유를. 아무리 살기 힘들어도 그렇지, 지푸라기도 봐가며 잡아야 하지 않을까.


희망을 스스로 외치는 건 아무 문제가 없다. 본인의 삶이 잘 되길 바라는 게 당연하니. 나 역시 무조건 잘되고 말 거라는 확신으로 살아간다. 나 아니면 해 줄 수 없는 강력한 믿음을 부족하지 않게 붓는다. 의미 없는 무책임의 바람은 밖에서 불어온다. 어떤 상황일지라도 잘 풀릴 거라고 따뜻하게 살랑대며. 수상스럽게 나도 그를 모르지만, 그도 나를 모른다. 나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지만 녹음된 ARS처럼 반복한다. 안심하라며 꼭 잘될 거니까. 이유도 까닭도 논리도 배경도 없이 되풀이되는 지경을 바라보면 궁금스럽다. 그가 이걸 정말로 믿고 있는 건지, 밑져야 본전이니 일단 들이밀고 보는 건지. 어찌 된 일인지 헛된 기대를 심어준다며 잘못을 지적하는 이는 별로 없다. 잘되라고 쉽게 건네고 편하게 귀 잘 기울이는 잘잘 시대에 우린 살고 있다.


한편 안쓰럽기도 하다. 남의 가벼운 말이라도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 혼자서 마음을 다잡기 어려워 아무라도 도와주길 바라는 상태라면 그럴 수 있다. 불안하고 기댈 곳이 없어 밝은 말 한마디가 아쉬운 세상 탓이다. 사는 건 원래 힘든 거라고, 힘을 낼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고 뱉으려다 모두 나 같지 않을 테니 멈칫한다. 힘든 자는 잠시 내버려 두고 힘내라는 자에게 시선을 고정해본다. 전부 다 잘될 수 없다는 걸 알고는 있을까. 본인이 잘되고 있으니 남에게 쉽게 권할 수 있는 건 아닌지. 어쩌면 그가 잘되는 건 그의 말처럼 하면 잘될 거라 믿으며 따르는 무리 덕분 아닐까. 다 자신같이 잘되길 빈다고 다정하게 굴지만, 결국 본인이 먼저 잘되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 아닐지. 만약 남이 잘되는 만큼 자신이 덜 잘되어야 한다면 그때도 웃음기를 남길 수 있을까. 긍정의 전도에 진심이라면 제 것을 떼서 줄 각오는 최소한 해야 하지 않을지. 아니면 차라리 솔직하게 네가 따라주면 나는 더 잘될 수 있는데, 그러다 혹시 너도 잘될지 모르니 한번 들어볼래 한다든가.


이해가 어려운 영역이라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게 끝이 없다. 나를 벗어나면 집중이 안 된다. 좁은 마음이라 남에게 닿지 않는다. 기운이 거기까지 뻗쳐야 누가 잘되라고 빌든, 못되어지라고 빌든 할 텐데 그럴 여유가 없다. 내 것만 챙기기도 부족한 깜냥이다. 나와 달리 힘이 넘치는 바람에 남까지 돕는 이를 비비 꼬아 보지 않으면 납득이 안 된다. 아주 가끔 마음이 선하고 넓어 본인을 내팽개쳐두고 타인에게 헌신하는 놀라운 분도 있지만, 천사가 자주 내려올 리 없으니 제외한다. 누구처럼 일부러 눈에 띄는 곳에서 내 말 좀 들어 보라고 서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내가 신경 쓸 수 있는 최대 범위는 나까지다. 나를 넘지 못하는 생각은 대부분이 나 같을 거라는 확신을 응원한다.


요즘 희망과 붙어 다니는 단짝은 위로다. 한때 주름잡던 채찍과 당근의 시대는 끝났다. 달래주고 토닥이며 달다구리로 무장해야 시선을 끌 수 있다. 옳지만 싫은 소리는 인기가 없다. 현실을 직시하며 던지는 말엔 팩폭이니 인정머리 없다느니 마구 쏘아댄다. 세계를 뒤덮으며 조각조각 둥둥 떠서 공유되는 위로의 글귀를 보면 멍해진다. 재주는 없어도 듣기 좋은 소리라 맹목적 신임을 받는 분위기에 취하느라. 떠다니던 토막글이 모여 온 세상을 위로하고 말겠다는 의지로 가득한 책마저 등장하면 어안이 벙벙해진다. 진실만을 말하겠다는 괜한 고집만 꺾으면 나도 충분히 사랑받기 마땅한 저작물을 찍어낼 수 있을 거라 분해하며. 볼 때마다 신기한 확률 높은 흥행 가도에 아쉬움을 삼키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는 못 하겠다고 마음을 접는다. 온갖 괴로움과 슬픔을 덜어줄 방법을 덕지덕지 붙여 개발한 지친 우리를 위한 마법약의 우뚝 선 매출을 부러워하다, 차마 사 먹진 못하고 돌아서는 기분은 씁쓸하다.


위로하는 자와 위로받는 자는 통했을까. 그러고 나면 무엇이 달라지는지 알고 싶다. 시야가 편협한 데다 인간의 기본 소양이라는 측은지심마저 부족해 영원히 둘 사이에 끼지 못할 난 그저 궁금하다. 둘 다 만족했다고 소문이 나서 또 다른 커플 탄생의 행진이 이어지는 걸 테니. 분명 아픔이 줄고 기쁨은 늘어야 말이 될 텐데 가능한지 의심한다. 설마 달라진 것 없이 각자의 위안만 챙기고 끝난 건 아니려나. 주는 이는 다독였다는 으쓱을, 받는 이는 알아줬다는 인정을. 거친 추측이 맞아도 곤란하다. 상황은 변한 게 없는데도 둘이 계속 만나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는 노력 말고는 철저하게 외면하기에 나아지지 않는 미팅에는 발을 빼야 마땅하다. 남이 주는 위로로 힘을 얻는다는 건, 모르는 이가 던져준 희망만큼이나 기이하다.


수긍이 잘 안 되는 희망과 위로로 가득 찬 사회. 희망과 위로는 잘못한 게 없다. 출발점만 고치면 된다. 남이 아닌 나로부터. 이유는 간단하다. 직접 사는 건 나니까. 무슨 생각을 하든 마음을 먹든 행동하든 결정과 실천은 내가 한다. 남은 내가 아니라서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애초부터 담당자가 아니다. 조언자나 조력자 정도고, 기껏해야 부 담당자일 테지만 언제 보조가 책임지는 걸 봤는가. 인생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 어떤 경우라도 맡아야 하는 건 우리지 그들이 아니다. 시작이 틀렸다는 결론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다.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잘될 거라는 부푼 희망도, 힘내라는 따끈한 위로도 나에게서 나와야 의미가 있다.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이려면 그래야 한다. 중요한 건 남이 줄 수 없다.


한때 불던 나는 나로 살기 열풍을 보며 반가움보단 당혹감이 컸다. 먼저는 해도 그만  해도 그만인 소리를 싫어하는 버릇 때문에, 다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안타까움에.   말고는 모르는 바보같이 나나나 거리며 살았는데, 그러는  보통 일이 아니란  그때 알았다. 그제야 나와 같지 않은 주변이 자신을 지키지 못해 고통받는  눈치챘다. 안다고 해도 나만 보느라  어쩌진 않았지만. 나를 지키느라 바빠서 넘어지는 남을 곁눈질로만 흘끔거려왔다. 시간이 흘러 보니 문득 나로 살지  하는 , 남에게  위해 달라는 의존 때문이 아닐 싶었다. 옆에서 잘될 거라고, 괜찮다며 말해주지 않으면 곧장 무너지고 마는 상태는 위태로우니. 숨이 넘어가지 않는 이상 부탁 따위는 하지 않을 내겐 있을  없는. 불현듯 나는 도대체 어떻게 나로 살고 있는지 들여다보았다.


이 책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만 아는 사람이 가진 걸 쏟아내면서. 남에겐 관심이 없지만, 스스로에겐 호기심이 마르지 않는 자의 열정은 대단하다. 자신 외에는 무엇도 고려하지 않은 날 것이 그대로 담긴다. 때론 변태 같은 모습도 가리지 않고 실실 좋아하며 그려둔다. 어쩐지 이런 생각은 나만 할 것 같아서 동의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며 남긴다. 나만 바라보고, 나에게만 집중하며, 나로 사는 생활의 브이로그를 감칠맛 나는 글로 적는다. 시원하게 기록하다 보니 자기 계발이 따로 없다는 망상도 스친다. 잠재된 나로 살아남는 재능과 사상을 일깨우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을지. 복잡한 관계 속에 나라는 중심을 잃지 않고, 남의 억지와 어쩔 수 없는 건 내버려 둔다. 나만의 고집을 꺾지 않고, 옳다고 믿는 걸 계속하며 나아간다. 담은 이야기는 지금 내가 살아가는 광경과 똑같다.


쓰면서도 웃긴 건 나만 보며 사는 놈이 남 보라고 쓰는 행위다. 이걸 읽으려면 누군가는 남인 나를 기웃대야 하는데 어쩌라는 건지. 읽어줄 대상을 예상하는 것도 민망하다. 이러니저러니 꾸며대도 한마디로 나로 살고 싶은데 잘 안 되는 자라서. 알아서 하는 이는 쳐다볼 이유가 없으니 맞게 적어두긴 한 모양인데. 여기까지 고민하다 그래서 어쩔 거냐며 날려버린다. 내 영역이 아닌 걸 깜빡하고 주제넘게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나를 드러내며 쓰는 게 내 뜻이듯, 접근도 판단도 소화도 남이 알아서 할 테다. 이왕 썼으니 원대하게 바라본다면 필요한 사람 다 읽고 제 몫을 다해서 보기 좋게 폐기되는 거다. 한 명도 남김없이 각자의 나로 돌아가 남이 떠드는 이런 글을 찾는 이가 사라진 후에. 내가 봐도 희한한 구석이라 킥킥대며 고스란히 나를 찍어낸 여정이 그렇게 끝난다면 멋질 것 같다. 남이 뭘 먹든 사든 하든 관계없이 모두가 나만 보는 세상. 천덕꾸러기가 된 이 책이 사라질 그날을 꿈꾼다. 이것도 내 마음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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