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의 자격
정말로 괜찮을 때가 있다. 괜찮지 않지만 괜찮다고 말할 때와는 다르다. 시간이 지나서, 마음을 추슬러서, 시선을 돌려서. 나름의 애씀으로 지난한 과정을 거쳐 평정을 되찾고 지내는데, 훅 치고 들어오는 건 다른 이의 안부다. 가진 의미대로 편안하게 잘 지내는지 묻는 거라면 꺼낸 대답에 승복해야 한다. 본인이 괜찮다면 그런 줄 알면 된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되물으면 곤란하다. 그러지 말고 다 털어놓아도 된다며 인자한 얼굴로 다른 진실을 요구한다. 아직도 힘들고 속상한 거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을 가득 품고. 이후로 한동안 가장 싫어하는 대화가 이어진다. 괜찮은데 괜찮다고 하면 끝나지 않는, 생각해보니 조금 힘듦이 남아있는 것 같다는 정해진 답을 해야 끝나는. 만족하고 돌아서는 그의 뒤에 남은 내가 이젠 정말 괜찮지 않게 돼버린다.
어느 순간 안부는 위로를 대체했다. '잘 지내요?'라는 물음에 '행복하게 지내요!'라는 대답이 어색해졌다. 어쩐지 '그럭저럭 살지. 그냥 참고 지내. 힘들지만 나아지겠지.'를 벗어나면 안 되는 분위기다. 가볍게 시작하는 인사의 기능을 상실했다. 어려움을 기대하고 던지며 거기에 부응해야 자연스럽다. 바라는 방향이 있는 문답은 자칫 어긋나기 쉽다. 열린 질문이라 오해하고 답하다 보면 뒷머리가 얼얼해진다. 다른 쪽으로 튀려고 하면 잡아채서 제자리에 가져다 놓기 때문에. 스무고개처럼 맞춰가다 보면 한 가지는 분명해진다. 그들이 원하는 게 내가 가진 기쁨은 절대 아니라는 것. 궁금해하는 대상에 그런 건 확실히 없다.
지나가는 근황 토크에 반색하며 좋은 일을 열심히 늘어놓고 나서 애매해진 공기를 느낀 적이 있을 테다. 축하한다는 반사적 대응 후에는 대화가 뚝 끊긴다.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 아니라면 타인의 성취나 행복을 구구절절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배 아파하지 않으면 다행이니까. 와닿지 않는다면 반대를 그려보면 쉽다. 누군가 힘들고 슬픈 일을 털어놓으면 대화의 물꼬를 트게 된다. 세세하게 알기를 원하며 구체적으로 상황 설명을 요구한다. 안쓰러워하며 나도 그랬다며 묻지도 않은 본인의 사연까지 술술 꺼내면서 소통의 깊이가 더해진다. 가끔은 누가 더 최악인지 경연하면서 상대의 아픔을 약화하려는 눈물겨운 노력도 한다. 함께 바닥까지 가라앉은 경험으로 부쩍 가까워진다. 극과 극처럼 벌어진 기쁜 일과 슬픈 일을 대하는 열광의 차이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린 남의 기쁨에 취약하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른다. 서툰 표정과 말투로 어쩔 줄 몰라 한다. 축하가 어렵기 때문이다. 축하보단 위로가 쉽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우월감을 느끼는 위로가, 아래서 위를 올려다보며 열등감을 누르고 던져야 하는 축하보다 편하다. 우리라고 뭉뚱그렸지만 누군가는 다를 수 있다. 티끌 없이 맑은 마음으로 함께 웃으며 기뻐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보면서도 신기하지만 내가 그렇지 않기에 드문 경우라고 믿고 싶다. 특히 같은 곳을 바라보는 입장으로 먼저 이룬 자에게 건네는 인사에 질투가 없다는 건 충격이다. 거짓 축하조차 꺼내기 힘들어하는 나는 대부분의 우리를 이해한다. 나의 괜찮음과 즐거움에 어색해하는 남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괜찮다는 기준이 남과 달라서 생기는 오해도 있다. 어지간하면 내가 처한 상황을 좋다고 여긴다. 작은 성공이 있으면 아쉬워하기보단 이게 어디냐고 부풀려서라도 만족한다. 실패와 고난은 이만하길 다행이라고 꾹꾹 눌러 포장하며 달랜다. 좀 병적으로 억지를 부리나 싶어질 정도다. 100 중 1이라도 좋으면 다 좋은 거라 우긴다고 설명하면 쉬우려나. 100 중 1이 좋지 않다고 달려들어 매달리는 사람과는 반대다. 물이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며 타박하지 않고, 괜찮지 않은 부분을 일부러 파고들지 않는다. 어디라도 있을 수밖에 없는 부족함을 꼬치꼬치 캐물어 찾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이와도 거리가 멀다. 어떻게든 걱정할 대상을 만들어 안타까워해야 후련해지는 자도 내 스타일은 아니다. 밝은 면과 지내기도 바쁜 나로선 이해할 수 없다. 내가 혹시라도 괜찮을까 봐 물어보는 그들의 안부가 불편하다.
남에게 주는 관심은 정성이 필요하다. 자기만 바라보기도 바쁜 처지에 힘을 나누어 꺼내는 행위니까. 유독 밖으로 뻗는 기력을 아까워하며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내겐 대단한 일이다. 닿으면 시작될 경청과 이해의 수고로움이 크게 다가와서 어지간하면 손을 내밀지 않는다. 반대로 남이 다가와주면 무척이나 반가워한다. 그만큼 어려운 일인 걸 알아서인지 기다렸다는 듯이 털어놓는다. 그럴 때마다 상반된 경험이 유쾌하지 못하다. 슬픈 일은 나누면 줄어들지만, 기쁜 일은 제대로 나누지도 못한 채 흐지부지된다. 경사는 깜빡하고 놓쳐도 조사는 빼먹지 말고 챙겨야 한다는 원리와 같은 걸까. 잘 나가면 뭐라도 하나 트집 잡아서 끌어내리려는 오랜 관습 때문인 건지. 없던 것만도 못한 상황을 겪고 나면 타인이 궁금해하는 게 마냥 좋지만은 않다.
덕분에 살가운 사람보단 묵직한 이가 더 좋아진다. 말이 많아지고 접촉이 늘어날수록 실수와 갈등이 늘어나는 걸 깨달은 탓이다. 어떤 일을 겪고 있든 곁에서 말없이 믿어주는 사이가 더 힘이 된다. 좋은 일에도 거짓 호들갑 떨지 않고, 힘든 일에도 과한 동정 주지 않는. 그럴듯한 기준 같지만 결국 내 마음대로의 판단이다. 그동안 그가 이어온 행적이 결정한다. 무심한 듯했지만 모두 간직하고 마음을 보탰던 기억이 쌓이면서 그를 인정한다. 남과 대화하는 이유는 당장 눈에 보이는 커다란 도움을 바라서가 아니다. 속에 있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누군가 들어주기를 바란다. 그냥 내가 이렇다는 걸 그렇다는 걸 알아주기만 해도 된다. 편하게 어떤 말이라도 할 수 있다는 건, 큰 복이자 대단한 인연이다.
남의 상황을 물을 땐 바람과 판단을 빼자. 안 좋은 일을 달랜다며 챙기려는 자기만족, 괜찮지 않은 점을 눈 씻고 찾아내려는 시선. 모두 어렵게 답하는 당사자가 기대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불편함이다. 행복을 궁금해하지도 않으면서 불행만을 확인하고 싶어 하지 말자. 괜찮다면 괜찮은 줄 알기를. 어떤 대답이 돌아와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만 안부를 물으면 좋겠다. 타인에 쏟을 관심도 적고, 축하에 취약한 난 아마 앞으로도 먼저 묻는 일은 잘 없을 것 같다. 어설픈 반응으로 관계를 망치고 싶진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