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쓰기 시작한 지 햇수로 3년 차. 지금까지 딱 한 번 펜을 집어던질 뻔한 순간이 있었다. 쓰던 글이 운명 같은 기회를 만나 이름 박힌 첫 번째 책을 내고 난 직후였다. 내 안의 벅찬 마음과 책 속의 따뜻한 온기가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던 그때, 스리슬쩍 파고든 말 한마디가 폐부를 깊숙이 찔렀다. "출판사랑 '교묘'하게 책을 만들었네요." 어지간하면 당황하지 않는 두꺼운 낯이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축하와 칭찬에 익숙하던 시절이라 내가 모르는 새로운 표현인가 싶어 반응을 참고 설명을 기다렸다. "그래 봤자 호주 사는 이야기일 뿐인데 아빠 육아로 포장했잖아요." 깎아내리기로 작정한 공격에 제대로 반격도 못 하고 당했다. 아직 책을 읽지 않았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며 이해를 도모했지만, 분명 상대는 누구보다도 먼저 구해 읽었다고 전한 뒤였다. 순식간에 거짓으로 그럴듯하게 속여 만든 책의 저자가 된 그날, 밤을 지새웠다.
겨우 정신을 바로 잡고 짐작해보니 무의식이 시킨 트집임을 알았다.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책을 내고 싶은 소망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글은 쓰고 있지 않지만, 언젠가 이루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 애초에 출간 생각이 없던 내가 꾸준히 쓰다 보니 나왔다는 책을 세상에 내놓자 심기가 뒤틀린 모양이었다. 교묘한 책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요청한 적도 없는데 주변에 열심히 내 책을 보여주고 심사평을 받아와서 들이댔다. '누굴 보여주니 별로 어렵게 육아하는 것 같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쉬면서 애 보는 건 누가 못하냐고요. 이 정도로 널널하면 누구나 할 수 있겠다네요.' 별거 아닌 내용을 책으로까지 굳이 만든 사람이 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부러움과 질투에 기반한 애쓰기는 효과를 제대로 거두었다. 쪼그라든 초보 작가는 가치 없는 이야기를 괜히 엮은 건가 싶어 애꿎은 책만 쏘아보며 지냈다.
다행히 나와 같은 시선으로 바라봐준 이들 덕분에 조금 나아질 때도 있었다. 내 마음을 알아준 독자의 서평, 인터뷰 요청, 강연 의뢰, 원고 청탁이 이어졌다. 그런 감동적인 순간 속에서도 끔찍한 기억은 틈틈이 살아났다. 이런 게 흔히 말하는 트라우마인가 싶었다. 절대 지울 수 없어 가슴 한편에 새겨져 있다 잊을만하면 떠올랐다. 괴로워 미칠 것 같아지면 자다가도 벌떡 깨서 책장으로 향했다. 지은이가 내 이름으로 적힌 책을 뽑아 들고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읽어댔다. 의미 없이 글자를 낭비하며 채워두었다는 자책을 던질 만반의 준비를 한 채로.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책은 처음과 달라진 게 없었다. 아빠도 함께하는 육아가 당연해지길 바라는 초심이 곳곳에 서툴지만 뚜렷하게 담겨있었다. 흔들린 건 책이 아니라 내 마음이었다.
하마터면 본질을 놓칠 뻔했다. 내면에 담긴 의도가 아닌 겉을 둘러싼 책에만 관심 있는 자의 허튼소리 때문에. 왜 쓰려고 했는지는 알고 싶어 하지 않고 어쩌다 책을 내게 된 걸까만 궁금한 자의 퀭한 눈빛에 시선을 빼앗겨서. 전체 분량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타국 정보에 꽂혀 궤변을 늘어놓는 독자도 아닌 비평가에게 놀아나는 걸 멈췄다. 너덜너덜해지고 갈기갈기 찢긴 마음을 조각조각 천천히 붙여나갔다. 깁고 꿰매는 과정에도 방심하면 언제고 비수 같은 말이 살아나서 날아들었다. 떠올릴수록 손해라는 걸 알면서도 지독한 상처는 쉽게 덧났다. 처음 당한 부상에 치료법을 찾지 못하다가 궁지에 몰려 결국 스스로 극약을 처방했다. 눈에는 눈과 이에는 이처럼, 독에는 독으로.
독기를 품고 지냈다. 뿜을 수 있는 독한 기운은 한 종류뿐이었다. 내 책을 믿으며 더 많은 이에게 다가가도록 멈추지 않고 알리는 행동. 밀쳐내고 잡아 내리려는 거친 손아귀를 버티려면 더욱더 거세게 몰아치는 수밖에 없었다. 한 명이라도 내 편을 만들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쓸데없이 나무를 괴롭혀서 만든 헛소리에 머물지 않도록 보다 여럿이 인정하길 바랐다. 없던 일로 돌리지 못할 그의 뾰족한 말을 꼭 꺾어내고 싶었다. 덕분에 지치지 않고 홍보를 꾸준히 할 수 있었다. 다음 신간에 밀려 출판사의 마케팅 지원이 끝나도, 판매보다 반품이 더 많은 인세 보고를 받아도, 중고 서점에 벌써 깔린 책에 놀라도, 책을 함께 만든 편집자가 퇴사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나까지 포기하면 정말로 눈앞의 책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세상에 사라져 마땅한 책이 아닌, 꼭 필요한 책이라고 혼자라도 높이 들고 외쳐야만 했다. 끝을 알 수 없는 버티는 날이 계속되었다.
참아 온 눈물이 터진 건 어느 새벽 모르는 사람에게 받은 짧은 편지 때문이었다. 아내의 임신을 확인하고 서점에서 만난 내 책을 읽은 젊은 예비 아빠였다. 많은 공감과 큰 감명을 받았다는 그는 덕분에 아빠로서의 역할을 이해하고 행동에 옮길 수 있을 거라며 감사를 전했다. 내가 만들어 놓은 길을 본인도 따라가겠다는 말로 힘차게 끝을 맺었다. 누군가 마음속에 들어왔다 나간 듯한 기분은 틈을 보이기 싫어 세워둔 감정의 벽을 단숨에 허물었다. 그렇게 새어 나온 울음은 한동안 그칠 줄 모르고 이어졌다. 쌓아둔 게 많았는지 꺼내고 꺼내도 밑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마지막 물기를 닦아내곤 정성을 다해 답장을 썼다. 어딘가에 당신처럼 알아주는 이가 꼭 있을 거라 믿어왔다고. 새롭게 태어날 세 가족을 위해 움직이는 아빠의 모습에 밝은 화목만 보인다고 축복했다. 독기 서린 작가의 억울함은 단 한 명의 구세주를 만나 풀렸다.
몰래 감춰둔 눈물을 쏙 빼놓은 사건 이후 나와 책을 함께 옭아매던 교묘함은 서서히 옅어졌다. 사회에 외치고 싶은 내 목소리를 찾는 곳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여성가족부의 제안으로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 중요한 부부의 육아 균형을 강조하는 연재 글을 두 달에 걸쳐 올렸다. 서울문화재단의 주최로 열리는 육아하는 아빠 모임에 초청되어 두 달간 참여했다. 얼마 전에는 활발하게 운영되는 결혼 커뮤니티의 에디터에게 정기 기고를 부탁받았다. 하나같이 내 책을 보고 찾아온 인연이었다. 쉽게 읽히면서도 중심이 잡혔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글이라며 한목소리로 모았다. 여러 부름 속 어디에서도 교묘하다는 판단은 들려오지 않았다. 내가 쓰고도 모른 척하고 싶었던 힘겨운 나날이 점점 흐릿해져 갔다. 뽑히지 않을 것 같았던 단 한 명의 억지가 조금씩 헐렁해지며 뿌리를 드러냈다. 마침내 흉터 없이 상처가 아무는 기적이 벌어졌다.
책이 나온 지 일 년이 되던 9월의 마지막 날, 이제는 연락이 뜸해진 두 곳에서 나를 찾아왔다. 우연히도 똑같은 소식을 들고 왔는데, 양쪽 모두 흥분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한쪽은 나와 책을 만들고 이직한 편집자, 다른 쪽은 출판사의 현재 담당 편집자. 연초에 신청하고 기별이 없길래 여느 공모전처럼 으레 떨어졌겠거니 하고 있던 <세종도서>에 선정되었다고. 벅찬 감동으로 가득한 두 사람의 축하 인사를 멍하니 바라보며 현실인지 헷갈렸다. 눈으로 직접 봐야 직성이 풀리는 답답한 저자는 손수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발표한 결과를 꼼꼼히 뜯어봤다. 그동안 쓰면서 뭔가 되어 본 건 처음이었다. 항상 탈락하고 나서 합격한 남의 글에 대한 심사평을 읽으면서 어림짐작했었는데, 이번엔 내 것도 포함되었다는 생각에 온몸에 힘이 들어가며 넘치는 정성을 쏟았다. 화면이 뚫어져라 읽고 또 읽었다. 외워질 때까지 반복하며.
가치가 높고 국민 독서문화 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도서를 선정하여 전국에 보급하는 사업의 일원이 된 순간은 믿기 어려웠다. '교양부문'이라는 타이틀을 내 것으로 해도 될까 망설여졌다. 교양이 함양되는 데 도움이 되고 풍요롭게 만들 수준이라는 선정 기준이 낯설었다. 교양이라는 단어에 묘한 기시감을 느끼던 중 문득 책 말미에 적어둔 바람이 떠올랐다. '부모만을 위한 육아서에 그치지 않고 우리 모두를 위한 교양서를 꿈꾼다.' 나는 처음부터 이렇게 되길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잊고 지내던 소원을 되찾자 내 것 같지 않던 심사 의견이 꼭 들어맞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 사회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사유의 다양성을 추구, 동시대의 문제를 예리하게 포착하여 독자 개인의 성찰과 사고의 폭을 넓히고자 하였다.' 정말로 이러려고 쓴 책이 맞았다. 구현 가능성을 떠나 의도와 목적은 분명히 그랬다.
모두 덜어내었다고 착각했던 눈물은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흥건히 젖은 눈으로 자리에 앉아 또 다른 나인 책을 꺼내 들어 펼쳤다. 표지부터 뒷장까지 처음 보는 사람처럼 천천히 넘겼다. 그때의 나와 다시 마주하며 우리만의 대화를 진하게 나누었다. 책을 쓰다듬으며 잘했다고 말해줬다. 쓰길 잘했고, 버티길 잘했다며. 바른 생각으로 옳은 책을 만든 거라고. 책에 쓴 대로 느리지만 필요한 변화를 위해 분명히 나아가고 있다고. 이렇게 내 첫 번째 책은 처음 맞이한 생일에 세상을 향한 새로운 날개를 달았다. 다시는 책과 나를 믿는 마음을 놓치지 않겠다.
2022년 세종도서 교양부문에 『아빠 육아 업데이트』가 선정되었습니다!
<세종도서>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우수 출판 콘텐츠 제작 활성화를 위해 가치 높은 도서를 선정하여 전국에 보급하는 사업입니다. 주신 관심과 사랑 덕분에 더 많은 독자분을 찾아뵙게 되어 감사드리며 알립니다. 갑자기 제 책이 당기시거나, 선물할 분이 떠오르셨을지도 모르니 링크를 달아둡니다. 어쩐지 뻔뻔함이 좀 더 강해진 기분입니다. 하하.
언제나 멀지 않은 곳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얼굴을 볼 수 있든 없든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이어져 있다고 믿습니다. 쓰고 읽는 행위로 서로를 느끼는 지금을 사랑합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교보문고 https://bit.ly/3u91eg1 (해외 배송 가능)
예스24 https://bit.ly/3kBYZyT (해외 배송 가능)
카톡 선물하기 https://bit.ly/2ZJLF3s (필요한 분이 떠올랐다면 바로 선물해보세요!)
세상에 제가 쓴 책이 나왔습니다. 애만 만들고 아빠인 척하던 제가 변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아닌 척 모른 척했지만 저도 그저 엄마가 애를 키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많아져서 함께하는 육아가 당연해지는 날을 꿈 꿉니다. 책 표지에 적어 둔 것처럼 인세 수익은 모두 필요한 아이들에게 기부합니다. 다른 욕심 없이 오로지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져서 세상이 변하길 바랍니다. 아이가 있거나 아직 없거나 다 컸거나 심지어 없을 예정이어도 읽으면 좋습니다. 엄마 아빠가 함께하는 육아를 아이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이해해야만 바뀌기 때문입니다.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필요한 분들에게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순간을 나눌 수 있어서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