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무언가 생각이 정리되었을 때, 하고 싶은 말을 품고 달려오며 신나서 부르는 소리다. 예상이 매번 틀려 마음을 열고 듣는 데 익숙해져 간다. 이번엔 또 어떤 기상천외한 이야기일까. "아빠는 '으르렁'을 잘해서 어디에서도 잘 살아남을 것 같아!" 여러 생각이 스치면서 표정 관리가 어렵지만, 해맑은 아이 얼굴을 보며 놀란 듯 모른 척 부연 설명을 요청한다. 야수처럼 부르짖기를 잘하니 어떤 사람도 동물도 못 건드린다는 천진난만하게 이어지는 사연. 참고 참는다고 하지만 참지 못해 뿜어져 나오는 모든 화를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 일상의 CCTV나 생활의 브이로그가 따로 없다. 나와 붙어있는 아들에게 모두 적혀있다. 혹시 잘못 기록된 게 아닐까 싶어 대화를 시도한다.
아빠가 자주 그러지는 않지? 정말 어쩌다 그러는 거 맞지? 하더라도 짧고 굵게 하고 마치지? 범죄자의 빤히 보이는 거짓 진술이 우스운 형사의 표정으로 대답하는 아이. "아빠는 계속해서 크게 잔소리를 하지. 그땐 아무 생각 없이 빨리 끝나기만 바라고 있어~" 허를 찔린 채 멍하니 있다가 최근에 겪은 에피소드가 문득 떠올랐다. 잊을만하면 벌어지는 밥상머리 전투. 소재는 다양하지만 결국 밥 좀 잘 먹자는 실랑이. 다음 일정이 있어 대충 마무리하고 아들과 차에 탔다. 어쩐 일인지 집에 있기로 한 아내, 파랑도 아들 옆에 앉았다. 그런가 보다 하고 부글대는 속을 안고 말없이 다녀왔는데, 나중에 듣고 보니 이럴 수가. 아들이 엄마에게 꼭 같이 타자고 부탁했단다. 아빠랑 둘이 차 타고 가면 가는 내내 똑같은 이야기 계속한다고. 죄가 많은 아빠는 깊이 반성하며 이제부턴 할 말이 있으면 화를 빼고, 딱 한 번만 단호하게 알려주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온 제보에 의하면 아직 멀었다고 판단한다. 엄마와 아빠는 항상 아들 편이라는 파랑의 응원 메시지에 아들이 이렇게 반응했다고. "음, 아빠는 가끔 아닌 것 같은데?"
그 아빠의 그 아들이라 둘 다 고집이 세다. 서로 사랑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다. 사람 대 사람이라 당연하다고 넘기기엔 내 자리가 유별나다. 어른과 아이라는 차이,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로 보면 나의 부족함이 백번 옳다. 부딪히고 못마땅해도 슬기롭게 대처하며 어린 친구에게 좋은 모습으로 찬찬히 알려줘야 한다. 아니라면 가르침에 실패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못난 행동을 알게 모르게 물들이게 되니까. 먹지 않는 음식이 명확하고 입이 짧은 아이는 나를 닮았다. 어른이 되어 많이 나아진 지금도 종종 삐져나오는 음식 가려 먹기가 영향을 주고 있을 테다. 자기는 안 먹기로 정한 건 손도 대지 않으면서 아이에겐 꼭 시도해보라고 권한다. 선을 넘는 농담 던지기도 그렇다. 한 번은 등굣길에 아들이 아빠는 맨날 방학이라서 부럽다 했다. 그냥 왔다 갔다 데려다주기만 한다고. 이젠 아들 너마저 전업 아빠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거냐며 본때를 정색으로 보여줬다. 아빠도 아빠 할 일 하러 다닐 테니 네가 알아서 학교 다녀오라고. 눈물을 글썽이며 농담이라고 사과하는 아들에게 다른 사람 기분을 생각해야 한다고 타일렀다. 생각에 잠긴 듯한 아이의 얼굴을 보며 교훈을 심어 주었다는 만족감에 빠져있는 찰나. 아빠도 자기랑 엄마 기분 안 따지고 장난치지 않냐고 질문 같은 일침을 가해서 인정하고 말았다. 주 양육자로서 제일 많이 붙어있는 내가 아들의 인격 형성에 지대한 지분이 있음을 하릴없이 받아들이는 바이다.
다행히 우리 사이에 움찔하는 상황만 있지는 않다. 밝은 영향이 빛나는 장면도 많다. 몸이 커진 만큼 마음이 깊어진 아이와 진한 대화를 나눈다. 배우는 걸 좋아하는 아들은 대학과 직업에 관심이 많다. 알고 싶고 되고 싶은 게 점점 많아져서 두 손이 모자란 상황이다. 먼저 겪은 우리 부부의 경험을 자주 묻는다. 거르지 않고 솔직하게 말해준다. 시켜서 하는 공부를 하느라 좋아하는 걸 찾지 못했고, 늦게나마 지금 열심히 알아보고 있다고. 엄마 파랑이 도전하려는 진로를 알려주고, 내가 계획하는 공부에 관해 들려준다. 꼭 직업으로 연결되지 않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꾸준히 하는 매력도 알려준다. 쓰는 데 푹 빠진 나를 보며 아들이 묻는다. 아빠는 도대체 언제 책을 두 권이나 쓴 거냐고. 자신이 잠든 새벽 시간을 이용한다는 설명을 듣고도 반신반의하는 얼굴이다. 옆에서 보고 자란 덕분인지 원하는 게 있으면 느리지만 천천히 빠져들며 해본다. 자신에게 맞는지 아닌지 시간을 넉넉히 가지고. 배우고 싶다며 시작한 활동에 쉽게 질리거나 지겨워하며 그만두지 않는다. 음미하며 알아가는 아들의 태도엔 호기심과 진지함이 가득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속해보는 그 자세 그대로.
유독 아빠가 주인공이 되는 날이 많았던 지난 두 달. 한국에 없던 아빠의 날을 맞이하는 기분은 늘 새롭다. 아들이랑 파랑이 소곤대며 작전을 짠다. 모른 척하고 있으면 당일에 서프라이즈가 펼쳐진다. 정성 가득한 그림과 감사 카드, 근사한 팔찌까지 정신을 못 차린다. 하이라이트는 다양한 쿠폰이었는데 뽀뽀, 안마, 심부름은 이해가 되는데 같이 놀기는 왜일까. 날 위한 선물에 슬쩍 끼워 넣은 자신의 바람이 귀엽다. 다음은 내 생일이었는데 아이로 정신없이 지내는 집이 그렇듯 오전이 다 되도록 가족 아무도 몰랐다. 다른 일로 바쁘기도 하고 원래 별 감흥이 없어 가만히 보냈다. 온몸에 소름이 돋은 채 불현듯 깨달은 파랑이 난리를 피웠다. 혼자서 잘 나가지도 않는데 차를 끌고 부랴부랴 쇼핑몰로 향하며. 준비물과 선물을 마련하고는 학교 마친 아들을 데리러 가서 긴급상황을 알렸다고 한다. "큰일이다, 오늘 아빠 생일이야!" 정말 큰일 맞는다며 깜짝 놀란 아들도 합세해서 내 생일 저녁상을 차렸다. 덕분에 조용한 하루 끝에 시끌벅적 파티로 마무리되었다. 겨우 만회한 두 가족의 안도하는 얼굴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더 생겼다.
파티 플래너로서 한몫할 정도로 자란 아들. 혼자서 해나가는 영역이 넓어진다. 집안일을 도우며 용돈벌이도 해본다. 처음으로 혼자서 빨래를 개는데 깜짝 놀라 했다. 이렇게 오래 걸리는 일인 줄 몰랐다며 집안일의 위대함을 조금 이해한다. 마트에서 필요한 물건 가져오기도 척척 한다. 호박을 오이로 가져오는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우리 없이 다녀오는 장면이 낯설기만 하다. 혼자서 무언가 해내면 칭찬해주었더니 요즘엔 몰래 딴짓도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면 내 눈을 피해 아이패드를 만지작거리다 화들짝 놀라기도. 멀리 다녀오다 길이 막혀 늦어버린 하교 시간의 대처도 훌륭했다. 끝나고 만나는 장소에 엄마 아빠가 없자 엇갈린 줄 알고 교실로 돌아갔었다고. 거기에도 없어 다시 돌아 나오는 길에 우릴 발견하곤 안심의 눈물이 쏙 나왔다. 학년말이면 등장하는 내년에 같은 반 되기를 원하는 친구 명단도 단단하게 변했다. 작년까지 짝사랑하듯 좋아하던 새침데기 친구를 빼놓았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서로 함께 즐거운 친구들을 찾은 모양이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광경은 언제 봐도 개운하다.
짜증과 욱을 동반하여 잔소리하는 건 자식을 믿지 못해서다. 알려주는 것과 분명히 다르다. 말이 길어지고 목소리가 높아지는 순간, 누구에게도 좋지 않은 시간으로 흘러간다. 아기가 아닌 아이를 보면서 뭐가 그렇게 미덥지 않은지 참기가 어렵다. 아니다 싶은 나만의 판결이 내리면 다음은 차가운 재판장으로 변한다. 아이만의 사정이 있는 걸 알 때도 되었는데 듣기보단 말하기가 먼저다. 어떤 마음이었는지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래서 기분이 어땠는지 먼저 들어주고 알아줘야 하건만. 아들은 이런 모지리 같은 아빠를 여전히 굳게 믿고 있다. 혼자서 해보려는 행동에 앞서 내게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아빠, 나 믿지?" 그럼, 믿고말고!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달라질 건 나 하나다.
* 매일 쓰는 진짜 일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급 정보가 있지도 않은 아이와 지내면서 겪는 온갖 후회와 반성의 잡생각 뭉탱이 '육아 생존기'를 애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로서 기록하는 글을 쓰고 나면 자주 듣는 말이 있어요. 어떻게 아빠가 이런 육아 일기를 쓸 수 있냐고요. 부럽고 신기하다고요. 정말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혀 관심 없던 전과 달라진 건 사실입니다. 그 변화의 일대기는 제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에 담겨있습니다. 변화를 원하신다면 권해봅니다. 또 누가 변할지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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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제가 쓴 책이 나왔습니다. 애만 만들고 아빠인 척하던 제가 변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아닌 척 모른 척했지만 저도 그저 엄마가 애를 키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많아져서 함께하는 육아가 당연해지는 날을 꿈 꿉니다. 책 표지에 적어 둔 것처럼 인세 수익은 모두 필요한 아이들에게 기부합니다. 다른 욕심 없이 오로지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져서 세상이 변하길 바랍니다. 아이가 있거나 아직 없거나 다 컸거나 심지어 없을 예정이어도 읽으면 좋습니다. 엄마 아빠가 함께하는 육아를 아이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이해해야만 바뀌기 때문입니다.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필요한 분들에게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순간을 나눌 수 있어서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