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에 미쳐있는 아들이 어느 날 툭 옛날이야기를 던졌다. 처음으로 학교에 들어간 뒤, 쉬는 시간에 축구를 열심히 하고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함께 땀 흘린 친구들과 모여 앉으려는 순간, 한 친구가 아들에게 외쳤다. "넌 도움이 된 게 없으니 우리와 같이 앉을 수 없어." 아직 몸놀림이 서투르던 시절이라 공을 제대로 다룰 줄 몰랐을 즈음이었다. 모진 친구의 말에 당황한 아들은 자리를 옮겨 다른 친구들과 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번 쉬는 시간에도 축구를 했는데 그땐 멋지게 슬라이딩 태클로 공을 뺏었다고 했다. 그러자 못된 말을 했던 친구가 그제야 자격이 된다며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고. 어이없는 가스라이팅이 반복되었지만, 다행히 친절하고 착한 다른 친구들을 만나 아예 팀을 바꿔서 축구를 즐기게 되었다는 아이의 고백. 들으며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기 어려워하다가 문득 그때쯤 아들이 갑자기 축구를 배우고 싶어 했던 게 떠올랐다. 그렇게 꼬셔도 미루던 축구 레슨을 스스로 원했고, 나와 놀 때도 늘 축구를 하자고 했었고, 혼자서도 틈만 나면 공을 다루며 연습했었다. 짠한 속사정도 모르고 그저 나의 축구 사랑이 피를 타고 전해진 줄만 알고 흡족했었다.
내가 대신해줄 수 없는 힘든 시간을 이겨낸 아들의 축구 사랑은 그야말로 대단하다. 눈을 떠서 눈을 감을 때까지 오로지 축구 이야기뿐이다. 갑자기 바뀐 좋아하는 선수, 학교에서 경기 중에 벌어진 상황, 영상에서 본 과거의 기록 등. 골을 넣고 나서 선보이는 다양한 세레모니를 하나씩 따라 하더니 이젠 독특한 자신만의 동작과 표정을 만들었다. 본인 생각대로 플레이하고 나면 나오는 아들 특유의 얼굴과 제스쳐를 보기만 해도 기분이 같이 좋아진다. 하교 시간에 데리러 가면 바로 빠져나오기 어렵다. 교실 문밖에 나와서도 공만 보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한참을 놀다 돌아선다. 마치 내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듯 익숙하게 바라본다. 나도 등교할 때부터 마치고 나서도 공만 쫓아다니며 하루를 보냈다. 과거를 눈으로 생생하게 느끼는 경험에 종종 소름이 돋는다.
부모의 욕심은 끝이 없는지 물이 한창 들어올 때 어떻게든 노를 잘 저으려고 생각이 바쁘다. 입이 짧고 먹는 데 관심이 없는 아들에게 대놓고 권유한다. 이 음식도 저 음식도 모두 축구선수가 몸을 위해 잘 먹는 거라고. 빠짐없이 모두 그렇다고 해대는 나의 어설픈 추천을 바로 아이는 눈치챘다. "이거 그냥 날 먹이려고 하는 말 같은데?" 쉴 새 없이 뛰노느라 나아진 아이의 체력을 시험할 겸 아내, 파랑이 함께 달리기를 뛰고 왔다. 4킬로미터를 쉬지도 않고 같이 훌쩍 뛰었다는 아들. 가녀린 녀석이 이렇게나 강인해졌을 줄이야. 역시 건강엔 축구가 답인가. 일주일에 한 번 집중해서 듣는 방과 후 축구 교실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더 어려운 반에 들어가서 배우고 싶다는 요청에 상위 클래스에 넣어주었다. 자신이 원한 선택을 받아들이고 당당히 어려움을 겪는 아들이 멋졌다. 좋아하는 걸 힘들지만 웃으며 깨우치는 과정은 놓치기 아까운 절경이다.
좋은 일만 생기면 세상엔 괴로운 사람이 남아나지 않을 테다. 아들의 축구 사랑은 결국 모바일 게임까지 손을 뻗쳤다. 잠시 즐기다 말 줄 알고 추천을 해줬는데 웬걸, 깊게 빠져들어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다. 덕분에 수년간 끊어오며 금단의 시기를 보내는 나까지 말려들었다. 함께 축구 게임을 하는 초반엔 행복했다. 벌써 아들이 커서 이렇게 나와 함께 즐길 수 있다니. 점점 둘 다 수위가 높아지더니 경쟁하면서 속상해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내가 더 좋은 선수를 가졌다며 울상을 짓고, 하루라도 축구 게임을 하지 못하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과감하게 내가 먼저 게임을 지웠다. 최소한 나는 빠져야 이 사태가 진정될 것 같아서. 그랬더니 아들이 급기야 엉엉 울면서 아빠랑 같이하고 싶다며 매달렸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아이를 달래며 나 스스로 중독되는 모습이 싫어서 그랬고, 너에게도 모범이 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더 이상 게임 따위에 휘둘리지 말자고 서로에게 다짐하며 다시 게임을 설치하고 차분하게 즐기기 시작했다. 이 모든 오두방정을 지켜보는 파랑은 그저 혀를 찰 뿐이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방식은 직접 하는 것과 남이 하는 걸 보는 것으로 나뉜다. 때론 둘 다 사랑하는 바람에 푹 빠지게 되는데 지금 아들이 그렇다. 축구 경기 보는 것을 공과 함께 뛰는 것만큼 즐긴다. 내가 유일하게 종종 즐기는 영상이 축구인데 어깨너머로 보다가 좋아진 모양이다. 유명 선수의 스페셜 영상, 역사적인 경기의 하이라이트, 웃을 수 없는 기가 막힌 순간들. 다양한 장면을 섭렵한 아들은 자신의 취향을 정의했다. 경기 결과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경기를 보고 싶어 했다. 아무도 승패와 스코어를 모르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게임. 그러니까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실제 경기를 즐기고 싶다고 했다. 하늘의 도움인지 그때가 바로 2022 카타르 월드컵이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때마침 우린 한국행 비행기를 앞두고 있었고.
단 한 경기도 빼놓지 않고 응원했다. 첫 번째 우루과이 경기의 마지막에 잠든 걸 모른 척해준다면. 어느 시간에 시작해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목이 터지게 대한민국을 외쳤다. 기력이 예전과 달라 조용히 보는 걸 선호하는 우리 부부와 다른 가족들도 아들의 구호에 맞춰 열심히 응원했다. 덕분에 기적의 16강을 이루었다고 믿는다. 아들의 열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른 주요 경기도 찾아보았고, 어쩌다 잠이 들어 놓치면 눈물까지 흘리며 아쉬워했다. 재방송보다는 생방송을 각별히 선호했다. 대망의 결승전은 자정부터 새벽 4시에 치른 시상식까지 내 옆에서 뜬 눈으로 함께했다. 아마도 다시는 없을 역대급 경기가 아들의 첫 월드컵을 마지막으로 장식했다. 침대에 나란히 바로 앉아 손에 땀을 쥐며 시청하던 그 시간의 우리가 참 좋았다.
월드컵이 끝나도 축구를 향한 불길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한번은 야외 풋살구장이 모여있는 시설을 방문했는데 눈을 떼지 못하고 열중했다. 추운 겨울 날씨였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금만 더 보고 가고 싶다고 하며. 어두운 밤공기 속에서 남녀노소가 공에 집중하는 상황이 아들에겐 황홀경으로 느껴진 모양이다. 얼어붙은 발이 시릴 즈음 발길을 돌렸는데 다음 행선지는 운동용품 매장이었다. 이번 월드컵 로고가 붙은 축구공을 손에 넣은 뒤, 눈 쌓인 공원에서 한바탕 축구를 즐기며 애정을 표했다. 해가 바뀌어도 식을 줄 모르는 열기가 여전히 뜨겁다. 입을 떼면 거의 축구 이야기다. 앉으나 서나 축구 생각뿐이랄까. 하나둘 알려주던 상식과 정보가 점점 동나서 따로 공부해야 할 지경이다. 이상하게 하나도 피곤하거나 귀찮지 않다. 이건 내가 축구를 좋아해서가 아니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쌓인 만큼 좋아하는 걸 끈끈하게 공유하는 우리의 모습이 좋아서다. 매일 밤 재잘재잘 축구 수다를 떨다 잠드는 시간이 계속되길.
* 매일 쓰는 진짜 일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급 정보가 있지도 않은 아이와 지내면서 겪는 온갖 후회와 반성의 잡생각 뭉탱이 '육아 생존기'를 애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로서 기록하는 글을 쓰고 나면 자주 듣는 말이 있어요. 어떻게 아빠가 이런 육아 일기를 쓸 수 있냐고요. 부럽고 신기하다고요. 정말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혀 관심 없던 전과 달라진 건 사실입니다. 그 변화의 일대기는 제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에 담겨있습니다. 변화를 원하신다면 권해봅니다. 또 누가 변할지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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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제가 쓴 책이 나왔습니다. 애만 만들고 아빠인 척하던 제가 변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아닌 척 모른 척했지만 저도 그저 엄마가 애를 키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많아져서 함께하는 육아가 당연해지는 날을 꿈 꿉니다. 책 표지에 적어 둔 것처럼 인세 수익은 모두 필요한 아이들에게 기부합니다. 다른 욕심 없이 오로지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져서 세상이 변하길 바랍니다. 아이가 있거나 아직 없거나 다 컸거나 심지어 없을 예정이어도 읽으면 좋습니다. 엄마 아빠가 함께하는 육아를 아이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이해해야만 바뀌기 때문입니다.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필요한 분들에게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순간을 나눌 수 있어서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