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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Jan 27. 2023

오랜만에 한국을 맛본 아이


“나 한국 가자마자 한국어 잔뜩 쓸 거야!”


뜬금없는 아들의 선언으로 시작된 3년 반만의 한국행. 여행이라 부르기엔 자유롭지 않았고 출장이라 하기엔 너무 놀고먹었다. 빌린 차의 계기판을 처음과 나중을 따져보니 무려 4천 킬로미터가 늘어있었다. 운전 연습하러 간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리되었을까. 7주간의 대장정을 더 희미해지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잡아 두어야겠다는 다짐을 이번 달 내내 했었다. 문득 찍어온 사진을 보면서 장소와 시점이 가물가물해진 걸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며 하얀 종이 앞에 서둘러 앉았다. 


일정의 시작은 마지막 곁을 지키지 못했던 내겐 아버지, 아들에겐 할아버지의 추모일에 초점을 맞췄다. 떠나는 날짜가 정해지고는 마치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것처럼 기념품과 선물을 바리바리 챙겨 넣기 시작했다. 부치는 짐 3개와 갖고 타는 짐 3개의 대부분이 우리 것이 아니었다면 믿어지려나. 오랜만의 국제선을 타느라 감이 사라진 탓에 무게를 온통 초과했지만, 하늘의 도움으로 별다른 불편함이나 추가 결제 없이 무사히 날아갔다. 남들 하듯이 도착해서 짐 찾고 빌려둔 차를 찾아 싣고 고향으로 향했다. 반가운 얼굴은 살아있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가 차이 없이 반겼다. 자리를 지키는 가족의 존재만큼 그의 부재가 그제야 실감이 났다. 그 자리에 오래 있으면 가라앉을 게 분명해서 바로 남쪽으로 떠났다.


처음엔 부산. 어머니를 모시고 여유 있게 퍼져 쉬었다. 조식 뷔페에선 오로지 한식만 고집했다. 한국에서 먹는 한국밥이 먹어도 먹어도 맛있는 걸 어쩌나. 따뜻한 나라에서 잊고 있던 온천과 사우나도 겨울 여행의 묘미. 가끔 당황스러웠던 건 서점만 보이면 내 책이 있는지 찾는 아들과 아내였다. 더 열심히 해서 어디서든 눈에 띄라는 무언의 압박이었을까. 경주와 안동을 들렀다 왔는데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았던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수학여행 코스를 답습했다. 결국 아들은 왜 계속 절만 가는 거냐고 순수한 의문을 던졌다. 어버버하며 깔끔한 설명을 하지 못했다. 엄청난 기적의 작품 석굴암을 보고도 자기는 돌보다는 금이 더 좋다고 훌쩍 돌아서는 녀석을 당해내긴 어려웠다.





떠나올 때와는 키와 몸무게부터 정신과 마음의 크기까지 완전히 달라진 아들은 세월이 흐른 가족과 제법 잘 어울렸다. 나이는 늘었지만 변한 게 없는 어른과 낯설지 않게 바로 인사했고, 부쩍 자라 알아보기 힘든 사촌과도 어제 만난 것처럼 놀았다. 자리를 비운 사이 새롭게 태어난 동생과도 문제없었다. 처가댁의 동물 친구와도 회포를 풀었다. 때마침 벌어진 난생처음 보는 월드컵도 여기저기서 친척과 함께 흥분으로 즐겼다. 겨울이 없던 곳이라 깜빡하고 지내던 눈썰매도 신나게 탔다. 한 번은 돈을 내고, 다른 한 번은 공짜로. 처음 해보는 연날리기를 돕겠다며 내가 뒷걸음치다 울타리에 걸려 구른 사건이 벌어졌는데, 보고도 미리 경고해주지 않은 아내에게 서운하고 속상하니 자세히 적진 않겠다.


손주가 보고 싶었던 양가 어르신과의 진한 인사를 마치고 우리만의 추억 여행을 떠났다. 살던 집, 갔던 식당, 놀던 놀이터, 걷던 길, 책 읽던 도서관 그 자리. 다니던 공동육아 어린이집에도 방문해서 선생님을 만났다. 짧은 시간에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보다 아들을 더 잘 아시는 건 여전했고. 같이 어렵고 행복한 시기를 보내던 아빠 엄마들과도 만났다. 아이와 뒹굴며 자란 친구들도 가득 함께. 아이들에게 부족하지 않게 한나절을 놀았지만 돌아설 땐 아쉬움이 가득했다. 결국 없던 일정을 만들어서 한바탕 더 놀 수 있게 해줬다. 몸 풀리는 시간이 필요한 아이들이 다음번에 만나면 보다 더 금방 어울려 놀 수 있기를. 조심스러웠던 어린이집 생활 덕분인지 나에 관한 오해의 말이 전해지기도 했는데, "초록(나)은 화도 안 내고, 말도 예쁘게 하잖아요." 옆에서 듣던 솔직담백한 아들이 외쳤다. “하하. 그건 정말 사실이 아니다!”


수백 명의 사람을 만나는 중간중간 즐길 거리를 넣어두었다. 틈만 나면 우리 세 가족은 만화방에 파묻혔다. 나와 아내는 밀려있던 이야기의 끝을 보았고, 아들은 신세계를 맛봤다. 두 번의 뮤지컬도 놀라운 감동으로 남아있다. 요즘도 우리 입에서 흥얼대는 노래의 출처는 생생한 그 무대다. 입도 아주 즐거웠는데, 아들은 3가지 새로운 맛을 발견했다. 곤드레밥, 청국장, 그리고 평양냉면. 한국에서도 여러 번 먹었고, 여기 돌아와서도 종종 찾는다. 원래 좋아하는 치킨도 지나가다 냄새만 나면 먹자고 하며 종류별로 열심히 먹고 왔다. 한국에 가기 전부터 연습하던 고스톱 게임은 여러 일화를 만들었다. 처음으로 용돈을 걸고 내기를 해서 잃어본 아들은 명언을 남기기도. "나, (너무 놀라서) 숨이 안 쉬어져." 물론 건강엔 이상이 없었고 울고 웃으며 용돈을 불렸다 바닥냈다 반복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들은 놀고먹기만 하진 않았다. 구구단을 하루하루 읽(외X)었으며 매일 겪은 일을 공책에 적었다. 그림과 글로 남긴 한국 여행기를 무사히 완성했다. 대단한 기록은 두고두고 읽힐 놀라운 업적이다. 몸도 챙겼다. 안과에서 눈이 나빠지지 않는 가르침을 얻었으며, 치과에선 흔들리는 이를 순식간에 뽑혔다. 탈 없이 지내다가 마지막쯤 감기에 걸려 안 먹던 항생제도 잔뜩 먹었다. 쓴 약을 연거푸 먹던 아들은 자신만의 비결을 털어놓기도 했다.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면 약이 안 써져!" 남길 어록은 이것 말고도 꽤 많다.


대중교통 체험하게 해주려고 퇴근 시간에 신도림에서 지하철을 탔다. 오랜 타지 생활에 감을 잃고 극한 경험을 선사한 셈이다. 갑갑한 지옥철을 벗어나며 아이는 말했다. "길은 안 막히지만, 숨이 막혀!" 휴양지의 화려한 호텔이 아닌 가성비 좋은 아담한 숙소에 묵자 놀란 듯 물었다. "왜 이렇게 작고 안 좋은 호텔에 묵는 거야?" 높아질 대로 높아진 아들의 눈을 끌어내릴 때다. 어딜 가도 보이는 카페에 매번 놀랐는데, 특히 아들의 눈길을 끈 건 이곳이었다. "투썸 플레이스가 너무 많아!" 실제 통계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있었다. 이번에도 산타 할아버지가 어김없이 왔다 갔는데 머리가 커진 사촌 누나가 '동심 파괴'의 의미를 설명하다 본의 아니게 산타는 부모라는 진실을 폭로했다. 아들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주장했다. "어쨌든 난 선물 하나 더 받아서 좋아." 나와 아내가 결혼한 장소를 지나가며 아들에게 소개했다. 멋지게 인증샷을 찍어서 다른 만남 중인 아내에게 말없이 보냈다. "여기가 바로 통한의 그곳인가."라며 회심의 답변이 돌아왔는데, 한 판 다툰 직후라서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빼곡하게 들어차 있던 달력의 일정을 모두 소화했다. 여유는 많이 없었고, 하고 싶은 걸 다 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을 적어도 세 바퀴는 돈 것 같은데 참. 기간이 더 길었으면 달라졌으려나. 돌아서며 남는 건 뱃속에 들어간 음식이나 눈을 통과한 볼거리는 아니었다. 다시 만난 오래된 인연만이 끝에 걸러졌다. 마스크를 썼는데도 하나같이 한눈에 알아보는 그들. 잠자리와 먹거리를 여럿에게 많이도 제공받았다. 갚을 길이야 건강히 지내다 또 만나는 것밖에 없겠지만. 오랜만이라는 커다란 핑계로 많이도 불러냈다. 반겨주는 정도는 내 생각과 달랐지만 나와 다른 사람이라 어쩔 수 없는 걸 안다. 관계에 대한 고민과 깨달음을 준비하고 체험하며 떠나오면서 줄곧 했다. 복잡하기 싫은데도 쉽게 꼬여버린다. 아마 평생 풀진 못할 테다. 거기가 좋냐 한국이 좋냐 만큼 자주 들었던 질문, '아예 거기서 사는 거야?' 모른다. 지금은 여기에 산다. 내일은 모른다. 계획과 현실은 항상 다르니. 벌써 지난 그곳의 시간은 멀리 담겨 떨어져 있다. 아주 다녀오지 않은 것처럼. 이곳의 학교로 돌아간 아들은 어떨까. 꿈을 꾼 것 같다던 녀석의 말처럼 이미 아득해졌을지도.



* 매일 쓰는 진짜 일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급 정보가 있지도 않은 아이와 지내면서 겪는 온갖 후회와 반성의 잡생각 뭉탱이 '육아 생존기'를 애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로서 기록하는 글을 쓰고 나면 자주 듣는 말이 있어요. 어떻게 아빠가 이런 육아 일기를 쓸 수 있냐고요. 부럽고 신기하다고요. 정말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혀 관심 없던 전과 달라진 건 사실입니다. 그 변화의 일대기는 제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에 담겨있습니다. 변화를 원하신다면 권해봅니다. 또 누가 변할지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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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제가 쓴 책이 나왔습니다. 애만 만들고 아빠인 척하던 제가 변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아닌 척 모른 척했지만 저도 그저 엄마가 애를 키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많아져서 함께하는 육아가 당연해지는 날을 꿈 꿉니다. 책 표지에 적어 둔 것처럼 인세 수익은 모두 필요한 아이들에게 기부합니다. 다른 욕심 없이 오로지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져서 세상이 변하길 바랍니다. 아이가 있거나 아직 없거나 다 컸거나 심지어 없을 예정이어도 읽으면 좋습니다. 엄마 아빠가 함께하는 육아를 아이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이해해야만 바뀌기 때문입니다.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필요한 분들에게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순간을 나눌 수 있어서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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