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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Jan 31. 2023

먼저 말을 꺼내는 고통

불가능한 도전의 시작




남이 전혀 예상치 않은 부탁을 하는 건 여러모로 쉽지 않다. 말을 꺼내는 시점을 잡기도 어렵고,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정하는 것도 골치가 아프다. 심지어 대부분은 사정은 알겠지만 결국엔 안된다는 말을 들어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힘든 일도 상처받을 일도 없는데 괜히 나서면 고통이 줄줄이 따라온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게 당연해도 훤히 보이는 고생길을 못 본 척할 수도 없지 않은가. 앞서 두 권의 책을 내면서 줄곧 그랬다. 물어보고 거절당하고, 다시 요청하고 또 거부당하고. 다행히도 얼얼한 처음만 버텨내면 맞는 건 익숙해진다. 오히려 덜 아프게 치는 게 고마워질 정도로. 맞은 게 억울해서라도 견디다 보면 같은 편은 언젠가 등장한다. 쓰러지지만 않으면 만날 수 있다는 게 끈질긴 인내 속에서 건져낸 귀한 깨달음이다.


이럴 필요 없이 누가 먼저 물어봐 주면 참 좋아할 테다. 이런 책을 써주면 좋겠다고 하면 그게 뭐든 맞춰 해낼 자신이 있는데. 아마도 그런 제안은 앞으로 없을 거라는 확신으로 내뱉는 흰소리다. 무명작가라고 말하기도 뭐한 한쪽 구석에서 글이 좋아 붙들고 있는 나에겐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망상이라서. 문득 유일하게 나를 작가로 인정해준 두 곳이 떠오른다. 합을 맞춰 세상에 의미 있는 책을 엮어낸 지난 출판사. 최소한 여기는 좀 달라야 하지 않을까. 멀리서 얼굴을 보지 않고 만나 책을 만들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뒤늦게 직접 마주했다. 반가움과 고마움을 서로 가득 표현하고 돌아섰는데 나중에 떠올리니 뭔가 허전하다. 아무도 다음 책에 관해 묻는 이가 없었다. 더 이상 나와 할 이야기가 없어서인지, 별 기대를 하지 않아서인지, 그렇게까지는 관심이 없어서인지 모르겠다. 알아준 이도 이렇다면 들어보지도 못한 곳에서 내게 달려올 일은 없어 보인다.


글을 쓴다고 꼭 책을 내야 하느냐는 의문이 있다. 밖에서 듣고 안에서도 던지는 질문이다. 그렇지 않다. 세상에 '꼭'이란 없다. 꼭 먹어야 하고 꼭 봐야 하고 꼭 해야 하는 건 바라는 정도의 강조일 뿐이다. 절대라는 말은 깨지기 쉬운 불안한 의미다. 흔하게 튀어나오는 예외를 끝까지 못 본 척할 게 아니라면 영원히 지켜질 수 없는. 그렇다고 책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경험해보니 글과 책은 다르다. 글이 모여 책이 되는 건 맞지만, 책으로 읽히는 글은 원래의 글과는 성격 차이가 있다. 좀 더 진지하게 기대하면서 읽는다고나 할까. 무엇보다도 내 글을 읽을 기회와 대상이 확장된다. 글은 남이 읽어줄 때 의미가 있다. 누군가에게 읽히는 숙명을 가진 글을 새로운 형태의 책으로 만들어서 또 다른 이에게 읽히고 싶다. 곁다리이긴 하지만 무형의 글을 손에 잡히는 물질로 만나면 기운이 난다. 계속 더 오래 더 잘 쓰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이렇다 보니 책으로 나올 법한 글은 어떻게든 찍어내려는 희망을 품게 된다.


처음엔 두려움이 없었다. 설렘과 호기심으로 가득해서 무모할 뿐이었다. 초심자의 행운으로 거머쥔 첫 성과에 득의만면했다. 다음에도 안 되는 시나리오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 번 해봐서 안다는 자세로 당연한 성공을 자신했다. 덕분인지 거듭 결과를 만들었다. 하나 이번엔 완전히 변했다. 자신감은 사라지고 불안만 가득하다. 흥분과 희열로 아픔을 잊고 지낸 전과는 다르다. 전보다 더 오래 써온 만큼 얼핏 글이 나아 보여 안심할 법도 하지만, 지난번 원고들도 모두 그 당시엔 완벽해 보였기에 별 의미가 없다. 본인 혼자 내리는 판단은 착각에만 도움이 된다. 지금은 아는 만큼 두렵다. 시작하면서 펼쳐질 어려움이 뻔히 보여서 무섭다. 부탁할 대상을 제대로 고르고 간절한 편지를 적어 보내야 한다. 돌아오지 않을 답장에 목을 빼거나 차가운 반응에 얼어붙지 않아야 한다. 말도 안 되는 확률을 뚫고 나서도 편안할 수 없다. 최선을 다해 만든 결과가 세상에 뿌려져 빛을 볼 가능성은 미미하다. 기가 막히는 건 이게 가장 운이 좋은 흐름이라는 거다. 눈 밝은 출판사와 편집자를 만나지 못해 아예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할 수 있다. 최악의 좌절이 걱정된다.


끝없는 절망이 뒤덮을 땐 행동뿐이다. 머리로 밑바닥을 치고 와도 움직이면 곧 잊는다. 가만히 곱씹고 앉아 있으면 파고들어 깊어질 수밖에 없다. 하도 봐서 정떨어지기 직전인 원고에 고개를 처박고 며칠을 보낸다. 글을 읽게 할 기획서를 노려보며 곳곳을 날카롭게 채워 넣는다. 다음은 마련된 마음을 소중하게 던질 곳 찾기. 기존 책들이 사실에 기반한 에세이였다면 요번엔 상상을 토대로 지은 소설이다. 분야가 달라진 만큼 출판사를 새롭게 살펴봐야 한다. 가장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단계다. 수천 개가 넘는다는 책 만드는 곳을 천천히 돌아보며 어울리는 대상을 찾는다. 어쭙잖게 나만의 우선순위를 새겨보지만 소용없는 짓인 걸 잘 안다. 어디라도 좋다고만 해주면 달려가 연신 감사를 표할 거니까. 가뿐한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쉽게 온몸이 찌뿌듯해진다. 인연이 될지 안 될지 모를 파트너를 홀로 연모하다 보면 쉽게 지친다. 멈추면 안타까운 결말마저도 알 수 없기에 무거워진 정신을 다독여 마무리 짓는다.


지겨움과 괴로움으로 범벅이 되는 투고 준비를 할 때면 이름 적힌 두 권의 책이 기적으로 다가온다. 대견함과 고마움도 잠시, 급격히 짠해진다. 지난한 과정을 이겨낸 녀석들을 알아주는 이가 많지 않아서. 나온 것도 대단한 일이라고 위로하며 당장 처한 상황을 직시한다. 자칫하면 다음 책이 아주 없을 수도 있다고 자각하며. 책이 만들어지는 세계에 한참을 머물다 보면 계속 있어도 되는지 안절부절못한다. 어울리지 않아 머물 자격이 부족해 보여 제 발이 저린다. 그래도 모두에게 작가의 길이 열려있다는 안내 문구에 또다시 속으며 안도한다. 보이지 않는 괄호 안에 '실력을 갖춘'이 빠져있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해본다. 드디어 온 정성을 담아 보낼 때다. 휘리릭 썼던 전과는 다르게 보내는 편지가 도무지 어렵다. 첫인상이 좋지 않아 영원히 열리지 못할 첨부파일이 벌써 안타깝다. 빈 곳으로 남길 수 없으니 꾸역꾸역 진심을 담아본다. 모자라도 거짓은 없다고 느끼도록.


홀가분하게 모두 던지고 나니 불현듯 못난 짓을 했나 싶다. 투고 없이 책을 냈다고 자랑하는 이와 그렇게 책을 내고 말겠다며 투고를 제쳐두는 이를 여럿 봤다. 정녕 투고는 나쁜가. 먼저 받는 건 좋은 거고. 인사도 사과도 고백도 빌려준 돈도 남이 주면 편하다. 인연이 닿는 과정이 그렇다. 한쪽에서 달려가면 다른 쪽에선 고민하고 결정한다. 놀랍게도 이어지고 나면 동등해진다. 다가서는 순서의 차이일 뿐. 아니라면 결혼 프러포즈 한 사람은 평생 을의 자세로 지내야 할 테니. 상대 마음을 얻어낸 자의 도도함보다는 되려 껄끄럽고 오래 걸리는 어느 한쪽이 해야만 하는 밑거름을 만들어 뿌린 자의 성실함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기획하고 원고를 써서 출판사에 연락하는 정성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제일 자주 찾아오는 생각이 '글 쓰는 게 차라리 쉽네'일 정도니.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짐작한다. 출판사의 결과 방향에 맞는 작가와 원석을 찾아 물어보는 일도 모래밭에서 짝 찾기와 같을 테다. 먼저 움직이는 게 부족하고 지질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는 해야 할 수고를 도맡아 하는 거라 여길 순 없으려나.


투고는 작가와 출판사가 인연을 맺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쓸데없다면 굳이 귀찮게 왜 창구를 열어두고 받겠는가. 잘 맞는 상대를 고르고 판단하기 위한 여러 방법의 하나다. 출판사가 제안하는 경우가 드물면서도 성사 확률이 높을 뿐이다. 어느 방식이든 둘이 만나 둘러보며 합을 맞춰보고 따져본다. 만나보지 않으면 모르니 서로 대보는 자리를 계속 가질 필요가 있다. 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다른 쪽에서 찾아오지 않는다고 무작정 기다릴 이유가 있을까. 알려진 바와 같이 투고 성공 확률은 극악이다. 그렇다면 겁먹고 가만히 내게 다가오기만을 비는 게 옳은 길일까. 가능성이 적다면 도전 횟수를 늘리는 게 맞지 않을지. 내 사람을 만나기 위해 각종 모임과 소개팅에 거듭 참석하듯이 말이다. 애쓴 만큼 늘어나는 기회를 꾸준히 가져보는 게 슬기로운 해답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굽신거리며 모양새 빠지게 먼저 접고 들어가는 자세를 취할 수 있냐고 할 수 있다. 내 글이 좋다면 언젠가 알아서 귀인이 찾아올 텐데. 이해한다. 메일 발송 버튼을 누를 때마다 쪽팔려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멈추지 않는다. 저절로 알아주고 우쭈쭈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그런 경험을 해보는 게 소원이다. 나라고 있어 보이는 대우받고 싶지 않겠는가. 냉정히 지금은 아니라며 받아들인다. 아직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니까. 같은 상황 속에서 현실을 인정하고 헤쳐 나가는 자와 외면하며 미루는 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시도를 못 하는 사람은 공포가 간절함을 앞서기 때문이다.


거절을 묵묵히 견딜 수 있다면 누구나 책을 낼 수 있다. 해 본 게 지식의 전부인 난 그렇게 믿는다. 다만 거절은 생각보다 아프다. 한 번의 거절과 다른 한 번의 수락이라면 해볼 만하다. 셀 수 없는 아픔 속에서 올지 안 올지 모를 빛을 기다리는 건 쉽지 않다. 투고를 피하는 까닭은 겁이 나서다. 나와 다름없는 내 글이 핑계 같은 설명으로 내팽개쳐지는 걸 바라보기 힘드니 엄두를 못 낸다. 거절이 익숙지 않은 사회에서 자란 우린 더욱 그렇다. 합당한 이유로 답변받아도 감정을 섞어 해석한다. '내가 뭐가 모자라서, 자기가 뭔데 나한테.' 모두가 될 수 있는 저자가 몇몇 소수로 줄어드는 갈림길이다. 한칼에 싹 다 썰리면 좋겠지만 세상에 그런 일은 많지 않다. 지겹고 억울한 단계를 지나야 좀 더 나은 다음이 있다. 몰라도 무섭고 알아도 무서워 겁날 뿐.


정해진 공포를 이겨내는 건 그보다 큰 바람이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말의 과학적 근거를 찾기 전에 우리 행동의 원인을 찾아보자. 시켜서 억지로 하는 일 말고는 내가 원해서다. 많이 원하지 않는다면 우선순위에 밀려 내일로 미룬다. 간절하다면 기다리지 않고 오늘 시작한다. 좀 더 나은 때를 기다린다고 그럴듯한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합리화인 걸 본인은 안다. 멈춰서 좋은 기회가 떨어지길 기도하는 게 한 걸음을 떼면서 변화를 겪는 것보다 쉽다. 보통도 아니고 훨씬. 큰 틈을 메꿔 극복하는 건 얼마나 원하느냐다. 똑같이 좋아해서 되고 싶다고 말하지만 누군 가만있고 누군 부딪힌다. 적극성의 다름은 성향의 차이가 아니다. 동일하게 무섭고 두렵지만 그보다 더욱 절박하니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보는 거다. 진짜로 많이 원하니까.


내 글이 더 넓고 깊게 읽히길 간절히 바라고 원한다. 시도하지 않은 방법이 있다면 남겨놓고 싶지 않다. 이렇게까진 못하겠다면서 체면을 차리며 입맛만 다시는 모습이 싫다. 해보는 자만이 하나라도 더 알아가고 배워갈 수 있는 진리를 따른다. 지치지 않고 몰아세우는 순수한 원동력은 글을 향한 애정과 믿음이다. 꿋꿋이 쓰고 보여줄 수 있는 건 아무리 읽어도 재밌고 즐거운 내 글을 남에게도 전하고 싶어서다. 아직 읽지 못한 이에게 계속 들이대다 보면 생전 모르던 사람 중 완벽한 내 편을 만날 거라는 환상 같은 확신. 투고는 나쁘지 않다. 고통스러울 뿐. 난 절박하다. 그래서 용기 내 먼저 편지를 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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