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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Feb 28. 2023

오지 않을 연락을 기다리는 마음

순수한 독자라고 하긴 어렵지만 내 책을 사서 읽은 사람을 처음으로 만났다. 멀리 떠나있는 동안 보지 못했던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 반응이 극과 극으로 갈렸다. 글이나 책에 관해 한마디도 꺼내지 않은 지인은 흔했다. 그들 곁에 없는 사이에 내 인생을 가득 채운 쓰는 삶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한 글자도 적지 않고 먹고사느라 바빴던 예전만을 기억하느라 그저 한순간의 일탈 정도로 여기고 일축했다. 나에겐 이미 모두 빠져나가 버린 직장의 답답한 사연, 돈 되는 방법 같은 귓가에 맴돌지 못하는 이야기만 던졌다. 무관심은 오히려 약과였다. 대놓고 한심하다는 눈빛과 표정으로 그런 되지도 않는 책을 왜 냈냐고 농담처럼 진심을 전하기도 했다. 쓸려면 좀 재밌고 유행에 맞는 번드르르한 책을 써야지 답답하게 고리타분한 책을 냈다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별 대꾸 없이 자연스럽게 다음 대화로 넘어가는 나도 이력이 난 모양이었다.  


뭉개져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수 있던 건 쓰는 사람으로 변한 날 알아주는 이 덕분이었다. 내 글을 좋아하고 재밌게 읽는 내 편이 있었다. 이렇게까지 잘 쓰는지 몰랐다며 술술 읽히는 실력에 놀랐다고. 맨 처음부터 오래 지켜봐 온 자의 충격적인 고백도 있었다. 최초의 두서도 없고 터무니도 없는 글이 점점 발전하는 게 보여서 신기했다는. 쓰는 날 보고 영감을 얻어 고유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적으려 시도했지만 쉽지 않았다는 수줍게 털어놓은 속내도 아릿하게 남았다. 나를 만나는 약속 전날 부랴부랴 책을 사서 밤새 읽고 소감을 전해주는 정성엔 얼굴이 벌게져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직 쓸 생각에 빠져있는 날 알아채고는 글과 책을 소재로 대화를 꾸리는 그대들이 좋았다. 앞으로도 계속 쓸 거냐 묻고, 쓴다면 소식을 잊지 말고 전해달라는 관심에 가슴이 저릿했다. 이 정도의 애정과 칭찬이면 작가인 척 살아도 되겠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불현듯 나를 둘러싼 양 끝이 떠오른 건 다음 책이 나올까 말까 하는 갈림길에 섰기 때문이다. 네까짓 게 무슨 글이고 책이냐며 비웃는 쪽과 타고난 재능을 뒤늦게 발견했다며 응원하는 쪽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구도는 가운데 낀 날 흔들기 충분했다. 계속 써도 되는 거냐는 자기 회의부터 책을 내겠다며 발버둥 치는 안쓰러운 자신을 향한 연민까지. 온몸의 진이 빠지도록 혼을 다해 원고를 투고하고는 방바닥에 눌어붙었다. 남들 다 쉬는 명절 연휴 기간에 들입다 보냈으니 다시 출근하는 평일이 오기까진 답을 받을 리 없었다. 슬픈 사절을 바로 받지 않아서 좋고, 무소식이라도 사정을 아니 안심이었다. 받는 사람은 푹 쉬고 와서 일거리가 생기니 귀찮겠지만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 하니 별수 없다. 손 하나 꿈쩍 못하고 뻗어있으면서 예전엔 어떻게 투고하면서 다른 글도 팍팍 쓰면서 지냈을까 새삼 경이로웠다. 아무것도 모르고 날뛰던 그때가 좋았다며 회상할 시간도 잠시, 기다려주지 않는 거절이 날아왔다.


달력을 확인해보니 아직 휴일은 남아있었다. 밤이고 낮이고 열일하는 직원은 출판사에도 있었다. 1인 출판사라 사장일지도 모르지만. 쉬는 날도 없이 안 된다는 대답은 쉴 새 없이 들이닥쳤다. 신선한 내용은 없었다. 문제 은행에도 한계가 있듯이 내치는 까닭도 고정된 레퍼토리를 벗어나긴 어려웠다. 뻔한 답변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가끔 재미난 경우를 목격한다. 지난 두 번의 시도를 포함해서 이번까지 세 번 연속으로 보낸 출판사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거절 멘트가 모두 달랐다. 담당자마다 스타일이 다른 것인지 해마다 메시지를 다듬는지 괜히 궁금해졌다.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한 적도 있었는데 처음 보낸 회신으로부터 2주 뒤 다시 연락이 온 출판사가 있었다. 기가 막힌 건 두 번 모두 토시까지 똑같은 죄송하다는 답장. 당연히 다시 검토해보니 출간하고 싶어졌다는 역전의 기적을 기대했지만 이럴 수가. 단순 업무 처리 오류인 걸 알면서도 실낱같은 동아줄만 기다리는 초보 작가는 두 배로 실망했다. 유명한 전업 작가도 끊임없이 투고한다는 위로 같은 응원만 믿고 버틸 뿐이었다.


송구하다는 편지를 자꾸 읽다 보면 의심이 커진다. 원고를 한 장은 읽었을까. 아니, 출간 기획서는 열어봤을까. 아니, 아니, 공들여 쓴 메일이라도 꼼꼼하게 보긴 한 걸까. 처음 도전할 땐 쏟아지는 거부가 언짢아서 대학 리포트를 선풍기에 날려서 채점했다는 교수와 다르지 않다고 치부하기도 했다. 하도 많이 쏟아지니 귀찮아서 가깝게 떨어지면 내용이 무겁다고 여겨서 점수를 잘 준 것처럼 대충 제목만 보고 열지도 않은 채 자동 답장을 보낸 거라 괘씸해하면서. 이제 그런 일은 없을 거라 믿는다. 하나씩 늘어나는 의견이 담긴 답변을 받아보며 변했다. 정말로 읽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특히 이번엔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이름을 밝히면서 돌아오는 편지가 부쩍 많았다. 개성 있는 소감과 맞물린 이번엔 안 되겠다는 안타까움이 실린 마무리가 고민을 해줬다는 안도를 주었다. 끝까지 반응이 돌아오지 않은 곳이 과연 검토는 한 걸까 싶은 의혹을 꺾어줬다. 적절한 말을 찾다가 타이밍을 놓친 거라고.


다짜고짜 미안하다고 마무리되는 방식이 대부분인 와중에 결론은 똑같아도 소중한 감상과 조언을 받으면 뜨거워진다. 바라던 소식이 아니라 아쉽긴 하지만, 원고의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게 돕는 소견을 여러 번 꼼꼼하게 읽는다. 독특한 시각을 담아 매력이 있지만 분량이 적은 미니픽션(엽편소설)은 다루는 분야가 아니라고. 계속 투고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는 응원과 중장편도 같이 써보라는 조언. 광범위한 문제의식과 이슈를 펼쳐 놓은 귀한 원고여서 하나의 주제로 꿰보려 고민했으나 쉽지 않아 돌려준다는 실토. 재기발랄한 아이디어와 참신한 문체가 돋보였으나 사회과학이나 인문교양보다는 문학 분야에 더 어울릴 것 같다는 도움말.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서로 바쁜 세상에서, 글과 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내준 의도가 감사하다. 어찌 됐든 함께할 수는 없지만 팍팍한 황무지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물방울을 맞은 듯 짧은 희망을 얻는다. 분명 어딘가는 날 반기며 환희의 물벼락을 내려줄 곳이 있겠구나 싶은. 곧 마를지라도 이마저 없다면 쨍쨍한 땡볕 아래서 곧장 타들어가고 말 테니.


정성껏 만든 출판사 목록을 실패라는 빨간 글씨로 주욱 그으며 하나씩 지워나가는 기분은 허망하다. 어쩐지 될 것만 같았던 곳도, 연결되면 까무러칠 만한 곳도 공평하게 사라진다. 계획은 원대했지만 현실은 쪼그라들기 바쁘다. 아예 말 없는 곳보다는 훨씬 나아서 속상함과 고마움을 섞어 답장의 답장을 보낸다. 결과가 정해진 마무리 인사를 떠나보내면 처음의 기대는 완벽하게 증발한다. 간당간당하게 잡고 있는 자신감이 휘청일 땐 기댈 곳이 필요하다. 허탈함 속에도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건 아직 남은 곳이 있어서다. 답이 오지 않은 덕에 제멋대로 상상이 가능한 안식처. 좁아지는 건 시간문제지만 그동안엔 잠시나마 쉴 수 있다. 슬프게도 쉬는 시간은 미묘한 울림으로 쉽게 조각난다. 온 신경이 집중된 탓에 수많은 알림 가운데 특유의 떨림을 명확하게 구분해내는 이메일 도착 진동이 마음을 흔들 때마다. 꼭 열지 않아도 읽을 수 있는 투명한 편지를 기어코 확인하는 일이 매번 버겁다. 기다리는 연락은 여태 기별이 없다.


진하게 응원해주는 몇 안 되는 고마운 친구가 건넨 짧은 영상을 받았다. 14년 동안 집필한 소설이 11년 동안 단 한 권도 팔리지 않았는데 딸이 올린 수수한 16초짜리 동영상으로 1위에 올랐다는 영화 같은 이야기. 계속하면 기적이 벌어진다는 그의 관심 덕에 뜨거운 감동이 찾아왔다. 온몸이 달아오른 순간이 지나가자 문득 부끄러워졌다. 나는 얼마나 기다렸는가. 고작 며칠 계속된 좌절에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힘들어했다. 기다리면서도 답장을 무서워했고, 듣기 원하면서도 원치 않는 대답을 두려워했다. 순수한 가슴으로 썼다면 깨끗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데. 언제 어떤 식으로 세상에 알려져도 당당한 글이라면 가만히 때를 기다리면서. 자세를 바로잡고 기다리고 기다린다. 오지 않을 연락이 올 거라 믿으며. 오래지 않아 비워둔 마음속을 두드리며 누군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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