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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Apr 03. 2023

어설픈 어부에게 잡은 물고기란 없다

게임을 해 본 적이 있다면 레어(RARE) 아이템을 얻는 순간의 기쁨을 알 것이다. 희귀하다는 말 그대로 매우 드물어서 어쩌다가 특이하고 귀한 물건을 갖게 되면 마치 스스로 높아진 기분이 든다. 제거하는 대상인 몹(MOB)을 처리하면 받는 일반 보상 속에 극히 낮은 확률로 등장하는데, 평소와 다른 효과가 찬란하게 펼쳐진다. 기대를 가득 품는다고 특별히 더 많이 발생하지도 않으며, 묵묵히 몬스터와 비스트를 잡다 보면 느닷없이 찾아오는 행운이라 하겠다. 출판사의 거듭되는 거절의 앵무새 답변 속에 긍정의 회신을 만나는 장면이 곧 이와 같다. 똑같은 하얀 바탕에 적힌 검은 글자지만 분명히 번쩍번쩍 빛나는 질감을 드러낸다. 미리보기 속 첫 글자부터 남달라서 제대로 읽기도 전에 심장이 떨어져 나갈 듯 요동친다.


혹시라도 부서질까 한 글자 한 글자 살금살금 읽어 내려간다. 놓치는 부분이 있거나 오해하는 경우가 생기면 안 되니. 천천히 음미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동안 얻어맞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다. 하도 맞고 또 맞아서 곪을 만큼 깊어진 부위를 가뭄 끝에 찾아온 칭찬으로 하나씩 살피며 보듬는다. '아주 엉망은 아니었어. 역시 알아주는 이가 있네.' 아픔도 아픔이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했던 갈증도 심각했다. 누구 하나 의도한 기획과 원고를 향해 시원하게 동의해주지 않았으니까. 고뇌 끝에 적은 의중을 이해하는 귀인의 등장으로 막혔던 가슴이 단숨에 풀려 숨을 쉴 수 있다. 어렵게 만난 인연 덕분에 다친 곳도 회복되고 쪼그라들었던 자신감을 찾으면 기다렸다는 듯 올챙이 적을 잊는다. 특히 찾아온 곳이 둘이나 될 때는 훨씬 더 빠르게.


조마조마하며 찌그러져 있던 어제를 잊고 터질 듯이 가슴을 펴고 옆지기에게 당당히 걸어가 두 곳의 답장을 보여 준다. 너의 남편이 바로 이런 사람이라는 눈빛을 초롱초롱 내뿜으면서.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겠지만 한창 예민할 때 잘못 건들면 안 되는 걸 경험으로 알기에 진지하게 응한다. 무엇보다 먼저 축하를 전하고 시작한다. 예전엔 부드러운 도입부도 없이 다짜고짜 냉철한 판단만 전해서 아프다고 징징댔던 게 이제야 통한 모양이다. 고맙다는 나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꼼꼼하게 읽으며 머리를 이리저리 굴린다. 무언가 결심한 듯, 한 곳을 콕 짚으면서 눈을 환하고 크게 뜨며 밝게 외친다. "여기가 딱 맞아! 내 느낌인데 다른 곳은 더 이상 연락이 없을 것 같아." 아아, 당신에게 바란 건 갑작스러운 확정이 아니었는데. 내겐 아직 오지 않은 좋은 제안이 열두 곳은 남아 있을 텐데. 제발 거기서 멈춰주면 안 되겠니.


아내의 신들린 예언은 이따금 제대로 발휘되곤 하는데, 그때부터 거짓말처럼 나를 작가로 부르는 출판사가 자취를 감추었다. 하나같이 선생님이라고 높여 부르며 건필을 기원하는 마무리 인사로 작별을 고했다. 설마 급격한 판도의 변화가 그녀의 한마디 때문이겠냐마는 한동안은 옆에 누운 얼굴을 볼 때마다 보통 능력자랑 사는 게 아니구나 싶어 두려웠다. 그러다가도 차곡차곡 쌓이는 거절을 보며 차라리 원망하고 핑계 댈 곳이 있어 다행이란 마음도 들었다. 아니었다면 끊임없이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라고 곱씹으며 땅굴을 파고들었을 테니. 누가 보면 이미 제안을 받고도 배부른 투정을 한다고 어이없어할 수도 있겠다. 어쩌겠나. 가지면 더 큰 게 보이고, 더 많이 갖고 싶은 본능을 떨칠 수 없는데. 소화하는 제 깜냥도 모르고 자꾸 인정을 갈구하며 아직도 배고프다며 입을 벌리게 된다. 잡기 힘든 기회가 조금이라도 더 낫기를 바라는 욕망은 꺼질 줄 모르고 활활 탄다. 


멈춰버린 받은 편지함을 보며 불씨가 사라진 걸 하릴없이 알게 된 후에야 손 내밀어준 은인들에게 멋쩍게 다가가 인사한다. 미련이 깨끗이 사라진 뒤라 집중하며 서로를 알아간다. 왜 나의 글이 마음에 들었고 어떤 책으로 만들고 싶은지 한 발 더 나간 의견을 구한다. 구체적인 답을 듣고 싶어서 묻는다기보단 사심을 얹어 입에 발린 말을 청하는 수작이다. 들어도 들어도 지겹지 않은 좋다는 말을 한 번 더 상대의 목소리에 담기 위해서. 나에 관해서는 모든 걸 내보인 상태라 출판사를 속속들이 알려달라 요청한다. 돌아오는 그들의 지향하는 뜻과 강한 면을 듣고 나서 고심에 빠진다. 장점도 다르고 조건도 다르다. 짚어내는 매력도 거리가 있다. 같은 원고지만 다른 책이 만들어질 게 보인다. 유일하게 같은 점은 원작자인 날 위한 전적인 배려다. 얼마든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신중하게 고민해서 답을 줘도 된다고. 


행복한 고민거리를 안은 채 매일 앉는 의자에서 책장을 바라본다. 여러 남의 책 중에 시야에 턱 걸리는 두 권의 내 책. 다양한 감정이 스며든 종이 덩어리는 볼 때마다 심금을 휘젓는다. 빠져들 감상이 두려워 차마 손에 들진 못하고 적당히 떨어진 언저리에 머물자 생각이 파고든다. 처음 먹었던 마음과 지난한 과정, 그리고 밝혀진 결과까지. 일희일비하던 시절은 오래전에 졸업하며 무던하게 지켜보는 재주를 키웠는데, 최근에 한 번 흔들렸다. 공교롭게도 분기와 반기별로 전해지는 두 책의 인세 결과가 함께 도착했다. 소감은 동일하게 하루에 한 권 팔리기 참 어렵구나. 반면 누군가 꾸준히 사서 읽는 것도 놀랍구나. 실망과 신기 사이에 껴있던 그때, 우연히 출간 후 5년이 지나 절판되는 책의 작가가 올린 저서와의 이별 이야기를 접하곤 한참 뭉클했다. 오래된 친구와 헤어지는 슬픔 속에 깊은 사랑이 보였다. 직접 지은 책이란 단순한 소중함을 훌쩍 넘는다.


인터넷에서 열심히 알리는 손짓, 발짓과는 다르게 누굴 만나도 출간 이야기를 안 한다. 부끄럽다기보단 상대가 관심이 없어서다. 책을 읽는 이도 적거니와 읽어도 내 책을 읽었거나 읽을 사람은 더 없다. 나 좋자고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소재로 삼는 대화는 무책임하니 꺼내지 않는다. 아쉬운 소리도 현생에서는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느라 참고 산다. 다행히 실제 삶에선 티를 내지 않아도 온라인에 마구 떠들어 놓은 덕에 먼저 알은체하는 상황을 맞닥뜨리기도 한다. 무자비로 벌여놓은 글 쓰고 책 내는 소리소문을 눈여겨보다가 내게 건네는 건 어마한 관심이다. 각자의 예술을 향한 꿈을 이루려고 살아가는 무리에서 만난 친구가 그랬다. 작가의 꿈이 담긴 내 책을 꼭 읽어보겠다고. 쓰기를 짝사랑하다 들킨 양 부끄럽게 고맙다고 전했다. 덕분에 좀 더 오래 쓸 수 있는 기운도 덤으로 얻었다고.


결정을 내리는 순간은 품어온 시간이 얼마였든지 간에 고통스럽다. 당연하고 쉬운 선택이었다면 애초에 정해버리고 골치를 썩이지 않았을 테니. 다른 길로 갈 수 없다는 두려움은 고른 길이 맞는지 의심하게 만든다. 현재에 머물지 않고 나아가려면 결단이 필요하다. 가진 정보와 가린 속내를 맞춰가며 하나로 모은다. 명쾌하고 분명한 한 곳이 마음에 남았다. 참신하고 충실한 원고의 가능성을 믿으며 좋은 책을 만들자는 힘찬 바람에 끌렸다. 단박에 대표의 허가를 받아온 적극성도 한몫했다. 사실 아내가 진작에 내린 결론도 다르지 않았다. 과욕을 부린 탓에 가진 황금패를 몰라봤을 뿐이다. 작가님과 좋은 인연이 되길 원한다는 처음의 인사를 이번엔 내가 돌려줬다.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하겠다는 단단한 결심을 담아서.


인생에서 제일 쓸모없는 단어가 계획이니 예상이니 하는 희망사항으로 꾸민 망상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어차피 그것대로 된 적이 없으면서 시도 때도 없이 허황된 꿈을 세워둔다. 언젠가 맞겠거니 막연하게 사는 복권과 다르지 않은데도 묵묵히. 나 좋다는 출판사에게 나도 좋다고 보냈으니 돌아오는 건 서로의 마음을 잡아두는 도장을 찍는 계약서일 거라 예견했다. 곧장 날아온 대답은 좁은 나의 틀을 뛰어넘었다. 


나는 나대로 이리저리 재는 사이 출판사는 출판사대로 전체회의를 하며 영업팀의 지당한 문의에 봉착했다. 국내에 있지 않은 저자가 할 수 있는 홍보 방안이 대체 무엇이냐는. 온라인의 수많은 구독자나 팔로워가 있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오프라인에서 발로 뛰는 마케팅 활동을 할 수도 없는데. 여전히 편집팀은 원고가 지닌 잠재력을 믿고 좋은 책이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조직의 생리를 극복하지 않으면 어려운 상황이라고. 내 일이 아니라 가볍게 쯧쯧거리며 넘겼던 다른 작가의 중간에 엎어지는 출간 과정이 보란 듯이 내게 던져져 있었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하는지 머리가 지끈거리기도 전에 황당한 후회와 자각이 먼저 찾아왔다. 아내의 귀신 같은 촉이 왔을 때 욕심부리지 말고 감사하며 곧장 계약을 해야 했구나. 과연 난 일반인과 살고 있지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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