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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Apr 30. 2023

마음과 소설의 공통점

마음은 변한다. 변함없는 마음이란 드물다. 인간의 간사한 마음이란 표현답게 자기의 이익에 따라 변하는 성질을 지닌다. 때론 계기가 아예 없기도 하여 설명이 안 되기도 한다. 먹었던 마음의 유지는 곳곳에서 실패한다. 사랑을 해보았다면 고개가 끄덕여질 테다. 처음의 뜨거움과 이해심이 늘 그대로라면 길거리에 안 본 사람이 없는 날카로운 설전을 벌이는 커플은 없어야 한다. 스타를 따르는 팬심은 어떠한가. 모든 팬의 열정이 식지 않는다면 전성기가 끝날 이유가 없다. 무언가를 좋아해서 푹 빠지는 순간도 그리 길지 않다. 꼭 금방 사랑에 빠졌다 금세 식는 금사빠가 아니어도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갑게 돌아선 경험은 누구에게나 흔하다. 묵묵히 지지하고 응원을 보내는 따뜻함이 아닌, 시기나 질투 같은 뾰족함도 계속 갈고닦지 못해 뭉툭해지다 흐지부지되고 만다. 영원한 유명인이 없듯 지워지지 않는 악인도 없다. 오랫동안 꾸준하게 관심을 가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 맞다. 우리의 변심은 당연하다.


처음 출간을 도전하는 글을 썼을 땐 인기가 많았다. 아는 거라곤 한글밖에 없는 초보자가 무턱대고 나서는 철부지 같은 무모함에 큰 격려를 보내줬다. 실패하면 함께 울고 성공하면 같이 웃었다. 어찌 된 까닭인지 회가 거듭될수록 반응은 줄었다. 무모한 도전은 점점 꿈을 향해 다가갔지만, 사람들의 관심에선 점차 멀어졌다. 마치 어려울 땐 동정을 퍼주다가 해결되고 나니 할 일 다했다며 떠나는 것처럼. 정해진 게 없는 도전기를 쓴 이유는 여전히 유효하다. 해보지도 않고 겁내는 나를 밀어서 결과와 상관없이 실행시키는 데 있다. 더불어 어떻게든 움직이는 날 드러내어 고민하는 당신에게 용기를 전하기 위해서다. 읽은 누구라도 품고 있던 작가의 소망을 행동으로 옮기길 바라며. 진심이 가닿은 덕분인지 용기를 얻었다는 수많은 독자가 사라졌다. 모두 자기 책을 쓰러 갔겠거니 짐작 중이다. 실망이나 아쉬움과는 다른 감정이다. 쉽고 빠르게 변하는 과정에 무척 놀랐다. 최소한 힘겨운 관문을 돌파해 탄생한 책으로까진 이어질 줄 알았다. 받은 뜨거움이 굉장했던 만큼 거기까진 식지 않을 거라 단정했었다. 도전기는 재미있지만 도전으로 낸 책엔 흥미가 없는 건지, 꼭 읽어보겠다는 여러 다짐은 밥 한번 먹자는 말과 같아졌다. 요즘도 살금살금 따라오는 새로운 독자가 많다. 영화같이 감동적으로 읽는다는 고마운 마음도 남긴다. 지금 감사한 것과 무관하게 언제고 수그러들 거란 예상이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진다.


변하는 마음은 가라앉는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애정과 증오는 무덤덤하게 딱딱해지기도 하지만 서로 뒤바뀌기도 한다. 바라보던 시선이 완전히 달라져 원수가 애인이 되거나 친구가 적이 된다. 내 글이 좋아서 언제까지고 기다려 주겠다는 출판사의 돌변한 답변이 던진 충격과 비슷하다. 날 짝사랑하던 이성에게 고민 끝에 마음을 열었더니 고맙긴 한데 따져볼 게 생겼다는 황당한 상황. 내가 여전히 좋지만 눈에 띄는 단점이 걱정돼서 고민이 된다는 반문. 조금 전까지 당당했던 나는 사라지고 설득하는 입장으로 돌변한다. 더 나은 기회를 기다리다 포기하고 가진 것 중 최선으로 물러나며 자신과 타협한 상태였다. 다소 아쉽지만 여기서 좋은 결과를 내보자고 심기일전하면서. 출판사의 흔들리는 마음 앞에 세우던 자존심이 휘청거린다. 한국에 머물지 않는 나에게 국내에서 출간되는 책을 어떻게 알릴 수 있는지 물었다. 뛰어난 원고를 쓴 작가가 당신들과 함께 일해주겠다고 내려다보던 자세는 급격히 쭈그러져 동등하지 못한 저 바닥으로 추락해 있었다. 


곧장 답을 보내지 못했다. 묘안이 떠오르지 않아 묵히기도 했지만, 쪼르륵 달려가다 조급함을 들키고 싶지 않은 욕심이 더 컸다. 차분하게 스스로 물었다. 되지도 않는 거짓과 과장을 넣을 거냐고. 아니었다. 그럼 부족해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솔직하고 싶냐고. 그랬다. 달라진 태도에 놀랐다는 고백으로 시작하는 답변을 적어 내려갔다. 영업부에서 저자의 홍보 계획을 묻는 건 당연하다며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을 했다. 먼저 최우선 순위는 원고의 가능성이라고 못 박았다. 아무리 갖추고 있는 영향력이 탐이 나더라도 우선 글로 판단해야 한다고. 그러고 나서야 수많은 구독자와 팔로워가 확보된 작가는 아니라고 인정했다. 다만 꽉 막혀서 방에만 틀어박혀 쓰는 사람은 아니며 다양한 SNS를 적극 활용해 글을 내보이고 있다고 알렸다. 꾸준한 글쓰기 덕분에 채널의 성장세는 올라가는 중이라고. 특히 헛된 몸집을 불리기 위한 품앗이나 맞팔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모두 먼저 요청이 들어오는 순수한 독자라고.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온라인으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으며 기존의 인터뷰, 강연, 라이브방송 경험을 제시했다. 또한 다른 일로 마침 귀국할 일정을 잡고 있었기에 시기가 맞는다면 출간 후 오프라인 홍보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도 밝혔다. 여기엔 약간의 바람이 섞이기도 했는데 실제로 책이 나올 때 현장에 있어 보지 못한 아쉬움이 늘 있었다. 출판사에서 받아들여 준다면 처음으로 서점에 갓 나온 나의 새 책을 만날 수 있게 된다. 불안한 위치도 깜빡한 채, 성사된 것도 아니면서 혼자 상상하며 헤벌쭉했다.


이를테면 구구절절 거짓말까지는 아니지만 뭐든 열심히 하겠다고 늘어놓은 셈이다. 꺼낼 수 있는 건 의지뿐이었다. 설마 참신하고 기상천외한 마케팅 전략을 바란 거라면 사람을 잘못 봤다. 그런 방법을 모를뿐더러 있다고도 믿지 않는다. 작가인 내게 묻는 방식부터 잘못된 거고. 얼마나 열정이 있느냐로 받아들였고, 뒤지지 않을 사람이라고 밝혔다.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건 원고이니 다시 한번 보고 판단해 달라는 의도를 티 냈다. 출판사와 내가 좋은 책이 될 거라 함께 굳게 믿는다면 해 볼 만하다고.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어 회사의 뜻을 한데 모아 달라는 인사로 마무리했다. 잘 부탁한다는 마지막 요청이 어색했다. 이제 나는 결정권이 없었다. 전해주는 회신에 맞춰 정해질 따름이었다. 어느새 우리의 자리는 완벽히 달라져 있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다시 이어졌다.


투고 후 기다리는 시간과는 달랐다. 어느 곳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임의의 매력이 없었다. 보내는 이는 정해져 있었고, 대답도 둘 중 하나였다. 함께 가거나, 헤어지거나. 좀처럼 흐르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다른 곳의 뒤늦은 거절 답장은 줄을 이었다. 한 달이 넘도록 걸리는 검토 기간에 놀랐고, 빼먹지 않고 알려주는 정성에 고마웠다. 어쩐 일인지 새로운 출판사를 향한 기대는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원래부터 한 곳만 원했던 것처럼 뚫어져라 거기만 바라보고 있었다. 가진 게 없는 채 새로 얻는 희망보다는 품 안에 거의 넣었던 걸 빼앗기는 상실이 훨씬 더 컸다. 주었다 뺏으며 남기는 상처가 훨씬 깊다는 걸 깨달았다. 늘어지는 초조함은 겨우 지키고 있던 자신감을 기어코 건드렸다.


보낸 지 오래되었고 쓴 지는 더 오래된 원고와 기획서를 다시 읽었다. 자신만만하게 쓰인 문체와는 다르게 쪼그라든 자평이 삐져나왔다. '좀 별로인가. 책으로 되긴 역부족인가.' 덥석 진행되지 않는 원인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매력의 불충분이니까.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건 강점이 확고하지 않아서일 테니. 감춰왔던 의심이 풀어헤쳐졌다. 누군가는 벌써 세 번째 책이니 쉽게 풀릴 거라며 편하게 응원했다. 준비하는 신세는 달랐다. 확실하게 보여준 게 없는 경력은 애매했다. 최소한의 자격은 검증했을지 모르지만 투명한 잠재력을 보이긴 모호하니까. 신선한 신인이 나이만 먹은 선배보단 나을지도. 안 될 수도 있겠다는 예측은 불편을 자아냈다. 오랜만의 여행에서도 잠 못 들고 쉬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꺼내던 올해 출간 예정이라는 말을 노력 중이라고 몰래 바꿨다. 포기에 가까워졌을 즈음 답을 받았다.


결론은 아직 고민 중이라는 희미한 상태. 좀 더 살펴보고 언제까지 알려주겠다는 중간 연락이었다. 답답했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기다리겠다는 말을 또다시 보냈다. 이때 처음으로 쫄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매달리고 있는 날 확인했다. 다른 곳은 보이지 않고 온 신경을 이곳에 쏟았다. 꼭 여기랑 하고 싶다는 간절함까지 이르렀다. 팽팽한 고대는 머지않아 툭 하고 끊어졌다. 순순히 다음 단계를 구상했다. 이루어지지 않을 확률이 높다고 선뜻 인정하며. 출간을 단념할 것인지, 투고를 더 해볼 것인지, 아니면 마음을 접어둔 두 번째 출판사에라도 돌아갈 것인지. 약속 시간을 어긴 적이 없는 출판사의 첫 지각 답장을 기다리며 체념은 단단해졌다. 확인 사살을 직접 해야 하는 구차한 처지가 슬펐지만, 쓸데없이 명확한 성격 탓에 뻔한 결말을 굳이 먼저 물었다. 마지막 체면은 세우고 싶어서 출간을 제안한 다른 출판사가 기다리고 있다는 핑계를 꼭 덧붙여서.


앞서 밝혔듯 이번 원고의 장르는 소설이다. 작가의 상상력에 기반하여 허구로 이야기를 꾸며나가는 형식. 이리로 흘러가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휙 방향을 틀어 변해간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우리 마음과 쏙 닮았다. 워낙 기발하고 극적이라 일상에서 기가 막힌 상황을 접하면 절로 '소설 쓴다'는 표현이 튀어나온다.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스포츠에서도 예상치 못한 형국을 만들어 낸 장본인을 소설가, 작가라고 부를 지경이니. 소설을 쓸 때는 전혀 몰랐다. 내게도 소설 같은 일이 벌어질 줄은. 느지막이 도착한 편지엔 새로운 소설이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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