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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Jul 22. 2023

간절히 바라던 탄생의 순간

절실히 바라는 일을 기다리다 포기하는 이유는 대부분 다른 일로 바빠서다. 언제 그렇게 목을 빼고 있었냐는 듯이 아예 잊고 산다. 삶에 틈이 있으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는지 묻지만, 빼곡한 일정으로 가득 찬 생활 속에서 질문은 사치다. 새로 시작한 대학원 공부에 치여 책을 향한 기다림을 까맣게 깜빡하고 지냈다. 정신이 잠깐씩 돌아올 때마다 약속한 일정에 맞춰 책이 나올 수 있냐고 물었는데, 그때마다 가능토록 애쓰고 있다는 답변을 들을 뿐이었다. 첫 학기의 마지막으로 치달을수록 점점 여유가 없어지자, 차라리 연락이 오지 않는 게 낫겠다는 안도까지 흘러갔다. 어수룩한 대학원생의 기말 과제가 마무리되던 날이 저물고 바로 다음 아침,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마치 나의 일정을 꿰고 있었다는 듯이 너무도 적절한 순간에 딱 맞춰서.


흰 바탕에 검은 글자로 보내졌던 원고가 적절한 색깔과 모양을 입고 돌아왔다. 손에 잡힐 물성을 지니기 직전의 모습으로. 한 글자로 시작한 글이 기어코 책으로 변하는 과정은 언제봐도 놀랍다. 더불어 혼자서만 읽고 자족하던 글을 남이 읽고 보내주는 감상은 흥미롭다. 매력적인 작가의 문체를 가급적 고치지 않고 살리려 했다는 문구는 궁금증을 자아낸다. 대강 훑어보니 크게 변한 게 없다. 돌아올 수 없는 인쇄를 앞두면 꼭 찾아오는 의문, '이대로 책이 되어도 되나?'. 쓰는 나야 할 수 있는 최선의 고민을 다했다. 수 없이 읽은 글이다 보니 익숙하고 심지어 재밌다. 나를 떠나도 같은 대우를 받을지는 알 수 없다. 내 글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남에게서도 똑같이 생겨날 거란 믿음은 강해지기 어렵다. 이럴 땐 별수 없다. 다시 읽고 고친다. 조금이라도 더 낫게. 아무리 지겹고 괴로워도.


교정과 교열을 세 번 거치는 일정은 빡빡하다. 여유가 있다고 해도 더 나은 결과를 보장하진 않을 것 같아 불만은 없다. 나만의 리듬과 속도를 우리의 약속에 맞춰야 한다는 거부감만 잘 다독이면 할만하다. 혼자만 애쓰고 있지 않다는 확신이 반대편에서 불어오면 힘도 난다. 독자의 흥미를 끌기 위해 글의 제목과 순서를 조정한 재주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빠듯한 일정에 쫓기지만 무엇보다도 책의 완성도를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엔 가슴이 떨려온다. 서로 믿으며 끝을 향해 달려가는 고통의 길은 즐겁기까지 하다. 안을 채우는 일은 무리 없이 흘러간다. 무리수를 던지는 나의 무리한 요구도 찰떡같이 이해하고 반영해 주는 편집장님의 솜씨 덕분에. 다만, 밖을 두르는 장면에선 하나로 머리를 모으는 데 애를 먹는다. 꽉 찬 속보다도 드러나는 겉에 더 신경이 쓰이는 걸 보니 난 아직 멀었다. 


책의 운명은 표지에서 승부가 난다. 내용이 황금이어도 펼쳐지지 못한 책은 돌과 같다. 제목, 디자인, 색감, 폰트 모두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저자의 이름이 모든 것을 결정짓지 않을까. 너도나도 아는 검증된 유명작가라면 백지에 고딕 서체로 이름만 적혀도 읽힐 테니까. 무명작가인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이름을 바꾸는 것도 의미 없고, 자기소개를 다듬는 것도 한계가 있다. 우울해할 겨를은 없다. 어쩔 수 없는 건 제쳐두고 손 쓸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한다. 가장 먼저 제목이다. 기존 전작들에서 옥신각신하며 설왕설래하던 경험이 무색하게도 이견이 없다. 처음으로 가제가 그대로 쓰인다. '냉소자의 달콤한 상상'. 최초에 기획하며 지어낸 문구엔 전체 글을 관통하는 의미가 담겼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을 시간도 없이 새로운 판단이 거듭 요구된다.


내 사진을 책날개에 담자는 요청을 가벼운 농담 취급했다. 워낙 인물이 출중하다면 나서는 게 이득인 쪽이 있을 테니. 보기 좋은 책이 읽기도 좋은 거니까.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이해하고 마땅한 사진이 없어서 생략하겠다고 답했다. 책에 신뢰감을 주고 나중에 영상으로 홍보하는 경우가 많아 독자에게 작가의 얼굴을 알릴 필요가 있다는 설득이 되돌아왔다. 내가 어떻게 생긴 줄 알고 이러는 걸까. 책을 안 팔고 같이 망해보자는 걸까. 별생각을 다 하다 옆에 있는 아내에게 털어놓았다. 고귀한 책에 내 얼굴이 붙게 생겼다고. 객관적인 그녀는 말없이 휴대전화 사진첩을 열었다. 한참을 뒤적이더니 하나의 사진을 보여줬다. 허공을 바라보며 엉뚱한 상상으로 슬쩍 웃고 있는 나. 책의 느낌과 어울린다며 이걸 쓰자고 했다. 결국 지은이 이름 옆에 커다란 내 모습이 들어간다. 어려운 고민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책의 완성을 위해선 원고 속 글자에만 코 박고 있진 못하다. 고개를 처박고 나 몰라라 하고 싶은 심정이 계속된다. 


총 5가지의 표지 후보안이 탄생했다. 여러 목소리를 담아서 다양하게. 다행히도 나와 아내는 일치했다. 우연히 주변에 후보 이미지를 보여주며 의견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엉망진창이었다. 이렇게나 뒤죽박죽 선택이 갈리다니. 만약 첫 책이었다면 골머리를 썩이고도 남았을 테다. 모두가 흡족한 정답은 없다는 걸 알기에 과감히 하나의 결정을 출판사에 전했다. 곧 만족스러운 시안이 도착했다. 안타깝게도 그림이 전부가 아니다. 큰 글자로 새겨진 주요 글귀를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인내심의 한계가 온 바람에 대강 마무리하려다 가까이 있던 아내에게 들켰다. 정신을 놓치면 안 된다며 고쳐야 하는 이유와 바꾸는 방향을 설파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곤 단어 하나하나 따져 들며 수정했다. 책의 내용과 의도를 아우르는 최후의 두 문장이 세워졌다. 마음에 쏙 들었다.


고치고 정하는 과정이 끝났다. 인쇄소에 넘기기 직전의 표지와 본문을 마주하니 웅장한 감동이 몰려온다. 감추지 못해 떨리는 어깨를 눈치챈 건지 어깨너머로 드문 아내의 칭찬이 들려온다. 세 번째 책까지 쓰면서 글이 정말 많이 늘어서 유려한 맛이 있다며. 꾸준히 하더니 당신만의 결과물을 멋지게 만들어 냈다고. 담백하게 건네는 그녀의 말에 스스로 돌아보며 토닥였다. 고생했어, 대단한 나만의 나.


활자로 가득한 종이 뭉치를 기다리는 물리적 시간은 지친 마음에 위로를 준다. 제아무리 조급해도 정해진 기간을 흘려보내야만 한다. 글에 파묻힌 시절이 추억처럼 스쳐 지나가면 혹시 꿈일지도 모른다는 몽롱함에 휩싸인다. 헛된 불안을 깨뜨리는 갑작스러운 소식이 도착했다. 예정보다 일찍 책이 완성되었다며 잘 된 건지 아닌 건지 모를 감정이 수화기 건너편 목소리에 실려서. 이유는 출판계가 불황이라 인쇄소에 일이 적어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찍어버렸다는 웃지 못할 사연. 책이 점점 안 팔린다더니 온몸에 실감이 퍼졌다.


상황은 언제나 내 편이 아니다. 기회도 온전히 주어진 적이 없다. 기다리지 않고 먼저 나서서 움직이며 이뤄냈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상상이 언젠가 현실이 되길 바라며 앉아만 있지 않았다. 글자에 옮겼고 기어이 내 상상은 글이 되었다. 혼자 보는 글에서 멈추지 않고 더 많은 이를 만나기 위한 책으로 엮었다. 누군가 읽어준 덕분에 살아나는 고마움을 잊지 않고 사회에 영광을 돌리는 기부의 뜻도 변치 않았다. 간절히 바라던 탄생을 마주한 이 순간, 나에겐 감격할 자격이 있다. 진짜로 이루었다. 나만의 바람을 모두에게 전하는 외침으로. 세 번째 책이 세상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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