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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Sep 18. 2023

내 책을 내가 선물하는 기분

세상에는 일어나기 어려운 3가지 일이 있다. 먼저, '책 사기'. 맛있고 예쁘고 멋지고 귀여운 물건이 온통 넘쳐나는 와중에 종이 뭉치를 내돈내산(내 돈 주고 내가 산 것)하긴 쉽지 않다. 누가 거저 준다면 받을지 몰라도. 다음은, '책 읽기'. 재밌고 야하고 웃기고 신나는 즐길 거리가 얼마나 많은데 글자를 읽고 있을 턱이 있나. 어려서부터 독서하라는 잔소리를 주야장천 듣고도 버텼는데 자유로운 어른이 되어서 책을 붙잡을 리가 없다. 마지막은, '책 후기'. 애초에 사지도 않는 데다, 혹시 얻게 돼도 읽지 않으니, 읽고 난 뒤에 벌어지는 감상은 존재하기 어렵다. 단, 이처럼 대단한 고난도 삼총사 '책 사기, 책 읽기, 책 후기'에는 치명적인 비밀이 숨어있는데...


바로, '내'가 빠져있다. 모든 책이 그렇지 않고, '내 책'만 그렇다. 남의 책은 잘만 팔리고 읽히고 남겨진다. 누군가 내 책을 사서 읽고 남기는 일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다. 책이 널리 알려지려면 둘 중 하나는 유명해야 하는데, 작가가 저명하거나 책이 많이 팔리거나. 미끄러워 올라타기 어려운 순환의 고리를 바라보면서 나는 도대체 무얼 어찌해야 하나 싶다. 빈약한 독서가인 나만 봐도 어디서 한 번이라도 들어본 저자와 책에 눈길이 가지 않는가. 듣도 보도 못한 작가의 낯선 책을 선뜻 손에 쥐기엔 따져야 할 게 많다. 기껏해야 한 달에 한두 권 읽을 텐데, 이도 저도 아닌 책에 시간을 쏟으면 괜히 밀려서 못 읽은 다른 책이 생각날 테고, 차라리 그 시간에 잠을 자든 유튜브를 보든 할 걸 싶어서 짜증도 날 것이고. 가뜩이나 불안한 인생에 고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안정적인 선택이라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에 시선이 꽂히는 건 당연하다. 


여전히 그 어떤 셀러 작가도 아니지만, 출간한 세 권의 책 중 처음으로 이번 책이 2쇄를 찍었다. 같은 책이 인쇄소를 다시 찾는 상황은 대부분 오지 않는다. 기쁘고 감사하고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눈에 띄는 성과는 달콤한 만족도 주지만, 눌러두었던 기대도 함께 부풀린다. '생각보다 많이 팔렸으니 꽤 여러 독자가 읽겠구나, 그럼 확률적으로 더 많은 책리뷰가 올라오겠구나.' 키우던 식물이나 근육도 오랜만에 봐야지 훌쩍 자라 있다. 언제 크는지 눈이 빠져라 지켜보고 있으면 죽은 듯 멈춰있다. 인터넷만 보이면 달려들어 검색하길 반복하는 내 눈엔 딱히 걸리는 게 없다. 가슴은 뜨거워도 머리는 차갑게 굴린다. '샀다고 바로 읽는 것도 아니고, 책을 잡아도 읽는 시간이 필요하니 기다려야지.' 잠시 후, 냉철한 두뇌는 뜨끈한 갈망에 점령당해 미지근해지며 기능을 상실한다. 검색창에 툭탁툭탁 책 제목 집어넣고 엔터 탁, 휴.


기다리는 걸 포기했다. 무릎 꿇은 장발 고등학생에게 흰머리 감독님이 말했듯 포기하면 편하다지만 난 반대다. 와 주지 않으니 직접 찾아가 끌어오기로 했다. 누가 읽었는지 아무도 모르면 소문이 퍼질 수 없다. 누구라도 책을 덮은 뒤의 느낌을 남겨줘야 이런 책도 있단 걸 알게 된다. 서점의 신간 매대에서 잠깐 정면 얼굴을 드러낸 뒤, 서가에 꽂혀 옆얼굴만 보인 채 꼭꼭 숨겨져 있으면 평생 다시 표지를 내보일 기회는 없다. 오프라인에서는 방법이 없으니, 온라인에서라도 얼굴을 팔고 다닐 수단이 절실하다. 누굴 찾아가서 어떻게 부탁하면 될까. 책을 낼 때마다 기가 막히게 냄새를 맡고는 5만 원에 동네방네 소문을 내준다고 제안 같은 공갈을 지치지도 않게 보내는 그분에게 연락해야 하나. 아무리 급해도 거긴 아닌 것 같은데.


번뜩 그동안 내게 왔던 서평 제안들이 기억을 스쳐 지나갔다. 책을 읽고 종종 남기는, 독후감을 빙자해서 내 맘대로 쓴 이야기를 보고 여럿이 찾아온다. 거의 받는 사람 이름도 없이 찍어내듯 보내는 출판사 마케팅 담당자의 스팸 메일이라 읽지도 않고 지운다. 내가 아니어도 되는 요청이라면 굳이 내가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으니. 드물게 눈에 걸려들어 진지하게 읽고 답할 때가 있는데, 저자가 직접 보내는 편지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간절한 작가의 사연을 들여다보고 응원의 답장을 보낸다. 수락해서 신간을 받아 읽은 적도 있다. 글로 쓰기엔 남은 게 적어 그의 희망을 완성하진 못했지만. 문득 이거다 싶은 촉이 왔다. 내 책과 미래의 독자를 막는 장애물을 나의 노력으로 넘을 수만 있다면 해볼 만했다. 내책내선(내 책을 내가 선물)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된다. 


모두 상술이라면서 휘둘리지 않겠다고 쳐다도 보지 않던, 책으로 온갖 콘텐츠를 만드는 이를 찾아 헤맸다. 보는 영상으로 읽는 도서를 알리는 기적을 행하는 북튜버. 잘 찍은 표지 사진과 정리된 글귀로 주의를 끄는 북스타그래머. 분명 무언가를 찾으러 맞게 들어온 것 같은데 바로 답을 주지 않고 다음 게시물로 유도해서 영원히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마법을 부리는 블로그 세계의 도서 인플루언서까지. 책을 향한 자세가 진심인 대상을 고르고 골랐다. 원고를 보낼 출판사를 고르던 노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존에 읽고 올린 다른 책의 후기를 살펴보며 내 책과 어울릴 잠재 독자를 선정했다. 투고 메일에 쏟은 정성만큼을 기울여 편지를 썼다. 나를 알리는 인사로 시작해서 자신 있게 책을 소개했다. 세상에 전해야 할 목소리라고 믿기에 당신이 꼭 읽어 주길 바란다며. 선물 받은 책을 읽은 뒤, 남는 바가 있다면 널리 알려달라고.


책이 나온 후의 거절은 나오기 전에 받는 그것과는 또 달랐다. 그래도 최소한의 검증을 거친 자격을 갖췄다고 안심했는데 아니었다.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이의 침묵, 너무 많은 책이 몰려와서 받을 수 없다는 완곡한 사양, 정확한 숫자로 비용을 알려주는 솔직함. 이미 완성된 책으로도 누군가의 눈에 들려면 또 다른 간택을 받아야만 했다. 책을 읽는 사람도 적거니와, 그 사람의 시간도 한정된다. 독서가의 치열한 시간 소비 기준을 충족해야만 읽힐 수 있다. 완고한 자존심을 꺾고 직접 책을 보내주려 결심했지만, 이마저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허탈함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차라리 날카로운 현실을 모르고 메마른 하늘에 비를 바라며 아무라도 읽어달라고 빌 때가 나았다. 정성껏 만든 음식을 공짜로 권하면서 쌀쌀한 무표정의 손사래를 수없이 마주했다.


애써 준비한 선물을 품에 넣어주려는데  자꾸 고사하니 속이 말이 아니었다. 준대도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안길 수도 없어 무안한 몸짓으로 황망히 서 있었다. 부탁은 내가 타고난 체질이 아니다. 혼자 둘러업다가 무거워도 말 못 하고 눌려서 기절하고 만다. 혼자 하는 데까지 해보다 포기할지언정 도와달라 외치지 못한다. 책에서만큼은 속수무책이다. 타인이 읽지 않으면 생기를 잃는다. 주인인 나 말고는 간청할 사람이 없다. 팔자에 없던 애원의 고통에 속이 썩어 들어가도 스스로 해야 하니 견딜 뿐이다. 역할을 맡으면 어지간하면 놓지 않는 뻣뻣한 고집을 가졌다. 정확히 요구한 숫자만큼의 무시와 사절이 돌아왔다. 한 치의 예외 없이 꼭 맞았다. 물어보면 답이 없거나, 안 된다고 했다. 품은 감정이 어둡고 낮아졌다.


결국엔 부끄러움이 깜냥을 넘치면서 그만두자는 의견이 안에서 솟구쳤다. 더 이상의 일방적 구애는 용납되지 않았다. 나를 넘는 수위를 버틸 수 없었다. 발버둥을 멈춘 지 얼마나 지났을까. 기척 없이 구원이 뻗쳤다. 내 옆에도 짝이 있듯이, 어딘가엔 마음 맞는 이가 있기 마련이다. 수많은 거부 사이에 드물게 따뜻한 수락이 날아왔다. 출간 제안에 비할 정도로 기뻤다면 과장이려나. 소중한 회신을 향해 진한 감사를 전했다. 귀한 인연으로 이어지길 바라며 온 마음을 다해 책을 선물했다. 내 책을 내가 포장해 보내는 기쁨을 깊은 절망 속에서 겨우 구했다. 손 내민 은인에게는 겪은 처절을 티 내지 않고 고마움만 쏙 빼 담아 전했다. 이제 남은 건 기다림.


읽혀도 가슴을 때린 게 없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걸 안다. 나조차도 열 권을 읽어서 한 권만 건지면 다행이라 여기니. 넓은 이해와는 다르게 거듭 초조해진다. 설마 단 한 명도 나와 통하지 못하는 걸까. 각종 SNS의 문지방을 하도 넘어 다녀서 닳아빠질 때쯤, 예상과 전혀 다른 감상평을 마주쳤다. 눈을 비비고 또 비볐다. 이건 도대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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