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록Joon Oct 14. 2023

다시 하지 않을 결심

학창 시절, 같은 반에 꼭 한 명씩은 만화가를 꿈꾸는 친구가 있었다. 얇디얇아 종이 뒤가 비치는 누런 연습장을 삐뚤빼뚤 네모 칸으로 나눈 뒤 빼곡히 채워 그리곤 하던 녀석. 쉬는 시간과 수업 시간을 넘나들며 열정적으로 창작물을 완성하고 나면 주변에 돌려서 보여줬다. 다른 친구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그림이나 만화 그리는 데 관심 없던 내겐 시시껄렁한 장난으로 보였다. 친구의 만화는 그 당시 유행하던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와는 비교 불가였다. 평소엔 대부분 비슷하게 과묵했던 만화 지망생의 꾹 닫힌 입과는 달리 그때만큼은 강렬한 눈빛으로 감상평을 요구했는데, 어찌해야 하나 싶어 좀 곤란했다. 솔직하게 별로라고 해도 되나, 아니면 모른 척 잘 그렸고 재밌다고 하면 되나. 적은 관심이 많은 관용을 베풀 듯, 대충 두루뭉술한 칭찬의 말과 함께 구질구질한 노트를 돌려줬다. 그땐 곧장 다시 내 할 일 하려고 고개를 휙 돌리느라 돌려받는 친구의 표정을 볼 새도 없었다. 몇십 년이 흘러 같은 작가 지망생 입장이 돼버리자 사라진 기억이 되살아났다. 무게 없는 가벼운 나의 감탄에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던 녀석의 환한 얼굴. 선의의 거짓말이라도 작품을 만든 이에겐 생명수가 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런 기대를 가득 품고 내가 먼저 건넨 내 책의 반응을 숨죽여 기다리다 의문의 패배를 당했다. 아무리 책 선물까지만 내 몫이고 나머지는 당신 마음이라고 했다지만 이럴 줄이야. 


무엇보다도 예상과 달랐던 건, 받은 선물의 열광적인 인증이었다. 솔직히 당황했다. 그것도 상당히 많이. 뻣뻣한 자존심을 꺾고 책을 위해 눈물만 뺀 읍소의 자세로 부탁했다. 수락한 귀한 분께 진심으로 포장하며 편지를 넣어 보냈다. 나로선 매우 조심스러운 한 걸음 한 걸음이었기 때문에 우리 둘만의 비밀로 남겨질 줄 알았다. 따지고 보면 작가가 자기 책을 읽어달라고 요청한 게 자랑은 아니니까. 하지만 받은 분에겐 자랑이 되었다. 그것까진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책을 지은 사람이 손수 연락해서 품에 안겨준 사실은 충분한 자랑거리였다. 물론 조금이라도 더 홍보를 돕자는 의도가 섞인 걸 안다. 얽힌 사연과 상관없이 어떻게든 표지가 한 번이라도 더 눈에 띄는 게 중요한 거니. 내가 바랐던 것도 어차피 노출의 증가였고. 다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전한 마음과 받은 마음을 서로 고맙게 간직하며 책 자체에 집중하길 원했다. 선물이란 이벤트에 꽂히기보다는. 이 작가는 어쩌다 자기 책을 막 보내주게 되었나 궁금해하는 시선이 날 따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만 관심을 보이면 나도 공짜로 책을 받아 볼 수 있겠다고 수군대는 이들의 속마음까지 들렸다.


정성 가득한 작가표 책 선물 인증 행진에 하릴없이 감사를 표하며 버텼다. 나쁜 의도가 아님을 이해했기에 솟구치는 창피를 누를 수 있었다. 결정해서 보낸 것도 나고, 감당해야 하는 것도 나였다. 원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무사히 받은 걸 알게 되었으니 책을 읽어주길 기다렸다. 또다시 예측이 어긋났다. 받아 주면 읽을 줄 알았다. 읽을 책이 내 책만 있을 거라는 판단은 틀렸다. 나 말고도 여러 곳에서 받은 책이 쌓여있었다. 이만큼 받았다는 책 선물 꾸러미 속에 내 책도 수줍게 끼어있었다. 그나마 언젠가 읽어야 한다고 실토해 주면 확인이라도 할 수 있으니 좀 나았다. 읽고 있는지, 나중에 읽을 건지, 읽고 던졌는지 말이 없으면 알 수 없었다. 나도 안다. 책을 받고 나서부터는 모두 그들의 자율에 맡긴 걸. 그럼에도 읽은 뒤에는 나에게 인사치레라도 할 줄 알았다. 잘 읽었다 또는 정말 재미없다 등 뭐든 간에. 무관심이 억울해 발 벗고 나섰다가 손을 뻗어준 인연에 나도 모르게 많이 기대고 있던 모양이다. 손잡았던 힘을 놓아 버린 그들의 사정은 알 길이 없다. 부탁받은 책이 너무 많아서일까, 아니면 내 책이 그냥 별로여서일까.


쓴 사람이 자기 책을 믿는 당당함으로 다가서면 보다 그럴듯한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 '그럼 어디 한 번 즐겨볼까?' 하면서 서둘러 읽어주고, 읽고 나선 담긴 바를 바로바로 잡아내서 공감하는 광경. 내가 그린 그림은 그랬다. 단, 그려질 확률까진 따져보지 못했다. 최선의 노력을 하면 최고의 결과가 나올 거라는 순진한 등식을 붙든 셈이다. 당연히 생길 거라 믿었던 같은 편을 기다리다 한 방 맞았다. 아름답게 세상을 바라보는 긍정적인 삶의 태도로는 냉소적으로 삐딱하게 바라보는 내 책을 끝까지 읽기 어려웠다는 솔직한 후기가 올라왔다. 씁쓸했지만 남이 내 맘 같지 않은 게 오늘내일 일도 아니니 겸허히 받아들였다. 평소엔 가지기 어려운 인정, '그럴 수도 있지'라고 되뇌며 인생을 배운다. 차라리 취향과 맞지 않다는 고백은 깔끔하다. 제대로 읽고 나서만 전할 수 있는 의견이니까. 정말로 읽은 게 맞는지 의심이 되는 딴소리는 날 복잡하게 만든다. 엉뚱한 데 꽂혀서 선사하는 칭찬에는 대응이 어렵다. 오해에 가까운 응원엔 마음이 혼란하다. 도대체 내가 무슨 책을 썼길래. 책 좀 읽는다는 독서가에게 책을 주고도 핵심을 찔리기가 쉽지 않다는 실망에 기운이 빠져나간다.


자기가 먼저 벌인 일은 생각 안 하고 남만 탓하던 조급증 환자는 지쳐갔다. 괜히 멀쩡한 책이 맞는지 한 번 더 읽어보고, 몸에 맞지 않는 부탁을 하느라 황폐해진 정신을 정돈하느라 애를 쓴다. 얼마나 퉁퉁대며 보냈을까. 어느덧 하나씩 책 속에 담긴 속내를 알아챈 서평이 등장했다. 시원하고 통쾌하며 참신하다 못해 발칙한 글로, 묵직하고 굳건하게 자리 잡은 선입견을 독특하게 풀어내어 우리를 깨닫게 만드는,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냉소자가 보인다고. 좋은 책을 놓칠 뻔했다고도 했고, 나를 만나보고 싶다고도 했으며, 실제로 인터뷰를 요청하기도 했다. 때론 나만의 글을 좋아해 주는 소감에 뜨거워졌다. 강렬하고 매력 넘치는 글솜씨를 가졌으며, 뾰족하고 냉철하고 생각 많아지는 재미진 글이 너무 좋다는. 정말 오래간만에 긴 여운과 마음에 와닿는 글이라며 앞으로도 오래 많이 써달라고 당부했다. 몇몇은 내가 쓰게 될 소설을 기대한다고까지 덧붙였다. 통하는 독자를 넘어 좋아해 주는 팬까지 만나자 고대하던 바람이 채워진 듯했다. 실제로 둥둥 뜬 기분으로 한동안 사뿐사뿐 날아다녔다.


강렬한 쾌감이 지나고 나면 현실을 보다 뚜렷이 성찰하게 된다. 범람하듯 이어지는 재밌다는 독후감을 바라보며 나오던 웃음이 갑자기 뚝 끊겼다. 문득 인간의 선한 심리가 떠올랐기 때문에. 같은 물건이라도 누가 일부러 마음을 다해 제공하면 좀 더 따스한 시선으로 보게 된다. 직접 사서 이용하며 나오는 꾸밈없는 평가와는 다르다. 심리적 빚이 작용해 결론을 비튼다. 예쁘기만 한 책 리뷰와 독서 후기에는 모두 내가 그들에게 지운 부담이 깔려있다. 자연스럽게 읽고 남는 그대로 전해달라 했지만, 은근한 압박과 기대가 없었다곤 못 하겠다. 일부러 모른 척하며 내 책을 향한 사랑에 눈이 멀어 여럿에게 도움을 청한 덕분에 꽤 많은 독서평이 쌓였다. 어느 날 아침, 버릇처럼 지켜보던 검색 결과창을 가득 메운 책을 받아 읽은 독자의 글을 보다 슬퍼졌다. 누군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들의 편애로운 감상문들. 이럴 거면 어렵게 출판사를 찾아서 책을 만들어 팔 게 아니라, 혼자 만들고 읽어달라고 보내는 게 낫지 않겠냐는 극단적 후회까지 치달았다. 심지어 다음 책은 꼭 사서 읽겠다는 최고의 찬사에도 불신이 퍼졌다. 지난 책의 서평단으로 활동하며 보내준 책을 재밌게 잘 읽었다고 했음에도, 이번 책 선물을 거절 없이 받아 읽은 분이 나의 얕은 마음을 건너지 못하고 걸린 탓이다. 또 다음 책이 나올 때도 계속 이렇게 내 책을 퍼줘야 하는 걸까. 어떻게라도 읽히려면 속상해도 참아야 하는 건지.


다시는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모든 걸 걸어보자고 덤볐던 이번 책이 준 가르침이다. 알리지 않으면 알릴 수 없는 차가운 상황은 놓치지 않을 것이다. 모자람 없이 열심히 소개하되, 내 책을 내가 사서 건네며 구걸하듯 읽어달라곤 하지 않겠다. 지인에게 선물은 해도 모르는 사람에겐 주지 않을 테다. 제안부터 수락과 거절, 그리고 초조한 반응을 기다리며 내린 결론이다. 방법이 어찌 되었든 한 사람이라도 내 책을 더 읽으면 좋을 줄 알았다. 진정성 넘치게 작가가 나서면 더 나을 줄 알았다. 출판사가 아닌, 쓴 사람이 직접 하는 건 아니었다. 더 하다간 내가 쓴 글이 싫어지고, 책도 싫어지고, 나까지 싫어질 판이었다. 돈을 주고 읽게 만들려고 쓴 게 아니었다. 나를 글자에 온전히 담고자 했고, 밖으로 펼쳐 생각거리를 던지고 싶었다. 누구든 스스로 구미가 당겨서 읽기를 바랐다. 그 누구가 많으면 더 좋지 않겠냐는 유혹에 넘어갔다. 이왕이면 창작의 고통을 이겨낸 작품을 많이 봐줄수록 더 기쁠 테니까. 혹시 모를 잠재적인 순수한 다수를 위해 인위적인 소수의 마중물을 마련한다는 논리로 설득하고 나섰는데 영 마음이 불편했다. 받았으니 어쩔 수 없이 읽어준 뒤, 팔이 안으로 굽듯 우아하게 포장된 소감문이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여기서 멈춰야 했다. 


몇 명이 읽든 본인이 원해서 읽으면 좋겠다. 읽고 진심이 통해서 남기면 좋겠다. 단 한 명이라도 진실한 독자에게 가닿고 싶다. 한동안 글에 집중하지 못했다. 들인 품이 있으니 뭐가 좀 달라지겠거니 자꾸 들락날락 거리며 들여다보느라고. 우스운 건 나 좋자고 나도 속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떤 책이 궁금해서 리뷰를 찾아보다 맨 마지막에 도서 협찬 문구가 있으면 앞선 내용은 몽땅 사라진다. 그런 내가 왜 내 책 서평에 달린 증정 안내는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여겼을까. 근거 없이 내 책은 다를 거라고, 믿고 싶은 대로 믿어버리곤 꽁꽁 묻어두었다. 그래도 내용이 괜찮으니 좀 다르지 않겠냐며 멋대로 착각하면서. 작위적인 독서 후기를 보고 책이 알려질 가능성이나 저절로 입소문이 퍼질 가능성은 똑같이 희미하다. 금번 경험으로 시원하게 밝혀졌다. 헛된 발버둥을 이제 멈춘다. 그 시간에 글을 쓰고, 남으면 차라리 기도를 하겠다. 진정한 독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출간 도전기로 탄생한 셋째, 아내와 아들에게 선물하며 쓴 세 번째 편지
이전 08화 내 책을 내가 선물하는 기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