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히고 싶은 욕망과 살아가기
글이 아니었다면 지난 3권의 책을 내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황당한 얼굴로 책에 들어간 글이냐고 물으면 정색하며 답하겠다. '설마'. 출간을 도전하는 모든 과정과 감정을 기록한 글을 안 썼다면 진작에 도망쳤다. 불안한 마음을 글로 붙잡았고, 힘든 기분은 글이 쓰다듬었다. 글로써 쓰는 나를 지키며 계속 써나갈 수 있었다. 이에는 이, 글에는 글. 단순한 원리랄까. 세상에 없던 새로운 법칙을 발견한 척 싱거운 소리를 뱉어 본다. 백날 써도 안 읽히면 의미 없는 글 마냥 무용하다.
쓴다는 건 읽히고 싶다는 말이다. 최소한의 독자는 나다. 만족과는 거리가 있어도 '이 정도면'만큼의 결심으로 밖에 내보낸다. 나에게 읽힌 나만의 글이 남에게 찾아간다. 타인이 읽으면 갖가지 느낌이 찾아온다. 다행, 보람, 감사, 애정, 궁금. 쓴 자와 읽는 자는 결이 다르다. 통하지 않는 게 당연해도 기쁘다. 같은지 다른지 대보지도 못하고 방치되는 슬픔보단 무조건 낫기 때문에. 기쁨의 자극은 점차 줄어든다. 하나의 글로 부족하면 더욱 큰 덩어리에 시선을 돌린다. 책은 더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더 읽히고 싶은 바람에서 탄생한다.
한 꼭지의 분량을 읽어줘도 충분히 좋은데 수십 개의 내 글을 연달아 읽는다니. 상상만 해도 전율이 흘러 바로 서기 어렵다. 겪지 못한 쾌감을 좇아 도전을 시작했다. 포기를 모르는 지독한 끈기로 다행히 책을 만들었다. 쓰러지기 전에 나온 건지, 나올 때까지 넘어지지 않은 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신기와 기적의 산물을 손에 잡고 빤히 보니 담긴 내가 보인다. 좀 더 읽히길 원하는 자의 몸부림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그저 쓰고만 싶다던 처음이 어쩌다 이렇게 변한 걸까.
출간을 자랑하지 않는다. 아까보다 더 황당한 얼굴로 그동안 책 나왔다고 써댄 건 뭐냐고 물으면 당당하게 답하겠다. '전혀'. 우선 자랑할 틈이 없다. 알리기도 바쁜데 과시할 시간이 어디 있나. 또한 독자의 비위를 맞춰도 모자랄 판에 어디 제 잘났단 모습을 보일까. 겸손이 미덕인 세상에선 금물이다. 무엇보다도 본질적인 배경은, 책 쓰기가 뽐낼 일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쓰는 행위의 또 다른 결과물일 뿐. 광고와 홍보라는 지적엔 고개를 끄덕여도 우쭐거림이란 판단을 거부하는 까닭이다.
누군가는 자랑을 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쓰는 사람이 범람하는 시대에 한 번쯤은 책으로 엮는 소망을 갖기 쉬우니. 만인이 원하는 걸 이룬 성취를 드러내는 건 본능에 가깝다. '당신들은 못 한 걸 나는 해냈다! 부럽지 않을 수가 없지?' 이름 박힌 책을 가져야 작가라며 으스대고, 안 되는 거 붙잡으면서 고통받지 말고 포기하라며 스스럼없이 남을 낮추는 지경까진 가지 말아야 할 텐데. 책이 목적이라면 넘어가기 쉬운 유혹이다. 남이 하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오기를 가지고 책을 썼듯, 남도 나처럼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여긴다. 단지 시간으로 앞선 자의 우월은 취향이 아니다.
그럼 도대체 당신은 왜 책을 내느냐고 물으면 환하게 답하겠다. '가능성'. 쓰는 글의 읽힐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라고. 책을 내든 안 내든 쓰는 생활은 똑같다. 쓴 뒤에는 읽는 게 남는데, 여기서 책을 낸 경험이 발휘된다. 책 쓴 사람의 글이라면 조금이라도 읽어줄 가능성이 커진다. 독자로서 내린 판단이 그랬으며, 작가로서 얻은 반응이 같았다. 읽어야 알릴 수 있는 글의 가치를 읽기 전에 전할 수 있는 장치랄까. 출간 작가의 글은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드는 미련을 가진다. 뭔가 좀 다르지 않겠냐는 믿음이 슬쩍 올라타서 고개를 기울인다. 책 쓴 사람이라 불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쓰는 사람으로서 신뢰를 더하기 위해서 책을 낸다.
읽히기 위해 쓴 책을 내고 나면 정말로 읽히는 일이 벌어진다. 세 번째 책이 나온 초기의 오두방정을 다 떨고 나서 잠잠해졌을 무렵. 알리고 부탁하고 요청하고 외치고 떠들고, 할 걸 다 한 뒤 찾아오는 고요한 시기. 알만한 사람 중 읽을 사람은 다 읽은 상태다. 사지만 읽지 않을 사람도 포함해서. 더 이상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방황하던 책의 행방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들었다. 친절히 서점에 방문해서 내 책을 사 왔다고 남겼다. 심지어 지난 책까지 함께 데리고. 천천히 한 권씩 읽으며 후기를 들려줬다. 너무 놀라운 정성이라 궁금함을 못 참고 결국 물었다.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냐고. 아니라는 대답에 말을 잇지 못했다. 잠깐 운 것도 같다. 감사는 확실히 전했다.
얼마나 읽히면 충분할까. 언젠가 스스로 던지고 답하지 못한 질문이다. 받는 사랑이 충분하다고 느끼기 어려운 것과 같지 않으려나. 몸 둘 바를 모를 순 있어도 욕구의 끝을 알 순 없다. 일부러 참는 게 아니라면 다다익선을 피할 논리가 빈약하다. 책에선 무분별한 비교와 경쟁을 혼내고서, 현실에선 숫자에 놀아난다. 한 명이라도, 한 권이라도, 한 순위라도 더 더 더. 돈이 필요 없다는 노랫말로 돈을 긁어모으는 팝스타의 아이러니가 똑같이 펼쳐진다. 쓰면서도 덜 읽힐까 봐 걱정하느라 한 글자가 무거워진 지 오래다. 나를 사로잡은 읽히고 싶은 욕망은 꺼지길 거부한다.
쓰는 내게 자유를 줄 거라 믿었다. 쓰고 나니 나만 읽는 건 글이 아니었다. 글에 자유를 담았지만 남이 모르면 내가 가진 자유는 사라진다. 쓰기 전엔 몰랐던 역학 관계에 다소 어리벙벙하다. 내가 좋은 글이라도 반응이 없으면 믿을 수 없다. 잘 쓴 글은 잘 읽혀야 성립된다. 잘 읽히기 위해 쓰는 정성이 커질수록 돌려받길 바라는 요구도 커진다. 양쪽이 함께 늘어나며 벌어진 간극은 메꾸기 어렵다. 갑자기 왜 쓰는지 헷갈린다. 쓰기 위함인지 읽히기 위함인지.
3권의 책이 나오는 동안 아무 말 없던 어머니가 처음으로 말씀했다. 앞으로도 계속 즐겁게 쓰라고. 멈추지 않고 쓰는 아들이 재밌어 보인 모양이다. 뜨끔했다. 물고 물리는 씀과 읽힘 사이에서 재미를 놓친 게 언제부턴지 기억이 멀었다. 쓰기 시작했을 땐 재미만 있었다. 읽든 말든 쓰는 재미만으로 한참을 썼다. 이젠 읽히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 살면서 하고 싶어서 선택한 최초의 활동이 글쓰기인데, 즐거움이 어느샌가 쏙 빠져있었다. 겁이 났다. 이러다 쓰기 싫어질까 봐.
파고든 욕망을 수그러들게 하는 건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도구의 인간답게 품고 다루는 기술이 필요하다. 먼저 쉬운 방법부터. 읽혔던 순간의 벅차오름을 되새긴다. 공감과 감동의 댓글에서 출판사 편집자의 제안과 칭찬을 거쳐 독자의 감탄과 인정까지. 새로운 자극을 좇느라 묵은 추억을 잊고 지냈다. 다음은 읽히고 있음에 감사하기. 지금 이 순간에도 쓸 수 있는 건 누군가 읽고 있어서다. '더 많이'라고 부르짖을 줄만 알았지, 현재의 읽는 이를 향한 고마움을 떠올리지 못했다. 마지막, 원동력으로 삼기. 쓰면서 읽히길 바라는 건 이제 막을 수 없다. 휘말리지 않고 오히려 강렬한 타오름을 쓰는 힘의 연료로 사용한다.
합리화의 끝판왕을 보았는가? 어쩌겠나. 어차피 쓴다는 건 자신의 마음에 걸맞게 꾸미는 작업인 걸. 난 오래 쓰고 싶다. 멋모르고 쓰던 시기를 지나 눈치를 보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에라, 이까짓 쓰는 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뒤집어엎고 떠나긴 싫다. 꼭 하고 싶은 일을 무방비로 관두고 싶지 않다. 읽히기 위해 쓰는 걸 받아들이며 읽고 싶은 글이 무엇일지 백지를 바라본다. 내가 빠지지 않으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한. 끝까지 읽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쓴 사람의 이름이 궁금해지고, 알고 나선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을. 말도 안 되지만 그런 글이어야 읽힌다. 내게 남은 작가는 모두 그랬다. 당장은 해결이 어려운 욕망을 등불로 쓰며 나아가자. 쓰다 보면 길이 보일 거란 희망을 불가능이었던 책을 내며 배웠다. 멈추지만 않는다면 반드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