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 아빠 육아 생존기] 2화
어느 날 하교 시간, 담임선생님께서 평소와 달랐다. 원래는 아이를 데리러 온 부모의 얼굴을 확인하고 교실 밖으로 내보내 주는 방식이다. 그날은 나와 인사를 나누고도 아들을 보내주지 않았다. 뭔가 이상해 갸우뚱거리며 반 아이들이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나만 남게 되자 나눌 이야기가 있다며 교실 안으로 들어와 달라고 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아들의 학습 관련이려니 믿고 순순히 따랐다. 내용은 긴장되지 않았고, 외국어로 대화해야 하는 내 입장만 긴장 가득한 채 귀를 열었다.
마음의 준비가 무색할 정도로 간단한 이야기였다. 누가 누구를 ‘물었다’라는 짧은 설명. 당황해서 수동태인지 능동태인지 한참을 헤매다가 되물었다.
"준(아들)이 누구에게 물렸다고요?"
"아니요. 준이 친구의 팔을 물었어요."
차오르던 분노는 차가운 공포로 변했다. 딱딱하게 굳어지는 내 얼굴을 선생님은 분명히 보았으리라. 멍하니 놓았던 정신을 어렵게 차린 후, 나와야 할 다음 말을 겨우 꺼냈다. 물린 친구는 괜찮냐고. 다행히 아무렇지 않다고 했다. 당시 상황 설명이 이어졌다. 놀이 시간에 다른 담당 교사가 아이들을 돌보던 중에 발생했으며 아들에게 들어보니 어떤 놀이를 하던 중이었다고. 아직 존재하는 언어 장벽 때문에 정확히 파악되지 않으니 나보고 이야기를 나눠보고 알려달라 부탁했다.
아무도 없는 적막한 교실에서 아들과 마주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최대한 편안하고 차분하게.
"아들, 오늘 친구 팔을 물었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어?"
"나 혼자 놀이하는 중이었는데 거기에 친구 팔이 있었어."
"무슨 놀이를 했는데?"
"방울 놀이. 공중에 방울이 떠다니고, 그걸 내가 입으로 물어서 터뜨리는 놀이였어."
예상치 못한 설명에 다시 한번 정신이 흔들렸다. 나로선 바로 끄덕이기 어려운 해명이었다. 그럴듯하지 않았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잠시 아들의 표정과 눈빛을 빤히 바라봤다. 거짓 없는 만 5세의 진심을 믿는 수밖에.
궁금해서 다가오는 담임선생님에게 들은 대로 전했다. 이어지는 반응도 예측과 달랐다.
"준은 상상력이 매우 풍부한 아이라서 그럴 수 있겠네요."
선생님은 천천히 아들이 알아듣도록 친구가 불편할 수 있는 놀이는 학교에서 하지 말자고 했다. 알겠다며 아들은 약속했다. 덧붙여 이 재밌는 상상 놀이는 아빠와 함께 집에서 하면 좋겠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얼떨떨한 마무리에 어버버 하며 마지막 질문을 했다. 그 친구 부모에게 사과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겠냐고. 선생님은 이미 아들이 사과하는 의미로 멋진 그림 편지를 그려 주었고, 부모에게도 하교할 때 알려줘서 내가 뭘 더 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친구 엄마 아빠는 놀다 보면 있을 수 있는 일이라 괜찮다고 했다며.
복잡한 감정을 가득 안고 아들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매일 오전, 오후에 오가는 길을 조용히 말없이 걸었다. 평온한 우리 모습과는 다르게 내 머릿속은 꺼낼 말을 찾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거의 다 도착해서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적당한 첫마디를 골랐다. 생각이 완벽히 정리되기 전이었지만, 시기를 놓치면 알 될 것 같아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아들, 학교에서 여러 가지를 배우지? 모르는 걸 배워가는 곳이야. 오늘은 주변 친구가 불편하거나 다칠 수 있는 놀이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배운 거야, 알겠지?"
내 두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머리와 마음으로 이해했다는 아들의 태도였다. 내가 아는 아들이라면 친구와 그 일이 벌어진 직후부터 계속 미안했을 테다. 또한, 자기 뜻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답답하기도 했을 거고. 아빠가 하굣길에 평소와 다르게 곧장 못 데려가는 걸 묻지도 않고 조용히 기다렸던 것을 보면 왜 그래야 하는지 알고 있던 눈치다.
작고 연약한 아들이라 항상 친구들에게 치이지 않을까 걱정만 해왔다. 이렇게 가해자가 되었다고 하니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아들에게 다른 친구가 거칠게 대하면 그 친구의 부모를 내심 미워하고 탓하는 데만 익숙했다. 처지가 바뀔 거라곤 상상해 본 적이 없어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 돌아보니 삐쩍 말랐던 나도 예상치 못하게 커왔다. 많은 친구와 서로 부딪히며 자랐다. 사과를 받기도 하고 하기도 하면서. 지난날을 깜빡하고 사랑스러운 내 아이라서 그럴 거라 짐작도 하지 않았던 게다. 항상 우리는 피해자일 거라고 안일하게 단정 지었던 게 부끄러워졌다.
다음 날 아침 등굣길에 만난 그 친구 아빠에게 다가가 사과했다. 미안해하는 내게 정말 괜찮다며 시원한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오후 하굣길에는 그 친구 엄마에게 한 번 더 했다. 아들이 그려준 캥거루 그림이 굉장하다고 칭찬해 주며 정말 괜찮다고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애써 웃더라도 하고 싶은 한 마디를 어떤 식으로든 뱉었을 테다. 다음부터 조심했으면 좋겠다는 표현을 돌려 넣든 꾸겨 넣든. 어찌 되었든 내 아이가 물렸다는데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도리어 유쾌한 반응에 민망하게 고마워하며 돌아섰다.
전날보다 더 뒤숭숭한 기분으로 아이와 돌아왔다. 해맑은 아들이 갑자기 웃픈 이야기를 들려줬다.
"오늘 어떤 친구가 화가 나서 교실 문을 발로 찼거든. 그래서 내가 어제 갔던 곳에 들어가서 좋은 행동을 위한 시간을 보냈어."
교실에 붙어있는 작은 방이 조용히 반성하는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아들은 홀로 생각하는 방에서 친구에게 사과하는 그림 편지를 그렸던 거고. 어떤 마음으로 아들은 그 시간을 보냈을까. 지금 내가 가진 혼잡한 상태와 비슷했을까. 아니면 쉽게 깨닫고 깔끔하게 미안하다는 표현에 집중했을까. 너와 내가 얻은 깨달음이 조금 다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른으로 커가는 네게도, 부모가 되어가는 내게도 좋은 배움의 기회였기를.
홍석준 작가의 [전업 아빠 육아 생존기]
"옛날에는 아빠도 육아를 함께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대."라며 마치 여성도 투표할 수 있게 해 달라 주장하던 옛사람처럼 잊히길 바란다. 내 바람이 지금 읽고 있는 당신으로부터 시작되길 바라며 글을 보낸다.
아빠도 함께하는 육아를 만드는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 저자 홍석준
*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원고료는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전액 기부합니다.)
* 표지 사진 출처 : © Olichel, 출처 Pixabay
작년 중순 네이버 연애 결혼 <썸랩>으로부터 원고를 요청받았다. <썸랩>은 네이버와 문화일보의 합작 회사로 네이버의 '연애 결혼' 주제판을 운영했었고, 현재는 연애 결혼과 관련된 컨텐츠를 네이버 내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제공하고 있다. 에디터님께서 우연히 내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를 읽고 내용이 정말 좋아 연재를 부탁한다고 했다. 보내주신 칭찬을 괜히 덧붙이자면 '쉽게 읽히면서도 중심이 잡힌 글'이 참 좋다고 했다. 세상에 필요한 육아하는 아빠 이야기를 들려주며 꼭 같이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제안에 감동했다. 이 글은 그렇게 탄생했다.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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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제가 쓴 책이 나왔습니다. 애만 만들고 아빠인 척하던 제가 변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아닌 척 모른 척했지만 저도 그저 엄마가 애를 키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많아져서 함께하는 육아가 당연해지는 날을 꿈꿉니다. 책 표지에 적어 둔 것처럼 인세 수익은 모두 필요한 아이들에게 기부합니다. 다른 욕심 없이 오로지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져서 세상이 변하길 바랍니다. 아이가 있거나 아직 없거나 다 컸거나 심지어 없을 예정이어도 읽으면 좋습니다. 엄마 아빠가 함께하는 육아를 아이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이해해야만 바뀌기 때문입니다.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필요한 분들에게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순간을 나눌 수 있어서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