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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Dec 15. 2023

다 키웠나 싶다가도

아이의 성장을 확인하는 순간은 나로 향한 시선을 아이에게 조금만 돌리면 끊임없이 찾아온다. 아빠로서 화장실 청결을 위해 몸소 실천하는 앉아서 작은 일 보기를 아들이 따라 하기 시작할 때. 아내에게 선물 받은 옷을 입고 등장한 하교 시간에 녀석이 새 옷을 단박에 알아챌 때. 학교 수영 수업 시간에 낮은 수준 반에서 여유롭게 배우는 게 높은 수준 반에서 스트레스받는 것보다 좋다고 표현할 때. 학교에선 배운 대로 성실하고 사려 깊게 행동해서 선생님께 롤모델이라 불리지만, 삼촌과 이모랑 즐기는 마피아 게임에서 천연덕스럽게 모두를 속일 때. 그토록 믿었던 선량한 시민 엄마가 배신감을 느낄 만큼.


더 나아가 최근엔 전에 못 보던 진기한 면모를 보여 내 아들이 맞나 의심했다. 집에 손님이 오면 본인이 그린 그림 중 자신 있는 작품을 눈에 잘 띄는 곳에 슬그머니 꺼내 놓는다. 누군가 못 보고 지나칠 수 없게끔. 손님과 우리 부부가 대화하고 있으면 생뚱맞게 평소엔 하라고 해도 미루던 피아노 연습을 갑자기 시작한다. 누구도 못 들은 척할 수 없게끔. 그림을 보거나 연주를 들은 사람이 멋지다고 감탄하면 슬쩍 웃는다. 더 어릴 땐 쑥스러워하느라 보여달라고 해도 선뜻 나서질 못하고 뒤로 숨었다. 이젠 먼저 드러내며 칭찬의 기회를 열어 놓는다. 당당히 받은 뒤에는 감사의 인사도 수월하게 건넨다. 적극적인 모습에 내가 알던 아이라고 믿지 못해서 놀라곤 한다.





수줍고 부끄럼 많던 아이는 사라지고 활발하게 다시 태어난 녀석은 연말의 파티를 즐겼다. 일 년 동안 한 팀으로 뛰었던 첫 축구팀 시즌 쫑파티를 시작으로. 먼 산골에 있는 한 아이 친구의 집에 모여 온종일 놀았다. 수영하고, 공 차고, 먹고 마시고. 다음은 할로윈 파티. 아들이 좋아하는 삼촌과 이모를 초대해 온 동네를 돌며 한바탕 유령 소동을 벌였다. 덕분에 반도 못 채우던 사탕 바구니를 처음으로 가득가득 채울 수 있었다. 강당에서 벌어지는 디스코 파티, 머리를 마음껏 꾸미는 크레이지 헤어 데이, 각종 레이스가 벌어지는 수영 카니발까지 학교의 각종 파티도 열심히 누렸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생일 파티도 성공적으로 치렀다. 전자오락실의 파티룸을 빌려 좋아하는 친구를 모두 초대해 잊을 수 없는 하루를 만들었다. 집에서 열리는 홈파티에서는 호스트를 맡는다. 본인 생일 당일과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든 날 저녁에는 일정표를 짜면서 파티를 리드했다. 댄스 타임, 퀴즈 대결, 게임 등 각종 레크리에이션을 진행하면서. 이렇게 열정적인 진행자는 본 적이 없다.


학교를 마치고 나올 때면 자주 흥분 상태가 된다. 오늘은 어디에서 어떤 친구랑 만나서 놀기로 했다고 전한다. 아무리 미리 며칠 전에 약속을 정해야 한다고 일러두지만, 아이들은 당일 번개가 좋은 모양이다. 한 번은 요청대로 지정한 놀이터에 아들을 데려다주었는데, 7명이 모였다. 같은 반 남자 친구들이 대충 다 모인 셈이다. 하루 종일 놀고도 또 모여서 노는 걸 보니 신기했다. 해가 질 때까지 지치도록 뛰놀던 어릴 적 내 모습이 겹쳐 보이며, 땅에 발이 붙을 새 없이 날아다니는 아들이 친숙하다. 그렇게 놀며 보낸 한 해가 어느덧 끝이 났다. 3학년 마지막 날, 좋아하던 선생님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사진을 찍으며 방학을 맞이했다. 바로 다음 날인 방학 첫날에도 놀이터에서 학교 친구들을 만나 또 놀긴 했지만, 어쨌든 방학이었다.





뒤바뀐 광경을 보며 이제 다 컸다 싶은 마음에 마음을 놓으려고 하면 누군가 날 가만두지 않는다. 다름 아닌 훌쩍 자란 아들, 동일 인물이다. 익숙함을 사랑하고 새로운 변화에 취약한 아이는 여전하다. 발이 커서 새 신을 신기려고 하면 한 번에 바꾸는 법이 없다. 신던 신발이 좋아서 좀 작아도 한동안 계속 신고 다닌다. 도저히 안 되는 시점에 가서야 겨우 바꿔 신는데, 어쩐지 전에 신던 신발을 못 버리게 하고 모셔 둔다. 그렇게 신발장에 지난 신발 친구들이 쌓이고 있다. 걱정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지내는 편이다. 하교 후 데리러 가는 시간에 민감하다. 꼭 5분 일찍 오고, 멀리 어디 다녀오지 말고, 위험한 곳에 가지 말고, 비 올 때 우산 놓고 왔다가 다시 챙기러 가느라 늦을 수 있으니 10분 더 일찍 오고 등등. 엄마 아빠가 없는 즐거운 학교 파티에서도 마치고 만날 때쯤 눈물이 '뿅' 하고 나온다. 그럴 리 없다는 걸 머리로 이해해도 못 볼까 봐 불안하다고 털어놓으며.


이번 방학에는 놀라운 시도를 했다. 무려 방학 첫 주에 일주일 축구 캠프를 신청했다. 멀리 가서 자고 오는 그런 캠프는 아니고, 원래 보내는 학교 가는 시간에만 다녀오는 일정이다. 심지어 장소도 다니는 학교의 운동장이다. 이 모든 조건은 급격한 환경 변화를 힘겨워하는 아이를 위한 배려다. 전날까지도 아무렇지 않던 아들이 첫날 새벽, 잠에서 깨자마자 눈물을 뚝뚝 흘렸다. 왜 엄마나 아빠가 함께 머물 수 없는지부터 시작해서 축구 캠프를 향한 의문과 원망이 흘러나왔다. 축구 선수를 꿈꾸는 아이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차분하게 설명해 주고, 첫날이니 같이 가서 분위기를 보고 판단하자고 했다. 물론 이런 과정은 최초에 함께 일정을 결정하는 시점에도 충분히 가졌던 시간이다. 당연히 결정도 아이에게 맡겼었고. 계획하던 그때와 닥친 지금과는 당사자의 마음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다시 한번 천천히 기다려준다. 





눈물 가득한 얼굴로 헤어졌던 첫날이 무사히 지나갔다. 날이 지날수록 울음은 짧아졌다. 새 걸로 바꿔 신지 않겠다며 고집하던 작은 축구화 때문에 잡힌 물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씩씩하게 다녀왔다. 하루하루 배운 기술과 즐거웠던 기억을 조금씩 더 많이 나눠주었다. 중간중간 내가 왜 이걸 하겠다고 했을까 자책하며, 차라리 학교를 일주일 더 다니는 게 낫다는 푸념도 변함없긴 했지만. 그만큼 달라진 낯선 환경이 쉽지 않아서 힘겹게 자기 극복 중이라고 믿고 옆에서 맞장구를 쳐주고 있다. 오늘이 축구 캠프의 마지막 날이다. 끝이라는 후련함에 아들은 개운하게 잠에서 깨어났다. 아침에 우리 부부와 인사하고 돌아서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살짝 짠해도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많아지도록 도와야 하는 부모로서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남은 긴 방학이 조금 막막하기도 하지만, 많이 키운 든든한 아이와 함께라서 예전보단 부담이 덜하다. 하고 싶은 걸 묻고 상의해서 정하며 하루를 보낼 수 있으니. 곧 십 대에 들어서면 지금보다 더 급격한 성장을 보일 테다. 지금 쌓는 시간이 우리 사이를 보다 부드럽고 끈끈하게 이어줄 수 있도록 아이를 섬세하게 바라봐야겠다. 이제 다 키웠다는 말은 영원히 내려놓기 어려운 불완전한 문장일지 모른다. 함께하는 동안 사람 대 사람으로, 가족 대 가족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관계를 쭉 맺어간다면. 타인에 무관심한 내게 가끔 버겁지만, 아이라는 선물 덕분에 변할 수 있는 틈을 알아간다. 그래서 자식을 낳아 키우는지도 모르겠다. 이참에 자신도 스스로 키우라고.





* 매일 쓰는 진짜 일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급 정보가 있지도 않은 아이와 지내면서 겪는 온갖 후회와 반성의 잡생각 뭉텅이 '육아 생존기'를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로서 기록하는 글을 쓰고 나면 자주 듣는 말이 있어요. 어떻게 아빠가 이런 육아 일기를 쓸 수 있냐고요. 부럽고 신기하다고요. 정말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혀 관심 없던 전과 달라진 건 사실입니다. 그 변화의 일대기는 제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에 담겨있습니다. 변화를 원하신다면 권해봅니다. 또 누가 변할지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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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제가 쓴 책이 나왔습니다. 애만 만들고 아빠인 척하던 제가 변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아닌 척 모른 척했지만 저도 그저 엄마가 애를 키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많아져서 함께하는 육아가 당연해지는 날을 꿈꿉니다. 책 표지에 적어 둔 것처럼 인세 수익은 모두 필요한 아이들에게 기부합니다. 다른 욕심 없이 오로지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져서 세상이 변하길 바랍니다. 아이가 있거나 아직 없거나 다 컸거나 심지어 없을 예정이어도 읽으면 좋습니다. 엄마 아빠가 함께하는 육아를 아이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이해해야만 바뀌기 때문입니다.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필요한 분들에게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순간을 나눌 수 있어서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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