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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Oct 28. 2023

겨우 살아난 뒤의 부끄러움

캄캄한 밤, 한적한 도로를 달렸다. 뒤에 탄 아들과 수다를 떨며 운전하는 즐거운 시간. 커다란 사거리를 초록 신호에 맞게 건넜다. 반쯤 통과했을까. 불빛 없는 검고 육중한 물체가 갑자기 우리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속도를 늦추며 핸들을 반대로 틀었다. 겨우 만든 몇 센티미터 간격을 두고 라이트 꺼진 차량이 옆으로 휙 지나쳤다.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사거리를 마저 건넜다. 조금 전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 한동안 묵묵히 달렸다. 나중에 전해 들은 아들의 증언에 따르면 집에 오는 내내 입을 벌린 채 운전했다고. 신호를 무시한 회전 차량과의 정면충돌을 피한 건 기적이었다. 아찔한 기억은 허락된 신호에도 교차로를 천천히 지나는 버릇을 남겼다.


환한 태양 아래, 맑은 물 위에 보트를 띄웠다. 배 안에서 어린 아들은 혼자 앉아 엉엉 울고 있다. 나와 아내는 배 밖에서 물에 빠진 채 뒤에서 밀고  있다. 벌써 이번이 4번째 멈춤. 늪지대 호수가 한동안 내리지 않은 비로 얕아진 탓에 선체 밑바닥이 닿아 꿈쩍하지 않았다. 뒤에 달린 전기 모터는 진흙 바닥에선 쓸모가 없었다. 세 가족 전용 배로 자유롭게 나와서 주변엔 아무도 없는 상태. 주요 전력인 나는 이미 세 번이나 배를 밀어 바닥에서 꺼내느라 힘을 다 썼다. 대자연 한가운데서 구조요청을 위한 통신망도 희미해진 터라 망연자실했다. 주위는 악어나 피라니아가 나와도 어색하지 않은 풍경. 젖 먹던 힘까지 쓴다는 표현이 실감 날 정도로 악문 이가 부서져라 밀었다. 허리까지 빠진 늪 바닥의 공포는 무시무시했다. 두려움이 가족에게 퍼질까 봐 표정을 숨겼다. 울음을 그친 아들까지 함께 밀면서 가까스로 배를 끌어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발지로 도망쳤다.


짧은 간격으로 경험한 두 번의 생사기로는 삶을 향한 감사를 저절로 높였다. 아무 탈 없이 돌아온 일상이 다행이라며 자주 안도했다. 없을 뻔했던 식사와 잠이 달게만 느껴졌다. 생의 고마움으로 눈을 뜨는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조그만 틈만 보이면 아이나 아내와 시시비비를 가리며 부딪히던 게 부질없어 보였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살아있기에 가능한 투정으로 보여 어지간하면 넘어가게 되었다. 한동안 마음속에 최우선 소망으로 자리 잡았던 '가족과 사이좋게 지내기'가 손쉽게 해결되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길지 않았다. 용서받은 죄인이 반성과는 별개로 나쁜 짓을 반복하듯 망각은 금세 찾아왔다. 





알면서도 하는 잘못은 나쁘다. 그렇다면 모르고 하는 잘못은 괜찮은 걸까. 잘만 하고 있다고 여기던 아빠에게 아들은 현실을 알려줬다. 내 유일한 액세서리는 손목시계인데, 약을 갈기 귀찮고 비용이 아깝다. 어차피 시간은 휴대전화로 확인하니 장식이나 마찬가지고. 자연스럽게 멈춘 시계를 차고 다니자, 어느 시간에 멈춰있냐고 아이가 물었다. '아빠가 좋아하는 시간!'이라는 대답에 머리를 굴리더니 답했다. "그럼 2시 45분인가? 나 학교 마칠 때 만나서 점심 남겼다고 혼내려고~" 뭔가 잘못되어 있었다. 아들과 재회하는 그 시간엔 가장 환하게 맞이한다고 생각했는데.


못난 어른답게 사과에 앞서 자초지종을 따졌다. 나의 믿음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하교할 때 웃으며 반겨주는 건 사실이었다. 바로 그 뒤에 점심 맛있게 먹었냐는 물음에 남겼다는 대답이 나오면 바로 말투와 표정이 싹 변한다고. 곧장 잘못했다고 인정했다. 아직도 부드럽게 말하는 게 어렵다고. 미안하다는 말에 돌아오는 아들의 긴 설명이 듣기 민망했다. "아빠가 말 예쁘게 못하는 거 익숙해서 괜찮아. 저번에도 장난감 없어졌다고 했을 때 눈물이 난 걸 먼저 달래주지 않고 찾는 데만 집중하라면서 뚝 그치라고 했거든. 방 정리 안 했을 때도, 게임 오래 할 때도 얼마나 세게 말하는데. 아, 부드러울 때 있어! 내가 아침에 학교 들어갈 때랑 잠들기 전에. 그땐 아빠가 쉴 수 있으니까." 이건 아닌데, 참.


죽을 뻔한 뒤론 정색 없이 지내는 줄 알았다. 사랑과 친절만 풍기면서 사는 걸로만. 날 온전히 느끼는 아이의 사정을 듣고 보니 혼자 꾸몄던 환상이 깨졌다. 뒤늦게 지난 몇 달간 아빠로서의 나를 뒤지며 살폈다. 요번 방학은 그래도 꽤 훌륭하지 않았을까. 원하던 축구 골대를 사서 틈만 나면 함께 놀았다. 비록 조난에 가까운 상황이 있었지만, 가보고 싶다던 캠핑도 다녀왔다. 좋아하는 수족관에 가서 물개 쇼도 즐겼다. 문득 놀 땐 다 좋은 거라는 생각과 함께 개학 전 아들이 털어놓은 불안이 떠올랐다. 심각한 고백을 별일 아니라는 듯 넘긴 내 태도도 함께.





정신없이 놀며 보낸 방학 마지막 밤. 불 끄고 누운 자리에서 학교 가기가 무섭다고 말했다. 오랜만에 가는 게 아니고 처음 학교에 가는 기분이라고. 일요일 밤이면 다음날 월요일에 학교 가기 싫은 것처럼 막상 가면 괜찮을 거라며 얼른 자라고 타일렀다. 아기도 아닌데 자꾸 반복되는 학교 가기 싫어 타령이 지겨워진 것도 없다곤 못 하겠다. 외면했던 아이의 걱정은 곧 꽤 큰 고민거리로 드러났다. 같이 축구하던 친구들이 럭비하러 가서 혼자 남겨졌다고 했다. 본인도 럭비를 시도했는데 태클을 당한 게 너무 아파서 못 하겠더라는. 그렇게 마무리된 지난 학기같이 이번 새 학기도 함께 놀 친구가 없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다양한 친구 관계의 아픔을 겪는 아이를 보아왔다. 좋아서 한창 붙어 놀던 친구에게 생일 초대를 받지 못해 서운해하고, 학교 끝나고 노는 약속을 만들었지만 어쩐 일인지 성사가 안 돼서 아쉬워했다. 그때마다 조급한 마음에 직접 해줄 도움을 찾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다면 언제나 변치 않는 응원자로서 가만히 들어주고 마음을 쓰다듬으며 기운을 북돋아 주었어야 했다. 단지 친구들과 잘 지내보라는 영양가 빠진 조언을 답답한 말투에 섞어 상냥하지 않게 전했다. 낯 가리고 수줍은 많은 아이를 확실히 가정하고는 좀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압박을 담아서.





마지막 순간인 걸 알았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다시는 어여쁘고 귀여운 얼굴을 못 본다면, 끝에 남는 내 표정과 말을 어찌하고 싶을까. 아빠는 혼내길 즐기고, 예쁘게 말할 줄 모르고, 감정을 달래주지 않고, 오직 자신이 편해질 때만 부드러운 사람으로 영원히 남길 바라지 않는 건 분명하다. 나와 달리 아이는 항상 내게 최선이다. 일 년에 한 번 돌아오는 파더스 데이(아빠의 날)에 최고의 하루를 또 한 번 내게 선물했다. 정성 듬뿍 담은 카드와 선물, 맛있는 식사와 케이크, 잠들기 전 안마 서비스까지. 이런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아이의 따뜻한 사랑을 평소에도 당연하게 받고 있다. 구김 없는 밝은 표정으로 내게 말 걸고 보여주고 안기고 웃어주며. 같은 진심과 자세로 아이를 대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모자란 어른은 부끄러웠다.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미명 아래 내식대로 아이를 대해도 괜찮다고 믿어온 모양이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도 깨닫지 못하고 뻔뻔하게 지킬 만큼 강하게. 당장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아도 지금은 무조건 마지막이다. 오늘 보낸 하루는 다시 누릴 기회가 없다. 무심하고 딱딱하게 지냈다면 변하지 않고 그대로 박힌다. 자라는 아이와 붙어 있는 시간이 돌아보기 싫은 모습으로 조각되길 원치 않는다. 서툴러도 사랑 가득했던 아버지라는 추억으로 남으면 좋겠다. 오래가면 좋겠지만 욕심은 내지 않는다. 또다시 흔들려도 계속하는 다짐으로 상기시키면 되니까. 나 편해지자고 모른 척 잊고 지내지만 않는다면. 우선 오늘만 잘 쌓아보자. 내일이 없는 것처럼.





* 매일 쓰는 진짜 일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급 정보가 있지도 않은 아이와 지내면서 겪는 온갖 후회와 반성의 잡생각 뭉탱이 '육아 생존기'를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로서 기록하는 글을 쓰고 나면 자주 듣는 말이 있어요. 어떻게 아빠가 이런 육아 일기를 쓸 수 있냐고요. 부럽고 신기하다고요. 정말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혀 관심 없던 전과 달라진 건 사실입니다. 그 변화의 일대기는 제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에 담겨있습니다. 변화를 원하신다면 권해봅니다. 또 누가 변할지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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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제가 쓴 책이 나왔습니다. 애만 만들고 아빠인 척하던 제가 변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아닌 척 모른 척했지만 저도 그저 엄마가 애를 키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많아져서 함께하는 육아가 당연해지는 날을 꿈꿉니다. 책 표지에 적어 둔 것처럼 인세 수익은 모두 필요한 아이들에게 기부합니다. 다른 욕심 없이 오로지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져서 세상이 변하길 바랍니다. 아이가 있거나 아직 없거나 다 컸거나 심지어 없을 예정이어도 읽으면 좋습니다. 엄마 아빠가 함께하는 육아를 아이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이해해야만 바뀌기 때문입니다.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필요한 분들에게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순간을 나눌 수 있어서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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